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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곳에선 대항해 시대의 해적 같은 무법자들이 판을 치게 마련이다. 최근 빈발하는 랜섬웨어(ransom·몸값+software·소프트웨어) 해킹이 딱 그 꼴이다. 해커에게 데이터를 인질로 잡히면 ‘몸값’을 내야 시스템을 복구할 수 있는데, 망망대해에서 해적을 만난 상선처럼 당장은 공권력에 신고해도 별 도움이 안 된다. 당하지 않으려면 자위력을 갖춰야 하는데, 작은 배들은 인식도 부족하고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투자를 잘 하려 하지 않는다. 해적에게 통행세를 뜯기던 시절이 다시 오고 있다. 최근 국내 대형 온라인서점 예스24가 랜섬웨어 해킹을 당했다. 도서 구매와 공연 티켓 예매, 디지털 콘텐츠 다운로드 등이 중단돼 매출 피해가 이달 9일부터 약 5일 동안 100억 원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시스템이 거의 정상화됐다지만 해킹으로 개인정보 유출이나 저작권 침해가 있었는지는 향후 조사 결과를 지켜봐야 안다. 가능성은 작지만 만에 하나 원전 운용 시스템이나 ‘…페이’가 해킹을 당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예스24는 사태 초기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에 신고는 했지만 홈페이지엔 ‘시스템 장애’라며 해킹 사실을 밝히지 않다가 뒤늦게 인정했다. 16일엔 “랜섬웨어 공격이라는 특수성상 해커가 외부 반응을 감시하거나 추가 위협을 가할 수 있어서 정보 공개 수위와 시점을 신중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며 양해를 구했다. 예스24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회사여서 해킹 사실을 숨기기 어려웠을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최근 제조업체를 겨냥한 랜섬웨어 공격이 부지기수지만 드러나는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한다. 정부에 신고해 봐야 시스템을 복구해 주는 것도 아니니, 그냥 쉬쉬하며 해커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국제 랜섬웨어 대응 이니셔티브(CRI)의 일원인 한국은 CRI의 기조에 따라 피해 기업에 ‘대가를 지불하지 말라’는 권고를 하고 있다. 먼저 개선해야 할 것은 걸음마 수준인 다수 기업의 사이버 보안 의식이다. 2023년 알라딘 전자책 유출 사건을 계기로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보안 실태조사를 했지만 예스24는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보안 업데이트를 중단한 구닥다리 윈도 운용체제(OS)를 일부 서버 시스템에 쓰는 등 보안이 전반적으로 허술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요즘 해킹은 점점 첩보영화를 닮아가는 것 같다. 고도의 기술을 가진 해커가 아니라도 인공지능(AI)으로 쓸 만한 랜섬웨어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최근 불거진 SK텔레콤 해킹은 침투 후 잠복 기간이나 정보 유출 규모로 미뤄 볼 때 특정국과 연관된 해커의 소행이 아니냐는 의심마저 나오고 있다. 미국이 CRI를 주도하자 중국과 러시아는 ‘사이버 안보 협력 협정’을 체결하는 등 진영에 따라 해킹 대응도 갈라지고 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토끼발’(세계를 위협하는 악성 코드)이 마냥 공상 같지가 않다. 대항해 시대의 해적은 각국이 해군력을 강화하고 단속하면서 비로소 사라졌다. 비트코인이 있기에 ‘보물섬’을 따로 마련할 필요도 없는 사이버 해적은 잡기가 훨씬 까다로울 것이다. 당장은 기업들이 경각심을 갖고 보안 백업 시스템을 마련하는 한편, 정부와 정보를 공유하고 협력해 대처하는 수밖에 없다.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알다가도 모르겠다’ 싶은 게 인간이다. 변화무쌍한 환경 아래 인간이 어떻게 생존하고 번성했는지에 주목하는 진화인류학이라면 인간성의 본질에 대한 혜안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최근 진화인류학 역사를 담은 연구서 ‘행동 다양성’(에이도스)과 대중서 ‘진화인류학 강의’(해냄)를 발간한 박한선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를 9일 서울 관악구 연구실에서 만났다. 정신과 전문의이기도 한 그는 “과거 환경에 적응하며 얻은 인간의 특성이 현대사회와는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최근 정치적 양극화도 진화인류학으로 설명할 수 있나. “개인은 분자와 같지만 집단이 되면 예상치 못했던 창발(創發) 현상이 나타난다. 개개인은 정치적으로 극단적이지 않더라도, 약간의 경향성이 모이면 집단 전체를 굉장히 극화(極化)시킬 수 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토머스 셸링은, 타 인종에게 비교적 온건한 이들로 이뤄진 마을도, 집단 수준에선 극단적 인종 분리 현상이 일어난다는 창발적 효과를 바둑판 모형으로 입증했다. 정치적 양극화도 비슷한 현상이다. ” ―자신의 믿음과 부합하는 정보만 받아들이는 ‘확증편향’은…. “진화적으로 확증편향이 유리한 경우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번식이다. 사랑에 빠지면 상사병에도 걸리고, 콩깍지가 벗겨지기 전까진 그 사람이 최고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나. 번식할 수 있는 기간이 제한된 가운데, 그런 확증편향 덕에 짝을 탐색하는 추가 비용을 차단하고 번식에 성공할 수 있다. 그게 없으면 인간은 짝을 못 찾는다.”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집단에 대한 충성이다. 결함이 있더라도 맹목적 충성심을 획득한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수십만 년 동안 생존 경쟁에서 유리했다. 맹목성이 합리성을 이기면서, 집단에 무조건 충성하려는 ‘심리적 모듈’을 획득한 것이다. 그래서 특정 집단에 속한다고 인식하는 순간 그 집단이 옳다고 믿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사회와는 잘 안 맞는 것 같다. “친족과 마을에 충성하는 건 유전자나 사회생태학적 조건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을 뭉치게 하는 것이라 진화적으로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과거엔 효과가 있었던 심리적 모듈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거대 현대사회에선 오작동한다. 충성심이 실체가 불분명한 집단에까지 과도하게 투사되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이를 악용한다. 올바른 지도자라면 이를 제어하고 교정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다른 집단에 대한 혐오는 어떻게 봐야 하나. “정착 생활을 하면서 가축, 벌레, 분변 등과 가까이 살게 됐고 감염병 위험이 높아졌다. 그래서 사체나 더러운 것에 혐오감을 느끼고 거리를 두려는 경향이 인간에게서 특히 두드러지게 됐다. 이를 ‘행동 면역’이라고 한다. 전염병을 가져올 수 있는 외부인 역시 꺼리는 게 안전했다. 그런 반응이 언어나 피부색,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을 혐오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미생물의 존재를 모르던 시절 감염의 위험을 줄여주던 반응이, 감염병과 상관없는 무해한 대상에게도 나타나는 것이다.” ―박 교수는 구체적으로 어떤 연구를 하나. “인간의 행동이 다양하게 분화한 까닭을 시뮬레이션으로 연구한다. 예를 들어 사람은 사춘기에 들어서면 임신이 가능은 하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잘되진 않는다. 이를 ‘청소년 준가임성’이라고 하는데, 진화적으로 이 기간이 왜 유지되는지는 설명이 부족하다. 난 최적의 짝을 탐색하기 위함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있다. (최근의 저출생은?) 시간을 들여 좋은 짝의 자질을 갖추려는 행동과 서둘러 좋은 짝을 선점하려는 행동 사이에서 개개인이 조금만 전자로 기울어지면 집단은 확 만혼(晩婚)으로 가게 된다.” ―진화적으로 협력의 조건은 무엇인가. “재회 가능성과 생태학적 다양성, 충분히 긴 수명 등이다. 친족이 아닌데도 협력하는 동물로 인간 외에 흡혈박쥐가 있다. 이 박쥐는 동굴에 모여 살고, 초음파로 서로를 구별한다. 몸에 에너지를 잘 저장하지 못하기에 흡혈에 성공한 박쥐와 사흘 굶은 박쥐는 먹이에 대한 절박함이 다르다. 교환의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먹은 박쥐가 토해서 굶은 박쥐를 먹인다. 인간도 그런 환경에서 오래 진화해 왔다. 하지만 요즘처럼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양극화돼 집단 사이에 서로 만날 일이 줄어들면 그만큼 협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가까운 미래, 미국에선 미국의 것을 보존하고 공공의 안정을 꾀한다는 ‘미국전통문화보존법(PACT)’이 시행되고 있다. 미국에 이롭지 않은 생각과 이념뿐 아니라 ‘미국적이지 않은’ 얼굴을 가진 사람도 탄압을 받게 된다. 학교에선 이런 문제가 나온다. “만일 한국산 자동차가 1만5000달러지만 삼 년밖에 사용할 수 없고, 미국산 자동차는 2만 달러지만 십 년간 사용할 수 있다면 오십 년간 미국산 자동차만 구매해서 절약할 수 있는 돈은 얼마인가?” 어느 날 중국계 시인 마거릿이 반역 혐의에 연루된다. 시위대가 그의 시구를 인용해 PACT 반대 운동을 벌였기 때문. 가족의 삶은 무너지고, 마거릿은 아들 버드가 아홉 살 되던 해 돌연 자취를 감춘다. 3년이 흐른 뒤 버드는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봉투 속엔 다양한 모습의 크고 작은 고양이 그림뿐 아무 글자도, 내용도 없다. 버드는 편지를 실마리로 어머니의 행방을 찾아 나선다. 차이가 혐오로 변하는 디스토피아를 그린 소설이다. ‘잉(Ng)’이라는 성에서 짐작되듯 아시아계인 작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전면전을 벌이고 있는 하버드대 영문학과 출신이기도 하다. ‘미국 우선주의’가 본격화하는 가운데 미국 사회 곳곳에 스며든 폭력과 고립을 직시하게 만든다. 작가는 이 소설을 두고 “내가 보는 세계를 담은 진실한 기록”이라고 했다. 읽다 보면 내부의 혼란을 가라앉히기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드는 건 꼭 남의 일만도 아니지 싶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중견 사회학자인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54)가 ‘오픈 엑시트’(문학과 지성사)를 최근 발간했다. 후진적 진영 갈등 탓에 논의가 제대로 안 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구조 개혁 과제를 다룬 책이다. 이 교수는 앞서 ‘불평등의 세대’(2019년)에서 86세대의 독점 문제를 제기했고 ‘쌀, 재난, 국가’(2021년)를 통해 불평등의 구조적 기원을 동아시아 벼농사 문화에서 찾았다. ‘불평등의 미래’를 다룬 이번 책은 ‘불평등 3부작’의 완결편 격이다. 22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 연구실에서 만난 이 교수는 “‘오징어 게임’으로 살아남은 승자가 과실을 독식하는 한국 사회를, 패자로 끝나기 전에 ‘엑시트(exit·탈출)’해 다른 게임을 시작할 수 있는 옵션이 열린 사회로 전환하자는 이야기”라고 책을 소개했다. 이번 책에서 이 교수는 ‘기업’에 초점을 맞췄다. 그에 따르면 지난날 우리의 벼농사 문화는 표준화와 협업에 바탕을 둔 생산 시스템과 맞아떨어지면서 ‘한강의 기적’을 일궜다. 기업은 고용 안정과 연공제를 통해 노하우와 기술을 내부에 축적하고 생산성을 높였다. 연공 순으로 위계의 사다리가 만들어졌고, 평가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명문대 입학했으면 능력 있다고 평생 우려먹는 시스템’이 됐다. 문제는 급격한 기술 발전 등으로 그런 시스템이 이젠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정규직 노동조합이 힘을 발휘하는 최상층 노동시장을 제외하면 이미 ‘평생직장’은 옛말이 됐다. 회사에서 밀려난 이들이 너도나도 자영업을 택했으나 내수 불황으로 폐업하는 자영업자가 한 해 100만 명에 육박하는 실정이다. 이 교수는 “과거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면 곧 ‘해고’를 뜻했지만, 이젠 노동의 입장에서도 유연화가 필요하다”며 “개인들이 언제라도 적당한 다른 일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길을 터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은 분단으로 사실상 섬이나 마찬가지이고, 내수 시장 규모도 작다. 이 교수는 ‘쌀 문화’를 공유하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로 ‘엑시트 옵션’을 넓혀야 한다고 제안했다. 같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가진 일본과 대만까지로 노동시장을 확대하자는 것. 유럽연합(EU)이 얻은 것과 같은 ‘규모의 경제’를 도모하자는 취지다. 이 교수는 “5000만 명이 아닌 1억90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노동시장에선 개인의 대안이 훨씬 많아진다”며 “국가는 연금의 상호 호환을 비롯한 제도적 뒷받침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랬다가 되레 한국의 인재를 잃기만 하는 건 아닐까. 이 교수는 “한국은 동아시아에서도 임금이 최고 수준인 만큼 인재가 유출되는 만큼 유입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 책에서 이 교수는 인공지능(AI)과 저출생·고령화, 이민의 물결이 어떤 불평등 문제를 만들지도 다뤘다. AI 기반 협업 시스템은 기업의 한국적 위계 구조에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봤다. 조직과 자원을 보유한 중장년층보다 청년층이 AI와 관련해 더 많은 지식을 갖기에 헤게모니 다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 이 교수는 또 “AI 기반 지식혁명의 수혜가 기존의 자산계층에 집중될 우려가 있다”며 “국가는 관련 교육을 초등학교 때부터 교육에 광범위하게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출생 문제를 벼농사 체제의 협력 문화와 연결해 분석한 점도 눈에 띈다. 일을 대신 떠맡게 되는 다른 팀원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탓에 출산휴가를 제대로 못 쓰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교수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싱글과 딩크족을 포함해 누구나 출산휴가나 육아휴직과 같은 기간 ‘안식 휴가’를 쓸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비용은 사회보험을 도입해 충당하자는 것이다. 이 교수는 “저소득층과 프레카리아트(저임금·저숙련 노동계층)가 사실상 아이 낳기를 포기하고 있다. 우생학을 사회적으로 실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결혼과 출산이 상층과 정규직의 전유물이 된다면 우리 공동체를 지정학적 위협에서 지킬 힘마저 잃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민과 관련해선 “이미 농촌과 일부 제조업은 이주민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단계에 진입했다”며 “그들에게 단계적으로 영주권과 시민권을 부여해 그 에너지를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성문을 열고 넘나들며 우후죽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사회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 사회에선 정규직과 비정규직, 파트타임 같은 지위가 개인의 조건과 정체성을 규정하지 않을 거예요. 다양한 엑시트 옵션이 있기 때문이지요. 청년들은 다양하고 창의적인 시도를 할 수 있을 겁니다.”(이 교수)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716년, 경빈 박씨가 사사(賜死)된 해다. 궁궐이 난리가 났다. 22세의 연잉군(영조)이 갑자기 궁녀를 협박했다. ‘너희들이 감히 우리 엄마를!’ 왕자가 궁궐에 불을 지르려다 걸렸다. 승정원일기 숙종 42년 6월 6일 기사엔 ‘대놓고 슬퍼하다가 미쳐 날뛰며 불을 지르려 했다’ ‘潛邸之時 因悼母之故 狂奔欲縱火’라고 나온다. 왕자는 몇 년 뒤 왕위에 올랐다.”‘한국사 실화(實話)’를 요즘 감성으로 풀어낸다는 한 유튜브 채널에 최근 올라온 쇼츠 동영상 줄거리다. 흥미를 자극하지만 이 이야기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역사와 들어맞는 건 연잉군이 1716년에 22세였다는 것뿐이다. 나머지는 ‘몽땅’ 틀렸다. 영조의 어머니는 숙빈 최씨다. ‘경빈 박씨’로는 각각 중종과 사도세자의 후궁이 있을 뿐이다. 승정원일기 해당일에도 저런 기사는 없다. 역사라기보다는 대중소설의 한 장르인 ‘대체역사’라고 불러야 마땅한 콘텐츠다. 이 유튜브 채널의 나머지 콘텐츠는 비록 흥미 위주의 야사가 섞이긴 했으나 역사적 사실을 전하는 데 충실한 편이었다. 이런 ‘새빨간 거짓말’이 도대체 왜 들어간 것일까. 최근 제작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온라인 콘텐츠를 인공지능(AI)으로 기획, 제작, 편집하는 사례가 급증한 것과 관계된 게 아닌가 싶다. AI 제작의 유행과 더불어 콘텐츠의 사실 관계 오류도 눈에 띄게 늘어난 것 같다. AI가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환각 현상)’ 때문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할루시네이션 문제를 해결한 AI는 아직 없다. 이 문제는 앞서 등장한 검색 기술이나 소셜미디어가 인류에 가져온 부작용, 즉 정보 선택의 편향 문제와는 또 차원이 다르다. 생성한 정보 자체에 오류 소지가 상존하는 탓이다. AI는 좋은 친구지만, 때론 거짓말을 청산유수처럼 하는 친구다. 향후 사람의 생명이 오가는 문제 등에까지 관련 권한을 상당 부분 AI에게 넘기게 된다고 치면 아찔해진다. 물론 사람도 틀리지만 오류에 책임을 진다. 그리고 고친다. AI가 틀리면 누가 책임을 지나? 지금의 AI는 결과물에서뿐 아니라 개발 단계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알려진 대로 생성형 AI는 고도의 모사(模寫) 및 편집 기계다. 원본이 없으면 개발 자체가 불가능하다. 오픈AI의 챗GPT를 포함해 대부분의 AI는 학습에 언론사 기사 등 방대한 자료를 ‘무단 학습’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개발사 측은 ‘데이터’라는 말을 쓰며 마치 아무나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처럼 포장하지만 AI가 학습한 건 엄연히 다른 저작권자의 ‘지식재산(IP)’이다. 미국 뉴욕타임스가 오픈AI에 저작권 침해 소송을 건 것도 그래서다.“AI가 발전해도 여전히 인간의 창작을 촉진해야 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이 분야 전문가인 최승재 세종대 법학과 교수는 최근 한 세미나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AI가 만든 결과물을 AI가 학습하는 과정을 반복하면 AI 모델은 결국 붕괴한다는 연구가 있다. IP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없다면 기존의 콘텐츠 생산 기반은 더욱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폐허 위에 쌓아 올린 AI의 바벨탑을 바라는 자, 누구인가. 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만약 오늘날 한 도시에서 ‘명물(名物)’을 선정한다고 하면 상당한 논란이 벌어질 수도 있다. 자신의 입장이나 보는 기준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지배자인 일본인과 피지배자인 조선인 사이에선 경성의 ‘미관(美觀)’과 ‘명물’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생각이 충돌했다. 서유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의 논문 ‘경성의 미관 형성과 조선인의 대안적 이미지’(2023년 학술지 ‘서울학연구’ 가을호)에 따르면 일본인이 상업적 목적으로 만든 ‘경성 사진엽서’와 동아일보의 사진 연재물을 묶은 ‘경성백승(京城百勝)’은 이러한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31일 동아대 역사인문이미지연구소가 개최하는 학술대회 ‘팸플릿을 펼치다, 경성을 만나다’에서 서 연구원은 해당 논문을 바탕으로 식민통치에 비판적 시선을 담은 ‘경성백승’ 등의 내용을 소개한다. ● 일제, 서양건축 강조해 지배 정당화 일제는 경성을 근대적 도시로 정비하면서 조선은행, 경성역, 조선총독부 청사와 같은 서양식 건축물을 잇달아 지었다. 으리으리한 건물들을 내세워 식민통치가 조선의 도시를 문명화하고 있다며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했다. 경성의 관광산업과 식민 지배의 홍보를 위해 발행된 사진엽서도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경성 히노데(日之出) 상점은 이런 건물들을 담아 ‘경성명승(京城名勝)’이란 이름으로 엽서를 발행했다. 엽서에 실린 사진은 장대한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구도다. 서 연구원은 “건물의 전면과 측면을 3∼4 대 1의 비율로 잡아 시각적 쾌감을 주고 형태적 요소에 집중하게 만들었다”며 “이런 이미지를 통치의 성취물로 연결시켰다”고 설명했다. 권력을 상실하고 관광지로 전락한 경복궁 등 조선 궁궐은 일제 통치기구와 대조되며 ‘경성 미관’의 또 다른 축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조선인이 경성을 두고 이런 사진엽서를 발간한 사례는 현재까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서 연구원은 “식민통치가 만든 경성의 미관을 조선인이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경성백승, 조선 역사 담긴 장소성 강조 반면 동아일보사가 1929년 발간한 책 ‘경성백승’은 식민통치에 비판적 시선을 가지고 북촌 중심으로 장소성을 재발견했다. 이 책은 1924년 6∼8월 50일간 동아일보 지면에 연재한 사진 기사 ‘내 동리(동네) 명물’ 시리즈를 묶은 것이다. 조선인이 주로 거주하던 경성 100곳을 글과 함께 소개한 시리즈다. 경성백승은 장소의 내력과 역사에 주목한 게 특징이다. 예를 들어, ‘공평동 재판소’는 “105인 사건”과 “조선 산하를 진동하던 OO운동(3·1운동)”, “흰 수염을 뻗치고 강개하게 재판장을 논박하든 강우규 (열사)”가 재판을 받은 곳이라고 소개했다. ‘수송동 기마대’는 좌우로 담장이 잘린 기마대 입구 사진을 보여주며 “민중의 진정한 부르짖음까지 이 기마 순사대의 말굽으로 짓밟았다”고 고발했다. ‘서린동 구치감’ ‘현저동 형무소’(서대문형무소) ‘통의동 동척 사택’ 등도 일제에 대한 비판적 설명과 함께 소개했다. ‘안국동 감고당’ ‘숭사동 월사구기’ ‘권농동 경판각’ 등 역사 속 장소를 소개하며 조선의 통치를 회상하게 만들기도 했다.경성백승에 담긴 사진은 프레임이 가로보다 세로가 길어 시원한 공간감은 확보되지 않았다. 서 연구원은 “경성 사진엽서가 선호했던 장대한 건축물의 미학을 고의적으로 훼손하는 ‘반(反)미학적 구성’을 선택했던 것”이라고 했다.꼭 특별한 장소만 소개한 것도 아니다. 체부동 ‘돌함집’은 “어느 공주댁”으로 공주가 죽을 때 보물을 돌함에 넣어 대청 아래 묻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고 소개했다. 집주인이 바뀔 때마다 대청 밑을 파봤지만 돌함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서 연구원은 “경성백승은 일본인의 경성 미관을 비판하면서 대안적 이미지를 제시했다”며 “통치의 폭력과 불평등을 가시화해 비판하고, 급변하는 현재에 묻혀 사라져 가는 조선인의 역사를 회복하려 했다”고 평가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세계 문화예술계 주요 인사들이 참여하는 제10차 문화예술세계총회(World Summit on Arts and Culture)가 27∼30일 4일간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열린다. 이 총회가 아시아에서 열리는 건 처음이다. 이번 총회는 ‘문화예술의 미래 구상’을 주제로 인공지능(AI)과 디지털 기술 확산, 기후위기, 지역 공동체 회복력 등 복합 위기 시대 문화예술의 대응 전략을 논의할 예정이다. 세계 62개국에서 문화예술 전문가 400여 명이 참석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와 ‘예술위원회 및 문화기관 국제 연합(IFACCA)’이 공동 주최한다. 아르코는 “문화예술세계총회 등을 포함한 ‘아르코국제주간’ 행사를 24∼30일 개최한다”고 14일 밝혔다. 이 주간엔 글로벌 청년예술가와 기술전문가의 융복합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에이프 캠프(APE CAMP)’도 열린다. 24일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는 관련 국제 콘퍼런스가 열리고, 25∼27일 서울 강서구 코엑스 마곡에서 본캠프가 개최된다. 22개국 청년예술가와 기술전문가 100명이 참여할 예정이다. 아르코는 시각예술 분야의 창작과 교류를 지원하기 위한 공간인 ‘아르코 예술창작실’도 이달 내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이 공간은 스튜디오와 야외공연장, 아카데미홀 등을 갖추고 있으며, 국내외 입주 작가를 대상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할 예정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정명훈 지휘자(72·사진)가 오페라계에서 ‘꿈의 무대’로 꼽히는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차기 음악감독에 선임됐다. 아시아인이 이 극장의 음악감독에 선임되는 건 247년 역사상 처음이고, 이탈리아인이 아닌 음악감독으론 역대 두 번째다. 라 스칼라 극장은 12일 성명을 내고 정 지휘자를 2026년 말 임기를 마치는 리카르도 샤이 현 음악감독의 후임으로 선임한다고 밝혔다. 정 지휘자는 포르투나토 오르톰비나 예술감독의 임기가 끝나는 2030년 2월까지 음악감독으로 일하게 된다. 1778년 개관한 라 스칼라 극장은 ‘세계 3대 오페라극장’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클라우디오 아바도, 다니엘 바렌보임 등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지휘자들이 음악감독을 맡아 왔다. 베르디의 ‘나부코’(1842년), 푸치니의 ‘나비 부인’(1904년)과 ‘투란도트’(1926년) 등 기념비적인 오페라들이 이 극장에서 초연됐다. 라 스칼라 극장은 정 지휘자에 대해 “친밀하고도 생산적인” 관계를 맺어 왔다며 “밀라노의 오페라 관객들에게도 가장 사랑받는 음악가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정 지휘자는 이 극장에서 음악감독이 아닌 지휘자 가운데 가장 많은 141회의 음악회를 이끌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정명훈 지휘자(72)가 오페라계에서 ‘꿈의 무대’로 꼽히는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에 선임됐다. 아시아인이 이 극장의 음악감독에 선임되는 건 247년 역사상 처음이고, 이탈리아인이 아닌 음악감독으론 역대 두 번째다.라 스칼라 극장은 12일 성명을 내고 정 지휘자를 2026년 말 임기를 마치는 리카르도 샤이 현 음악감독의 후임으로 선임한다고 밝혔다. 정 지휘자는 포르투나토 오르톰비나 예술감독의 임기가 끝나는 2030년 2월까지 음악감독으로 일하게 된다다.1778년 개관한 라 스칼라 극장은 ‘세계 3대 오페라극장’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클라우디오 아바도, 다니엘 바렌보임 등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지휘자들이 음악감독을 맡아 왔다. 베르디의 ‘나부코’(1842년), 푸치니의 ‘나비 부인’(1904년)과 ‘투란도트’(1926년) 등 기념비적인 오페라들이 이 극장에서 초연됐다.라 스칼라 극장은 정 지휘자에 대해 “친밀하고도 생산적인” 관계를 맺어왔다며 “밀라노의 오페라 관객들에게도 가장 사랑 받는 음악가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정 지휘자는 이 극장에서 음악감독이 아닌 지휘자 가운데 가장 많은 141회의 공연을 이끌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재단법인 설악·만해사상실천선양회(이사장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는 제2회 무산문화대상 수상자로 권여선 소설가(60·문학 부문)와 양성원 첼리스트(58·예술 부문), 이태석 재단(사회문화 부문)을 각각 선정했다고 밝혔다. 상금은 부문별로 1억 원씩이다.설악·만해사상실천선양회는 권 소설가에 대해 “고통스러운 기억을 응시하면서도 연민과 공감의 끈을 놓지 않는 문학적 성취를 높이 평가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양 첼리스트는 “뛰어난 음악적 깊이를 선보이고 한국 문화예술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고, 이태석 재단은 “다양한 봉사 활동과 지원사업으로 상생의 정신과 나눔의 고결한 의미를 전파했다”고 설명했다. 시상식은 30일 오후 5시 그랜드 하얏트 서울 그랜드볼룸에서 열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조선의 외부에서 역관과 서얼 같은 중간계층은 양반 사대부보다 더 주도적으로 지식과 정보를 생성하고 전파하는 데 앞장섰어요. 하지만 사대부가 그 지식을 외면하거나 자기중심적 해석에 가두면서 제대로 유통되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조선 후기 지식 정보의 생성과 유통을 문화사회학적으로 조명한 책 ‘지식과 조선’(성균관대 출판부)을 최근 펴낸 진재교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64·전 동아시아학술원장)는 지난달 30일 연구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이번 책에서 진 교수는 조선 후기 지식의 주요 유입 경로인 사행(使行)에 주목했다. 실록엔 1631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1581∼1642)이 돌아와 천리경(망원경)과 서포(西砲), 자명종 등 서구의 물건을 대거 바쳤다고 나온다. 그는 명에 와 있던 로드리게스 신부(1559∼1663)를 만나 신식 화포 같은 물건을 얻었다. 하지만 진 교수에 따르면 신부와의 만남을 주선했을 뿐 아니라 그와 더욱 깊이 교류했던 건 역관 이영후였다. 이영후가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는 각종 서구의 지식을 접하며 ‘개명의 경지’를 체험했고, 천문학과 역법의 전문 지식에 관해 질문할 정도로 이해가 깊었다. 진 교수는 “조선 지식인이 서양인과 최초로 지적 대화를 했던 것”이라며 “사행의 실무자나 수동적 존재로만 기록된 중간계층이 사실 사대부보다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문물을 직접 체험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사대부들은 새로운 지식을 기존의 가치 질서 안에 가뒀을 뿐 확산시키진 못했다. 통신사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176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역관 이언진(1740∼1766)은 정사였던 조엄(1719∼1777)에게 마테오 리치 신부의 천주교 포교와 서구 문물 도입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하지만 조엄은 이를 두고 “이적(夷狄)이 중화(中華)를 어지럽히는 조짐”이라고 평가했다. 진 교수는 “자신들만이 지식의 주체이며 생성자라고 생각한 조선의 사대부들은 ‘(신분이 낮은) 네가 알면 얼마나 아느냐’는 식으로 무시했다”며 “결국 조선은 지식과 정보가 차단됐고, 세계의 흐름에 무뎌지게 됐다”고 말했다. 이런 결과는 조선에서 공론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탓이 컸다. 조선의 공론장은 붕당과 사승(師承) 관계에 따라 종적으로 갈렸고, 지식과 정보의 횡적 확산이 차단돼 있었다. “같은 당파에 속한 여러 집안의 계보를 모은 당파보(黨派譜)를 만들고 특정 집안과는 통혼을 제한했을 뿐 아니라 벼슬을 해도 같이 숙직을 안 하려고 했을 정도니 알 만하죠.” 당파와 신분을 벗어난 시회(詩會)가 있긴 했지만 사상에 관해 토론이 이뤄졌던 서양의 살롱처럼 발전하진 못했다. 국가가 출판을 장악하고 지배에 필요한 것들만 허용하며 통제한 것도 패착이었다. 영조가 왕실에 문제 되는 내용이 담긴 책을 유통한 서쾌(책장수)를 잡아 죽이거나, 정조가 새로 유행하는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요즘의 소설과 비슷한 문체)를 배척하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을 한 것도 공론장의 확산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진 교수는 봤다. 진 교수는 “임진왜란 뒤 중국엔 청나라가 들어서고 일본엔 에도막부가 성립됐지만 조선은 망하지 않은 채 주자학을 정치 질서화했다”며 “종적 가치가 전면화되면서 횡적 소통이 억압되고 사회가 경직적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검열과 통제를 받지 않는 공론장이 제대로 작동해야 창발적 사유가 가능해지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가능성도 열립니다. 이는 조선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마찬가지겠지요.”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학자 100명이 ‘1945∼1960년 학문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저술과 인물’로 꼽은 건 특정 인물도 저서도 아닌 월간지 ‘사상계’였다(2005년 교수신문). 장준하 선생(1918∼1975)이 1953년 창간하고 운영한 이 잡지는 전후의 폐허 속에서 사상의 수원지 같은 역할을 했다. 1970년 정권에 의해 강제 폐간될 때까지 우리 민주주의와 지성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55년이 흘러 지난달, 사상계가 계간지로 재창간 1호를 발간하며 돌아왔다. 장준하의 장남 장호권 장준하기념사업회장이 발행인이다. 장 발행인은 “시대정신이 사상계를 부르고 있다”며 “문명과 정치를 비롯한 거대한 ‘전환의 시대’에 작은 물꼬를 트는 일을 하겠다”고 밝혔다. 작금의 한국이 처한 현실 탓인지 그의 포부가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권위주의 시대인 1960, 70년대 창간한 문예지와 1980년대 민주화 물결과 함께 만들어진 계간지들은 시대의 전환기에 한국 사회에 대안적 상상력을 제공했다. 경영난 등으로 그런 잡지 태반이 사라진 시점에, 사상계의 새삼스러운 복간은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기초부터 다시 점검할 때가 됐다는 신호처럼 여겨진다. 사상계 폐간의 결정적 계기는 당대 권력자들을 정면으로 비판한 김지하 시인(1941∼2022)의 걸작 ‘五賊(오적)’ 게재였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한국이 직면한 과제는 훨씬 난해하고 복합적으로 변했다. 그런데 이를 풀어야 할 정치판에선 여전히 서로를 두고 ‘적(賊)’이라고 손가락질할 뿐이다. 사상계 편집위원을 맡은 박명림 연세대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교수는 재창간호 권두에 게재한 글 ‘다중 문명전환과 한국의 다중정치’에서 “한국에서 정치는 본령을 잃은 채 진영과 인물 사이의 사법 전쟁으로 옮아갔다”면서 “탈진영적 국가 의제의 성취에 계속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후진적 정치가 반복되는 동안 젊은이들은 무한 경쟁에 내몰린 탓에 ‘공동체의 대(代)’가 끊겨 가고 있다. 최근 가장 화제가 된 유튜브 콘텐츠 중 하나는 독일 쿠어츠게자크트(Kurzgesagt) 채널의 ‘한국은 끝났다(South Korea is over)’였다. 쉽게 말해 ‘한국은 초저출산으로 이미 망(亡)테크를 탔고, 돌이키기가 극도로 어려운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내용이다. 경제활동 인구가 사상 최다인 지금은 체감하지 못하지만 앞으론 경제와 사회, 문화의 붕괴가 예정돼 있으며, 출산율이 당장 3배로 올라도 고난의 시대를 피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건 ‘민주화’ 이후 담론이 힘을 잃은 탓도 있다. 호랑이 등에서 내리고, 설국열차를 떠나려면 용기와 함께 상상력이 필요하다. 함의는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복간한 사상계는 일단은 ‘생태’와 ‘청년’ 등을 키워드로 잡은 듯하다. 경쟁 압박이 생태적 압력의 수준에 이른 가운데, 무한경쟁 아니면 공동체의 몰락이란 극단적 선택지 말고도 제3의 길이 있다는 걸 사상계가 알려주길 기대한다. 사상계 재창간호 표지엔 진화생물학자인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시 ‘개미’가 실렸다. “점/점/점/점이 움직인다//점/점점/점점점/점이 점점 많아진다//점들이 모여 메를 이룬다/메가 움직이니, 해도/따라 비춘다”. 개미들이 메(산)를 이루면 태양도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전국 각지의 비엔날레 행사와 아트페어 등을 연계하는 ‘대한민국 미술축제’가 지난해에 이어 올가을에도 개최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9일 ‘2025 대한민국 미술축제’ 출범식을 열고 “9월 한 달간 전국의 다양한 미술 행사와 협력해 입장권 특별 할인과 한국 차세대 작가 전시 개최를 지원하고, 국내외에 통합 홍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올해 축제는 지난해 참여한 키아프 서울과 프리즈 서울에 더해 청년작가 미술축제인 아시아프와 7개 비엔날레가 협력해 열린다. 서울미디어시티·청주공예·대구사진·광주디자인·전남국제수묵·세계서예전북 비엔날레 및 2025바다미술제 등이다. 6월 16일부터 주요 행사의 입장권을 정가 대비 30∼50%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한다. 아트페어 개최로 세계 미술인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9월 초에는 한국의 차세대 작가들을 중점적으로 소개한다. 아트선재센터 등 서울의 전시 공간뿐 아니라 지역에서도 비엔날레와 연계한 신진 작가 기획전시를 새롭게 개최한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인천·김포·김해공항 등 주요 국제공항도 관련 전시를 연다. 키아프 서울과 프리즈 서울, 예술경영지원센터는 국제 학술대회도 개최할 예정이다. 전문해설사를 동반하고 지역 미술관, 갤러리와 인근 관광명소를 함께 둘러보는 ‘전국 미술여행’도 마련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전국 각지의 비엔날레 행사와 아트페어 등을 연계하는 ‘대한민국 미술축제’가 지난해에 이어 올 가을에도 개최된다.문화체육관광부는 29일 ‘2025 대한민국 미술축제’ 출범식을 열고 “9월 한 달간 전국의 다양한 미술 행사와 협력해 입장권 특별할인과 한국 차세대 작가 전시 개최를 지원하고, 국내외에 통합 홍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올해 축제는 지난해 참여한 키아프 서울과 프리즈 서울에 더해 7개 비엔날레가 협력해 열린다. 청년작가 미술축제인 아시아프와 서울미디어시티·청주공예·대구사진·광주디자인·전남국제수묵·세계서예전북 비엔날레 및 2025바다미술제 등이다. 6월 16일부터 주요 행사의 입장권을 정가 대비 30~50%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한다.아트페어 개최로 세계 미술인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9월 초에는 한국의 차세대 작가들을 중점적으로 소개한다. 아트선재센터 등 서울의 전시 공간 뿐 아니라 지역에서도 비엔날레와 연계한 신진 작가 기획전시를 새롭게 개최한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인천·김포·김해공항 등 주요 국제공항도 관련 전시를 연다. 키아프 서울과 프리즈 서울, 예술경영지원센터는 국제 학술대회도 개최할 예정이다. 전문해설사를 동반하고 지역 미술관, 갤러리와 인근 관광명소를 함께 둘러보는 ‘전국 미술여행’도 마련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세기 말 이순신 장군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초상화 사진이 새로 공개됐다. 이순신 연구 전문가인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최근 발간한 ‘교감완역 난중일기’(여해) 개정판에서 새롭게 파악된 군복 차림의 이순신 장군 초상화 사진(사진)을 게재했다. 해당 초상화는 콧수염을 ‘八(팔)’자 모양으로 길게 기른 모습으로, 현대에 그린 영정과 비교해 무인다운 근엄한 느낌을 준다. 초상화의 오른쪽 아래엔 먹으로 ‘汝諧眞影(여해진영)’이란 글이 쓰여 있다. 여해는 이순신의 자(字)다. 가로세로 50X83cm 크기의 족자 형태로, 뒷면엔 작게 ‘祠堂(사당)’이라고 적혀 있어 영정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노 소장은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 그려져 국내의 이순신 사당에 소장됐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현존하는 고본(古本) 영정류 가운데 얼굴의 상이 가장 잘 그려져 있다”고 평가했다. 이번에 공개된 초상화는 국내 개인 수집가가 소장하고 있으며, 소장 이력 등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진위 여부 등을 포함해 전문가들의 추가 검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는 ‘한국인은 즉흥곡의 명수로서 한국인이 아리랑을 노래하면 워즈워스나 바이런 같은 시인이 된다’고 했지요. 오늘날 케이팝의 세계적 유행을 약 130년 전에 예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헐버트 박사의 영문판 일대기 ‘What About Korea?(한국을 어찌할 것인가?)’를 최근 출간한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75)은 14일 “1896년 아리랑을 최초로 서양 음계로 채보한 헐버트 박사는 ‘아리랑은 영원한 한민족의 노래가 될 것’이라고 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 신간은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 박사(건국훈장, 금관문화훈장 수훈)의 삶을 박사의 고국인 미국에 영문으로 소개하는 책이다. 미 백악관과 상하원, 주립도서관 등에도 발송될 예정이다. 1999년 기념사업회를 발족한 김 회장은 “대학 시절 헐버트 박사의 고귀한 삶을 세계에 알리겠다고 마음먹은 지 약 50년 만”이라며 감회에 젖었다. 책 내용은 김 회장이 2019년 국내 출간한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를 바탕으로 미국 독자의 눈높이에 맞게 보완했다. 이번 책 제목은 3·1운동 뒤 헐버트 박사가 미국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 제출한 ‘한국 독립 호소문’에서 따왔다.“한국인 7000여 명이 학살됐다면서 박사가 피맺힌 절규를 합니다. 제가 미 내셔널 아카이브에서 2004년 찾아낸 문서지요.” 책엔 헐버트 박사가 1889년 조선 말글의 우수성을 뉴욕트리뷴지에 기고하며 한글 자모를 사상 최초로 서구에 소개한 것과 1905년 을사늑약을 저지하기 위해 고종과 전보를 교환한 내용이 담긴 뉴욕타임스(NYT) 기사,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직후 “일본 외교는 속임수가 전부”라고 한 기고문 등 김 회장이 발굴한 중요 사료들도 담겼다. 김 회장은 1949년 박사의 서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동아일보 보도를 모아 2015년 추모 특집 소책자를 만들고 박사 영전에 헌정하기도 했다.“헐버트 박사의 삶은 국경을 초월해 세계 젊은이들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어요. ‘승리보다 원칙이 더 중요하다’는 가훈을 온전히 실천한 행동가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와 세계에 필요한 말이기도 합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을사늑약이 맺어지던 1905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의 집을 찍은 사진이 있다. 사진 찍는 사람을 호기심 어린 눈길로 지켜보는 이들이 집 앞에 좌우로 늘어섰는데, 영락없는 한국인의 얼굴이다. 당시는 ‘독립운동의 성지’ 신한촌이 건설되기 6년 전. 사진은 신한촌에 앞선 한인 거주지 ‘개척리’의 풍경이다.20세기 초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은 그동안 주로 민족운동의 시각에서 조명돼 왔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는 당연히 그 범주를 넘어선다. 이런 한인들의 이민사 자체에 주목한 신간 ‘귀화를 넘어서: 러시아로 간 한인 이야기’(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사진)가 최근 발간됐다. 저자는 한인 이주사를 주제로 성균관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송영화 씨다. 책에 따르면 개척리는 위생 문제를 우려한 러시아 당국이 늘어난 이민자를 격리하면서 형성된 ‘황인종 게토(ghetto)’였다. 1893년 당국은 한인에게 주거환경이 열악한 시외의 이 지구를 배정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와 개척리를 잇는 큰길이 ‘카레이스카야(한인) 거리’였다. 한인들은 자치기관인 한인거류민회를 구성하고 교육과 위생, 치안을 주요 사업으로 내세웠다. 한인 언론도 위생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청결한 행위로 러시아 당국의 신용을 얻고 자치를 허용받아야 고국 독립의 기초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척리는 1911년 당국에 의해 방역을 명목으로 결국 철거됐다. 저자는 “개척리 철거는 위생 논의에 기반했지만, 동시에 인종주의적 조치이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합하자 한인의 법적 지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졌다. 일본은 신민화를 유도했다. 한인이 일본인이 되면 거주허가증 발급비가 85% 줄었다. 반면 러시아는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한인에게 국적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에 반감을 지녔던 한인 망명자들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해 일본의 체포와 간섭을 피했다. 이주 한인들은 러시아에서도 뛰어난 농업 능력을 인정받았다. 러시아 외무성 관료 그라베는 한인이 “농작이 불가능한 땅이라 하더라도 잘 일궈 귀리 또는 메밀을 재배한다”고 기록했다. 아무르주의 한 농장에선 한인이 경작한 땅의 단위 수확량이 러시아인의 최대 5배였다고 한다. 한인들의 높은 농업 생산성이 지역의 물가를 안정시킬 정도였다. 러시아는 한인의 러시아 동화 가능성을 끊임없이 의심했지만 한인들은 러시아인이 다니는 학교에 자녀를 통학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저자는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은 고국의 식민화와 현지 적응이라는 이중의 과제를 마주했다”며 “한반도 바깥에서 새롭게 탄생할 고국을 꿈꿨다”고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은 ‘가치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미국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1912∼2006)의 ‘선택할 자유(Free to Choose·1980년)’를 여러 차례 꼽았다. 고전적 자유주의의 부활을 주장한 책으로, 일각에선 ‘대통령이 시장 만능주의에 경도된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대통령과 나라의 운명이 걸린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를 목전에 둔 가운데, 프리드먼이 이 책 맨 앞에 인용한 한 논고 구절이 눈길을 끈다. “정부의 목적이 유익할 때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최대한 경계해야 한다는 걸 경험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자유롭게 태어난 사람들은 악의를 가진 통치자들이 자유를 침해하는 걸 본능적으로 경계한다. 진짜 위험은 열정적이고 선의를 가졌지만 분별이 없는(without understanding)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자유를 침식하는 데 도사리고 있다.” 프리드먼은 정부 정책의 의도가 좋더라도 국민의 자유를 침해하면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했을 것이다. 원래 이 글을 쓴 이는 미국에서 ‘국민들의 변호사’로 불린 루이스 브랜다이스 대법관(1856∼1941)이다. 1928년 정부의 사생활 침해에 맞서 프라이버시권의 보장을 역설하며 썼다. 브랜다이스는 경찰이 밀매업자를 감청한 건 부당하다, 범죄자 검거라는 ‘목적’이 불법 도청이라는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무법자가 되면 시민들도 그럴 테고, 세상이 무법천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짧은 인용구를 얼마나 곱씹어가며 읽었을지는 알 도리가 없다. 12·3 비상계엄이 ‘악의를 가진 통치자’의 자유 침해인지, ‘선의를 가진’ 침식 시도인지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중요한 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선 열정만큼이나 ‘분별 있는 시민’들의 존재가 필수라는 데 있다. 누적된 정치 갈등과 세 대결로 광장은 찬탄과 반탄으로 갈린 채 일촉즉발 상황이다. 헌재에서 원하는 판결이 나오지 않을 경우 불복할 것을 부추기는 정치인들 탓이 크다. 결정이 발표되면 어느 한쪽은 그동안의 믿음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인간은 분노를 느끼고, 분노는 쉽사리 상대를 향한 증오로 바뀐다. 다수가 그런 감정에 몸을 맡겼다간 우리가 간신히 만들고 지켜 온 민주주의가 일거에 무너질 소지마저 없지 않다. 새삼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을 생각해 본다. 그는 어릴 적 비를 피하다 “내 곁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이 사람들 모두, 그리고 건너편의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나’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고 했다. “수많은 1인칭 시점의 존재를 경험한 놀라운 순간이었다”는 것이다. 의견이 달라도 우리는 어차피 대한민국이라는 같은 배를 타고 있다. ‘1인칭 시점’까진 무리라고 해도, 최소한 찬탄을 외치는 사람이나 반탄을 외치는 사람이나 서로 조타실을 빼앗으려다 배가 침몰하면 모두 치명적인 피해를 볼 뿐이라는 인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적어도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려 해선 안 된다. 이해와 납득, 그리고 분별. ‘언더스탠딩(understanding)’이 갈등을 딛고 우리 사회를 회복시켜 미래로 이끌 열쇠다.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헌법재판소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승복하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나 집단이 있다면 그들은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헌재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모두)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발언과 행동에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헌재가 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예고하자 원로 및 전문가들은 1일 헌재 결정에 대한 조건 없는 승복을 강조했다. 초유의 12·3 비상계엄과 장기화된 탄핵 정국으로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분노한 민심이 헌재 심판 결과를 받아들이고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정치·사회 지도자부터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정치권 지도자들이 통합과 치유의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내놓는 등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국민 통합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불복하면 감당할 수 없는 위기 맞을 것” 원로들은 탄핵 찬반 세력과 양당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면서 한국 사회의 갈등이 위험 수준으로 치솟았다고 진단했다. 헌재 심의가 길어진 것도 양측이 세 대결 양상으로 치닫는 요인이 됐다고 분석했다. 최 교수는 “대통령 탄핵 찬성과 반대 양측이 자제하지 않으면 한국 정치는 감당할 수 없는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며 “시민들이 계속 광장으로 달려 나오는 건 위험천만하다”고 했다. 그는 “탄핵이 인용되면 반대 측에서 항의 집회를 벌이는 등 소요가 일 것”이라며 “대선에 후보를 내 정상적으로 선거를 하고 결과에 순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약 대통령 파면 결정이 나지 않으면 혼란이 훨씬 클 것이라는 게 최 교수의 진단이다. 그는 “한국 사회가 모든 결과를 다 수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그런 경우엔 사태가 폭동으로 번질 위험마저 있다”며 “대통령이 임기 단축과 개헌을 시도한다고 해도 엄청난 논쟁을 불러올 것인데, 얼마나 동의를 얻을지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손 교수는 “개인적으로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가 국가와 국민에 대한 폭력이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속이 쓰릴지언정 받아들여야 한다. 한번 결정된 헌재 판결을 무리하게 바꾸겠다면 남는 것은 폭력뿐”이라고 강조했다. 정대철 대한민국헌정회장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데 동의했다(agree to disagree)’는 민주주의 기본 원칙에 대한 이해와 서로의 차이에 대한 인정이 정치 지도자나 사회 지도자나 국민들한테 필요하다”며 “지금이라도 윤 대통령의 승복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선고 당일) 여야 지도부에서 승복한다는 공식 성명부터 내야 한다”며 “(국민들이 승복하게 만들기 위해선) 차기 주자들이 구두선(口頭禪)에 그치지 않게 통합 얘기를 자꾸, 계속해야 한다”고 했다. ● “이제 통합의 시간이 돼야” 국민 분열이 극심해진 현 상황에 대해 정 회장은 “한쪽에서는 다수결, 한쪽에서는 거부권 등으로 힘의 논리를 자제하지 못해 여기까지 왔다”며 “정치 지도자들이 헌재의 결과를 자기 유리한 쪽으로 서로 유도하기 위해 지금 양쪽에서 텐트를 치고 장외 정치를 하는 이런 모습은 민주국가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분석했다. 그는 “선고날인 4일 ‘국가를 걱정하는 원로 모임’에서 국민들은 평상으로 돌아가고 정치인도 원내로 돌아가라고 권면할 예정”이라며 “탄핵심판 이후 국민통합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된다”고 말했다. 손 교수는 “법적 판단과 별개로 모든 사태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이 바로 윤 대통령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며 “전쟁이나 전시에 준하는 상황도 아닌데 계엄을 선포하고 총을 든 군인을 국회로 보낸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탄핵이 인용될 경우 탄핵 반대 쪽은 헌재의 결과에 승복하고 특히 일부 지도자들은 1월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력 난입과 같은 일이 초래되지 않도록 지지층 결집 메시지를 자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개헌 등을 통한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최 교수는 “일찍이 보지 못했던 정부 여당과 의회 권력 간의 극한 대립이 계엄이라는 불덩이를 만나 엄청난 폭발력을 갖게 됐다”며 “이번 사태를 정당들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드는 전기로 삼아아 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위성정당을 불러온 현행 비례대표제를 없애고, 다당제의 정착을 위해 중대선거구제나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는 등 선거제도를 바꾸자고 제안했다. 강 교수도 “헌재 결정이 또 다른 갈등이나 극단적 대결로 가지 않고 자연스럽게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며 “정치제도의 개혁이나 개헌 논의도 나오고 있는데 승자독식 구조를 깨고 포용적 형태의 국정 운영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일부 유튜브 채널 등을 통해 왜곡된 정보가 증폭돼 정치 양극화가 심화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조종엽 기자 jjj@donga.com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최근 학계에선 생성형 인공지능(AI)이 우리 한문 고전의 번역에도 시험적으로 쓰이고 있다. 한 한문학계 원로는 “젊은 연구자들이 번역을 AI에 의존할 것 같아 걱정”이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기본기가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 AI를 쓰면 공부가 늘지 않을까 봐 우려된다는 것이다. AI의 한문 번역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 한국고전번역원의 권경순 대외협력처장과 최두헌 선임연구원의 도움을 받아 ‘챗GPT 4o’(유료), ‘제미나이 2.0 프로’(유료)가 번역한 결과물을 인간 번역자의 것과 비교해 봤다.● 한국어는 청산유수인간 번역자는 성종실록 성종 19년 5월 20일 기사를 “이미 체임(遞任)된 수령은 어쩔 수 없지만, 시임(時任) 수령도 공초를 받지 않고 해당 아전이 공초한 말만 가지고 파직하기도 하고 자급(資級)을 강등하기도 하였으니”라고 옮겼다. 이에 비해 챗GPT는 “이미 교체된 수령(守令)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지만, 현재 재직 중인 수령조차 직접 소환하여 조사하지 않고, 단지 해당 아전(吏)의 진술만을 바탕으로 삼아 어떤 이는 파직되고, 어떤 이는 강등되는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옮겼다. ‘시임’ ‘공초’와 같은 말을 오늘날 널리 쓰이는 표현으로 옮긴 것이다. 최 연구원은 “가독성과 한국어의 자연스러움 측면에 한정하자면 챗GPT가 인간 번역자보다 낫다는 느낌도 든다”며 “나중엔 번역의 품질 향상에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AI는 의역이나 생략된 단어를 살려 옮기는 데 거침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일부 번역물은 예스러운 말투 탓에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군데군데 오역… 신뢰 어려워AI 고전 번역의 문제는 오역과 들쭉날쭉한 수준이다. 챗GPT와 제미나이는 남구만(1629∼1711)의 ‘약천집(藥泉集)’에 실린 ‘좌윤 최공의 묘갈명(左尹崔公墓碣銘)’을 번역하면서 “무인년에 (최)공은”이라는 뜻의 “戊寅公”을 ‘무인공’이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것처럼 잘못 옮겼다. 권 처장은 “AI가 수식어 등을 인명으로 인식하는 오류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고 했다. 같은 글에서 “중을 홍승주의 군문(軍門)으로 보낸 것입니다(送僧洪軍門是已)”라는 구절은 “승려 홍을 청나라 군영으로 보낸 일입니다”(챗GPT)라고 오역했다. ‘홍군문’은 명나라 측 인물인 홍승주의 군영을 가리키는데도 역사를 모르는 AI가 洪(홍)을 승려 이름으로 번역하는 등 내용을 엉뚱하게 왜곡한 것이다. 챗GPT에선 이를 포함해 한자 210자 분량을 번역했는데 명백한 오역이 5군데 발견됐다. 제미나이 역시 성종실록 기사에서 “일전에 군적 경차관(軍籍敬差官)으로 보낸 관원들”을 “전직 군인 신분으로 경차관에 임명되었던 자들”로 오역했다. 연구원들은 “AI를 초벌 번역용으로 쓰려고 해도 아직은 처음부터 사람이 번역하는 것에 비해 별로 시간이 줄지 않는 수준”이라고 했다.● ‘만능 아닌’ AI, 현명히 활용해야 이 같은 한계는 이들 AI가 학습한 고전 및 우리말 번역 자료의 양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권 처장은 “지금은 인물이나 전례, 고사 등의 정보 검색도 썩 만족스럽진 않은데, 관련 정보가 많은 언어로 질문할 경우엔 더 유용한 답이 나올 것으로 본다”고 했다. 연구자들 사이에선 ‘어차피 대세인 기술이라면 현명하게 활용할 수 있게 준비하자’는 분위기도 생기고 있다. 최 연구원은 “향후 기술이 충분히 발전하면 사람은 번역이 제대로 됐는지를 살피고, 주석을 풍부히 하는 등 심화 연구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지만 이 역시 인간 연구자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야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