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 (26)

  • 입력 1998년 5월 27일 20시 14분


아까 마신 술 때문에 머리가 얼얼했지만 나는 탐험을 시작하는 것처럼 비장하고 흥분된 기분이었다. 미자언니는 술병을 반쯤 비우고는 마당의 수도가로 나가서 거기에 다시 물을 조금 채운 다음 병을 흔들었다. 빨간 액체가 흔들릴 때마다 미자언니의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도 흔들렸다. 미자언니는 술병을 부엌의 제자리에 갖다두고 돌아오더니 대청에 길고 나른한 자세로 누웠다. 나도 미자언니 곁에 누웠다.

대청 마루의 시원한 촉감이 좋았다.

―너 봉순이가 밤에 어디 다니는 줄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막연하게 세탁소 총각하고 같이 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미자언니의 말소리에는 그런 사실 이상의 비밀스럽고 축축한 의미가 배어 있었다.

―남자랑 여자랑 둘이만 만나면 말이지…. 넌 아직 잘 모르겠지만두, 그런게 있단다….

미자언니는 누운 채로 나를 돌아보더니 얼굴 근육을 탁 풀어내며 킁킁 웃었다. 그녀의 입으로 달뜬 냄새가 풍겨왔다.

―무슨 이야긴지 너는 모르겠지…. 그래, 그렇고 그런거지…. 하지만 한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단다. 아싸, 그 짜릿한 맛….

물론 나는 알 수 없었다. 아니 궁금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막연히 여자와 남자가, 아니 그냥 여자와 남자가 아니라 어머니가 된 사람하고 아버지가 된 사람이 한방에서 잠을 자면 마치 나비가 수술에서 암술로 날아다니며 꽃가루를 묻혀주듯이 아기씨가 엄마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러나 갑자기 오줌이 마렵기 시작했다. 둥근 붓의 선이 느물거리는, 여자의 나체와 남자의 나체가 얽혀 있던 주간지 속의 그림이 떠올랐다. 책을 보았을 당시에는 이해하는 대신 그저 읽어내렸던 그 글귀들이 바알갛게 상기된 얼굴로 몸을 비비꼬며 일어서는 것 같았다.

미자언니는 한손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눈을 감은 채로, 지금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아직은 어린 나라는 사실 같은 건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나도 그런 표정을 지어보았다. 그러자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세상이, 저 화단의 꽃들처럼 식물성인 것에서 갑자기 살아 움직이고 꿈틀꿈틀거리는 동물성으로 변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언가, 내 속에서 오래도록 나른하던 것이 문득 솟구치고, 그리하여 이윽고는 점점 더 부풀어오르며, 짜릿짜릿한 신경의 말단을 톡, 톡 건드려가며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미자언니는 여전히 반쯤은 눈을 감은 채 내 얼굴을 자신의 얼굴에 바싹 당겨 끌어안은 후, 몸을 이리저리 꼬았다.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녀에게 내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아아, 놀랍게도 나는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면, 혹은 그녀가 손길을 내 몸에 가져다 대기라도 하면 나는 이 심심하고 따분한 세계에서 주간지에서 본 그 세계속으로 마치 작은 터널을 빠져나가듯이 쑤웃, 하고 빠져나가, 전혀 새로운 나로 변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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