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9·11테러 이후 미국인들의 새로운 섹스 심벌로 떠오르자 국내에서도 '70대 노인' 럼즈펠드의 에로틱 카리스마에 대한 관심이 높다.
국내 젊은 여성들 사이에는 요즘 삼성카드 CF 속의 정우성이 매력남으로 통한다. 한편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한 여론조사에서 국내 재벌총수 중 가장 섹시한 남성으로 꼽혔다. 그렇다면 '미녀그룹'인 미스코리아 출신들이 보는 남성의 기준은 무엇인가.
1932년생인 럼즈펠드 장관이 올초 ‘섹시한 남자:미국의 새로운 핀업(pinup)’이란 제목으로 격주간의 보수성향 정치잡지 ‘내셔널 리뷰’의 커버스토리를 장식했다. 그가 펜타곤(국방부)에서 행하는 TV 브리핑이 주부들을 위한 아침 연속극보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그가 쓰고 있는 테 없는 안경의 판매량이 급속히 치솟았다. 공화당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이후 오랜만에 여자에게 인기있는 남자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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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즈펠드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 매일 TV에 나와 전황을 브리핑했다. 미국인들은 마치 오프라 윈프리 쇼를 보듯이 그의 브리핑을 지켜봤다.
월스트리트저널의 편집위원으로 TV비평가인 클라우디아 로젯은 최근 기사에서 “럼즈펠드의 브리핑은 최근 TV쇼 중 최고였다”며 “그는 국가가 곤경에 처했을 때 카메라 앞에서 가장 세련된 행동을 보여준 신사였다”고 썼다. 또 “럼즈펠드의 매력은 미니멀리스트 스타일의 직설적인 화법과 말하고 싶지 않은 문제에 대한 답변을 요구받았을 때 하는 특유의 심술궂은 답변”이라고 덧붙였다.
민주당원으로 리버럴한 이미지였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완곡한 화법을 구사했다면 럼즈펠드는 직접적인 화법을 구사한다. 클린턴은 “기자들이 사실을 왜곡한다”고 비난하고 싶어도 “기자들이 오보를 하는 것은 마감시간에 쫓겨 그런 것 같다”고 돌려 말하는 식이다. 그러나 럼즈펠드는 말 돌리는 것을 싫어한다. 야구로 말하자면 강속구를 좋아하지 변화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펜타곤 출입기자들은 오히려 그런 럼즈펠드를 좋아한다. 공화당과는 성향이 맞지 않는 리버럴한 여기자들조차 “존 애슈크로프트 법무장관은 악마의 화신처럼 생각되지만 럼즈펠드는 좋아한다”고 고백할 정도다. 정부의 브리핑은 늘 불분명하다. 그러나 럼즈펠드는 직접적이면서도 품위있고 명확하다. 또 기자회견에서 정곡을 찌르지 못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퉁명스럽게, 신랄하게 대답함으로써 기자들을 우습게 만든다.
뉴욕타임스의 패션기자 지니아 벨라폰테도 최근 기사에서 “9·11 테러 이후 여자들이 남자를 평가하는 기준이 달라졌다”며 “상당수 여성들이 값비싼 점심을 주문하고 낭패를 보지 않고 싶을 때 스스로 메뉴를 결정하기보다는 럼즈펠드같은 남자에게 맡기고 싶어한다”고 썼다.
영화 ‘가을의 전설’에서 긴 금빛머리를 휘날리며 말을 타고 달려오던 소년 같은 남자, 브래드 피트는 여성의 모성본능을 자극하며 남녀의 성적 구별이 모호해진 1990년대 사회의 전형적인 섹스 심벌이었다. 그러나 이제 미국 여성들은 자기가 돌봐줘야 할 남자보다 자기를 돌봐줄 남자를 원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젊은 시절의 럼즈펠드를 상상하면서 영화배우 톰 크루즈의 이미지를 연상하는 것 같다. 럼즈펠드와 크루즈는 둘 다 고등학교 시절 인기있는 레슬링 선수였다. 럼즈펠드는 당시 부상만 하지 않았다면 올림픽에 출전할 수도 있을 정도로 실력있는 선수였다.
최근 NBC TV ‘미트 더 프레스(Meet the Press)’의 진행자 팀 러서트는 럼즈펠드를 불러놓고 그가 프린스턴대 정치학과에 다니던 시절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한 손으로 팔굽혀펴기를 했던 사실에 대해 묻기도 했다. 럼즈펠드는 “그때는 돈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또 톰 크루즈는 영화 ‘탑건’에서 해군 조종사 역할을 했고 럼즈펠드는 실제 해군 조종사로 3년간 복무했다. 30세에 일리노이주 하원의원으로 당선되고 43세에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 미국 역사상 최연소 국방장관이 된 경력도 야심만만한 현실주의자인 영화 속의 톰 크루즈와 비슷하다.
럼즈펠드는 1977년 정부를 떠난 뒤 민간기업인 ABB그룹 등의 중역을 맡으면서 국방장관으로 되돌아올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대통령을 노릴 나이도 지났다. 국방장관으로 돌아온 것은 단지 ‘젊은’ 부시 대통령을 돕기 위해서다.
감수성으로 말하자면 럼즈펠드는 ‘그 따위 것은 잊어버려라’는 쪽이다. 클린턴은 감수성이 예민한 남자들이 인기를 얻던 1990년대의 대통령이었다. 클린턴은 TV에 나와 색소폰을 연주할 정도의 음악적 감각과 청중의 분위기를 정확히 읽고 감정을 이입하는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악수’가 아니라 ‘포옹’으로 감정을 전달하기 좋아했고 만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특별한 배려를 받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감성적인 클린턴이 미국의 적과 관련해 고통을 감수한 쪽이었다면 럼즈펠드는 고통을 주는 쪽이다. 럼즈펠드는 서부영화에서 주로 악한 총잡이역을 맡았던 립 반 클립처럼 상대를 가혹하게 다룬다. 이런 그를 뉴욕타임스의 인기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는 ‘립 반 러미’(럼즈펠드의 애칭)라고 불렀다.
다우드씨는 최근 국내에도 개봉된 영화 ‘오션스 일레븐’에 대해 언급하면서 “요즘 럼즈펠드와 같은 진짜 마초들을 TV에서 보는데 누가 조지 클루니나 브래드 피트 등과 같이 흉내만 내는 가짜 마초들의 영화를 보러 가겠느냐”며 “부시 대통령 아래 되돌아온 포드 시대의 베테랑들은 처음에는 냉전 분위기를 되살리려는 시대착오적인 마초 공룡(macho dinosaur)처럼 보였으나 9·11 테러 이후 믿고 의지할 만한 상대로 떠올랐다”고 분석했다.
럼즈펠드는 블루진 혁명이 있기 전에 넥타이를 매고 폼을 잡던 프랭크 시나트라 세대에 속한다. 럼즈펠드가 무테안경을 쓰고 TV에 나와 안경 너머로 눈짓을 하면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노’라고 말할 때 미국인들은 신뢰감을 느낀다. 그런 모습은 손가락을 흔들어 보이며 자신있게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관계를 부인하다 망신을 당한 ‘약삭 빠른’ 블루진 세대의 클린턴과는 다른 것이다.
럼즈펠드는 CNN ‘래리 킹 라이브’에 출연했을 때 예의 섹스 심벌 얘기가 나오자 자신의 나이를 거론하면서 “미국은퇴자협회(AARP) 회원들에게는 혹시 그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 잡지 피플이 매년 선정하는 가장 섹시한 남자들을 보면 꼭 나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숀 코너리는 89년 60세의 나이로, 해리슨 포드는 98년 56세의 나이로 가장 섹시한 남자에 뽑혔고 로버트 레드퍼드는 6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가장 섹시한 남자의 후보로 오르내린다.
럼즈펠드는 50년 가까이 ‘한 여자의 남자(one-woman man)’로 살아왔다. 이런 점이 ‘함께 자고 싶은’ 섹스 심벌로서 그의 매력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수많은 여자들과의 섹스 스캔들로 문제가 된 클린턴에게 신물이 난 미국인들에게 그가 신선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작년 피플지는 가장 섹시한 남자로 007영화 제임스 본드 역의 피어스 브로스넌을 뽑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인생에서 늘 ‘한 여자의 남자’로 살아왔다는 점이었다.
럼즈펠드가 처음 국방장관이 됐을 때는 베트남 전쟁이 막 끝난 뒤였다. 평화시의 젊은 럼즈펠드는 매력적인 외모와 매너에도 불구하고 눈길을 끌지 못했다. 전쟁시의 늙은 럼즈펠드가 오히려 섹스심벌이 된 것은 그가 쥐고 있는 막강한 힘을 행사할 흔치 않은 기회를 얻은 것이 진짜 이유인지도 모른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이렇게 말했지 않은가. “권력은 최고의 최음제”라고….
송평인 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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