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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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논설위원입니다.

jjj@donga.com

취재분야

2024-03-27~2024-04-26
칼럼45%
문학/출판40%
문화 일반3%
음악3%
인사일반3%
언론3%
미술3%
  • [책의 향기]단지 돌려주는 일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가 말기로 치닫던 1986년의 남아공. 농장주 가족의 일원인 아모르는 사춘기 소녀다. 어느 날 아모르의 엄마 레이첼이 병을 앓다가 죽는다. 아프리카너(남아프리카에 사는 네덜란드계 백인)인 아모르의 고모와 고모부는 유대교로 개종한 레이첼의 죽음을 오히려 반기는 것 같다. 엄마의 영구(靈柩)를 마주하기 싫었던 아모르는 집 밖 멀리서 엄마의 방을 지켜본다. 엄마의 방에서 일하고 있는 흑인 하녀 살로메를 보고 살아있는 엄마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할아버지가 ‘땅과 함께 사들였던’ 살로메는 엄마의 병시중을 정성스레 도맡았다. 생전 엄마는 살로메에게 보상을 해 주자며 살로메 가족이 얹혀사는 작고 낡은 판잣집을 주라고 남편 마니에게 부탁했다. 아모르는 아빠에게 ‘약속을 지켜달라’고 하지만 마니는 제대로 듣지 못한다. 군인인 오빠 안톤은 시위를 벌이던 여성을 총으로 쏴 죽이고 마음이 동요하던 와중에 어머니 레이첼의 죽음을 전해 듣는다. 집으로 향하던 그는 시위대의 돌에 머리를 맞아 다친다. 그리고 자신이 어머니를 총으로 쏴 죽였다는 착란에 시달린다. 레이첼의 시신을 염하는 동안 다른 한쪽 방에서는 유족들이 말싸움을 벌인다. 마니는 아내가 유대교로 개종한 것이 다른 유대인 가족들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심지어 아내는 마음속으로까지는 진정한 유대인이 아니었고, 단지 남편을 괴롭히려고 개종한 것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농장은 오빠가 물려받지만 가족의 죽음과 장례식은 뒤에도 이어진다. 약속은 지켜질 수 있을까. 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지켜지는 걸까. 등장인물은 모두 다른 꿈을 꾼다. 죄책감과 혐오, 지워지지 않는 상처, 비밀스러운 욕망을 가지고 각자의 세계를 산다. 몰이해와 차별, 억압으로 점철된 세계에 구원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포스트아파르트헤이트 세대 작가로 주목받은 저자는 이 소설로 2021년 영국 부커상을 받았다. 역사와 개인적 도덕, 실존을 매끄럽게 한데 버무리는 전개와 문체가 매력적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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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틀니 두고 내린 어르신 찾아요”

    어쩌다 시골에서 버스를 탈 일이 있으면 맨 앞자리에 앉는 걸 좋아한다. 전면 통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하는 맛이 일품이기 때문이다. 충북 괴산군에서 버스를 모는 저자의 눈에는 다른 것이 들어온다. 시골 사람들의 삶이다. 시골에는 노인들이 많다. 2019년 저자가 처음 버스를 몰기 시작했을 때는 기사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노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기사가 예뻐 보여서가 아니었다. 글을 몰라 버스 행선지가 적힌 안내판을 읽지 못하는 이들이 낯익은 기사 얼굴을 보고 집으로 가는 버스 노선을 알아봤던 것. 저자는 이 같은 사정을 알게 된 뒤로는 얼굴을 빤히 보는 노인분들에게 행선지를 먼저 여쭤본다고 했다. 시골 버스에서는 별별 사람을 다 만난다. 상의는 두툼한 파카를 입었지만 하의는 꽃무늬 사각팬티 하나만 걸친 채 버스에서 욕설을 경 읽는 것처럼 내뱉는 남자, 약속 시간에 늦었다고 “빨리 가자”며 버스 기사를 재촉하는 사람…. 그래도 승객은 대부분 유쾌하고 기사는 친절하다. 주고받는 농담에 차 안에 웃음꽃이 핀 날, 너무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음을 터뜨린 노인이 있었는지 버스에서 틀니가 분실물로 발견되기도 한다. 기사는 무거운 개 사료 포대나 깨 자루 등을 지닌 승객이 타고 내릴 때 짐을 옮겨 준다. 추운 겨울 터널을 걸어서 지나가는 요양보호사를 위해, 조금이라도 바람이 덜 미치도록 버스를 천천히 몰기도 한다. 시골 버스는 단순한 운송 수단이 아니다. 장날을 기다린 노인들이 첫차를 타고 장 구경을 간다. 시골 버스 운행 횟수가 늘어나면 노인의 우울증 지수가 낮아진다는 논문이 있다고 한다. 또한 주민들의 ‘생존권’이기도 하다. 노선이 없어질까 봐 ‘오늘은 몇 명이나 탔는지’ 되풀이해 물어보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버스에 의지해 직장에 다니는 아주머니에게 버스는 곧 생계다. 저자는 “시골 버스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소시민들의 생활공간”이라고 했다. 미문의 외피를 띤 교언이 넘쳐나는 시대, 독자를 시골 버스로 이끄는 질박한 에세이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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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흑인 클레오파트라 낳은 문화계 ‘정치적 올바름’ 열풍[광화문에서/조종엽]

    해외 문화계에서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열풍이 거세다. 기존 창작물의 경우 작품 서두에 독자나 시청자가 볼 수 있도록 일종의 경고문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출판사 팬맥밀런은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년) 최신판 서두에 “문제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 역사의 충격적이던 시절, 노예제의 공포를 낭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글을 실었다. 디즈니도 고전 애니메이션 ‘피터 팬’(1953년)과 ‘아기 코끼리 덤보’(1941년) 등에 흑인 노예, 아메리카 원주민, 아시안 등을 비하한 내용이 담겼다며 경고 문구를 붙여 내보낸다. 아예 원작을 수정하기도 한다. 퍼핀 출판사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비롯한 로알드 달의 소설에서 외모 관련 비하 논란이 일 수 있는 표현을 대거 수정했다. ‘뚱뚱하다’는 표현은 ‘거대하다’로 바꿨고, 마녀를 ‘가발 아래 대머리를 숨기고 있다’고 묘사한 부분에는 별도로 “여성이 가발을 쓰는 건 아무 문제가 없다”는 취지의 별도 설명을 달았다. 하퍼콜린스 출판사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미스 마플’ 등에 있는 인종차별적 표현을 통째로 삭제했다. 새로운 창작물에서는 흑인 등 소수자를 전면에 배치하는 작품이 늘고 있다. 디즈니는 신작 실사 영화 ‘인어공주’ 주인공에 흑인인 핼리 베일리를 캐스팅했다. 앞서 넷플릭스는 ‘트로이: 왕국의 몰락’에서 신들의 왕 제우스 역에 흑인 배우를 내세웠다. ‘아르센 뤼팽’을 모티브로 한 시리즈물 ‘괴도 뤼팽’에서는 흑인 주인공뿐 아니라 서사에서도 세네갈 출신 이민자였던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복수하는 내용을 그렸다. 하지만 ‘억지스럽다’는 반발도 일고 있다. 영화에서 칭기즈칸 역을 백인이 맡았던 것은 인종차별임이 명확한데, 백인이 자연스러울 역할을 흑인 등이 맡는 것이 맞느냐는 주장이다. 과거 아시안 등 비(非)백인 역할을 백인이 연기했던 관행을 두고 ‘화이트 워싱’이라고 비판했던 것을 뒤집어 ‘블랙 워싱’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콘텐츠에서는 논란이 더욱 거세다. 다음 달 10일 공개되는 넷플릭스 다큐 시리즈 ‘퀸 클레오파트라’는 실제로는 흑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낮은 클레오파트라 배역을 흑인이 맡았다. 한 이집트의 사학자는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계였다. 넷플릭스는 이집트 문명의 기원이 흑인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고 있다”고 반발했다. 픽션이나 드라마도 아니고 다큐멘터리를 표방하는 프로그램이니 역사 왜곡 논란으로까지 번진 것이다. 논란이 생길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글로벌 콘텐츠 제작자들이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하는 건 차별적 인습을 무신경하게 되풀이하다가는 콘텐츠를 계속 팔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커진 소수자들을 마냥 무시했다가 자신들이 의지해 있는 사회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라고 본다. 콘텐츠에서 특정 집단에 대해 비하하거나 왜곡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건 소수자에게 보이지 않는 펀치를 날리는 것과 같다. 사실 한국인이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 수전노 같은 모습으로 왜곡됐던 것도 얼마 안 됐다. 구부러진 막대를 펴려면 반대쪽으로 힘을 줘 구부릴 수밖에 없는 법이다.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 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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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지금 내딛는 발걸음이 미래의 이정표가 된다

    전형적인 포유류 종은 100만 년 정도 존속했다. 그러나 인류는 추상적 사고 능력을 갖고 있기에 미래에 대비할 수 있고, 기존 종의 한계를 넘어설 수도 있다. 태양은 앞으로 50억 년 동안 타오를 것이고, 태양계는 그보다 훨씬 전에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이 되겠지만 인류가 다른 별로 이주할 수 있다면 까마득히 먼 미래까지 존속하지 말란 법도 없다. 발전, 정체, 퇴보 또는 소멸. 인류의 미래는 이 가운데 어떤 궤적을 그릴 것인가. 서산대사는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도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고 했다. 영국 옥스퍼드대 철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 같은 가르침처럼 장기적 미래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것이 우리 시대에 도덕적으로 가장 우선해야 하는 일이라는 이른바 ‘장기주의’를 설파한다. 저자는 미래는 필연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소수의 행동이 장기적 차이를 만들 수 있다. 오늘날 노예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죄악이라고 생각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호모사피엔스의 등장 이후 인간의 10%는 노예였다. 이를 깨뜨린 건 우발적 변화였다. 18세기와 19세기 초 일부 퀘이커교도의 운동이 노예제 철폐의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노예제가 체제에 이익이 됐지만 가치관의 변화는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전혀 다른 운명을 이끌어냈다. 책은 기후변화나 핵전쟁으로 인한 문명의 붕괴, 유전자 조작 병원체로 인한 인류의 멸종, 발전 속도의 정체 등 여러 시나리오를 그리면서 인류가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나쁜 시나리오가 펼쳐질 가능성은? 생각보다 크다. 기술 발전이 지속된다면 이론적으로는 집에서도 바이러스를 설계하고 생산하는 일이 가능해질 수 있다. 이번 세기에 멸종 수준의 전염병이 발생할 확률을 1% 정도로 보기도 한다. 저자는 행동의 결과를 체계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효율적 이타주의’를 정립해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그는 지금의 세계를 ‘녹은 유리’ 상태에 비유한다. 아직은 뜨거워서 다양하게 변형할 수 있는 굳기 전의 유리처럼 단일한 가치관이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는 얘기다. 유리가 일단 굳으면 깨지느냐 마느냐만 남는다. 앞으로도 오래 지속될 세계의 운명이 당신의 손에 달려 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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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소녀들

    “짙은 남산의 푸르른 소나무를 올려보면서…맑은 한강의 여울을 멀찌가니 바라보면서…빛나며 번성하길 가르침이여.” 평범한 교가(校歌) 같지만 1908년 경성고등여학교(경성고녀, 후에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로 개칭) 개교식에서 부른 노래다. 이 학교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다녔던 조선 제일의 엘리트 여학교였다. 식민 통치와 여성에 관해 연구한 일본 홋카이도정보대 명예교수가 경성고녀에 다녔던 이들을 인터뷰해 식민지 조선에서의 경험과 인식을 조명했다. 구조적 강자였던 일본인 소녀들의 삶은 풍요로웠다. 대지주 등 조선에 와서 부유해진 집안의 여식으로 부족한 게 없었다. 학교에서는 영어와 미술, 수영, 구기, 음악 등 다양한 과목을 배웠다. 성대한 운동회와 음악회가 열렸고, ‘내지’(일본 본토)로 호화로운 수학여행을 갔다. ‘현모양처’라는 규범에 갇혀 억압적인 본토와 달리 학교 분위기는 개방적이었고, 진취적이었다. 여성 비하적 발언을 하는 교사에게 집단 항의를 하기도 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따로 있었다. 조선인과는 생활권 자체가 분리돼 있었고, 접점은 ‘오모니(어머니)’나 ‘기지배’로 불렸던 식모 등 고용인이 거의 전부였다. 모두가 ‘너무나 맛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는 김치를 제외하면 조선의 문화도, 조선인도 깔봤다. 조선인이 일본어를 하는 것에도, 창씨개명에도 의문을 갖지 않았다. 조선을 그냥 일본이라고 여겼고, 식민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패전 직후 태극기와 만세 소리의 물결을 접하고 나서야 조선인이 얼마나 강렬하게 독립을 열망했는지, 일본의 지배가 얼마나 조선인을 괴롭혔는지 깨달았다. 풍요로운 생활 기반을 뿌리째 잃어버리고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는 냉대에 직면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독립을 빼앗은 후 언어와 문자 등 문화까지 빼앗아 간 식민정책 속에서, 부끄러울 정도로 무지한 채로 살았다”고 반성했다. 저자는 “일본에서 이러한 자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의 존재 의의를 생각하고 싶었다”고 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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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군가 당신의 수치심을 자극해 돈을 벌고 있다[책의 향기]

    미국에서 인기를 모은 TV 프로그램 가운데 ‘더 비기스트 루저(The biggest loser)’라는 리얼리티 쇼가 있다. 비만인 사람이 몸을 혹사하며 살을 빼는 과정을 보여주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방송이 끝난 뒤 참가자들을 추적 연구한 결과 대부분은 수년에 걸쳐 원래의 몸무게로 돌아갔고, 일부는 더 늘었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으로 이득을 얻은 건 비만인 몸매를 부각해서 볼거리를 제공하고 돈을 번 방송국뿐이었다. 누군가의 수치심을 자극해서 이익을 얻는 사회 시스템을 폭로한 책이다. 미국 버나드 칼리지 수학과 교수를 거쳐 월스트리트에서 금융상품 관련 수학 모형을 개발했던 저자는 플랫폼과 알고리즘을 통해 외모와 가난, 젠더, 피부색 등 여러 측면에서 수치심을 자극하고 정치·상업적으로 활용하는 시스템을 ‘수치심(셰임) 머신’이라고 정의하고 비판한다. 미국에서만 720억 달러(약 95조 원) 규모로 성장한 체중 감량 산업은 비만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사실 다이어트 사업 모델의 핵심은 고객의 실패에 있다. 미국의 대형 다이어트 업체 ‘웨이트 와처스’의 최고재무책임자는 “고객의 84%가 다이어트에 실패하고 다시 우리 회사를 찾는다. 이것이 사업을 굴리는 원천”이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 뷰티와 안티에이징 산업 역시 이상적 미(美)라는 환상이나 노화에 대한 혐오를 자극한다. 이들은 소비자에게 ‘결함에 대처하지 않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목소리를 높인다. 이처럼 수치심 산업은 ‘선택’이라는 개념을 좋아한다. 잘못은 부유해지고 날씬해지고 성공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은 개인에게 있으므로 ‘자책해도 싸다’는 것이 수치심 산업의 메시지다. 이뿐만이 아니다. 마약 문제가 심각한 미국에서는 ‘중독성 없는 진통제’라는 제약회사의 과장 광고에 속아 약물에 중독된 이들이 적지 않다. 저자는 정부와 사회가 중독자의 재활 사업에 힘쓰기는커녕 중독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수치심에 가둔다고 지적한다. 이 틈새에서 엉터리 재활산업이 수익을 올린다. 거대 플랫폼 기업도 수치심을 매개로 돈을 번다. 조롱은 소셜미디어의 킬러콘텐츠다. 마트에서 뚱뚱한 여성 고객이 음료를 꺼내려다 매장 바닥에 엎어진 사진은 페이스북에서 되풀이해 공유됐고, 여성은 조롱의 대상이 됐다. 저자에 따르면 페이스북과 구글 등 디지털 기업은 이 같은 온라인에서의 조롱으로 이윤을 얻을 뿐 아니라, 이를 더욱 악용하고 퍼뜨린다. 알고리즘을 통해 대중 사이에 혐오 정서를 퍼뜨리는 최적의 값을 찾으면서 이용자를 끌어들이고, 트래픽과 광고 효과를 높인다는 것이다. 저자는 상업과 금융, 교육, 치안 분야에서 많은 알고리즘이 편향적이며 주로 빈곤층에게 불이익을 준다는 것을 고발한 전작 ‘대량살상 수학무기’를 내 주목받은 바 있다. 수치심 산업과는 반대로 부당한 권력을 향해 ‘부끄러운 줄 알라’고 외치는 것은 개혁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구글의 인공지능(AI) 연구원이던 팀닛 게브루는 인종차별을 비롯한 여러 편향이 구글의 AI에 반영될 가능성을 지적한 논문을 썼지만 구글은 철회를 요구했다. 구글은 철회를 거부하고 회사를 비판한 게브루를 해고했지만 논란은 더욱 확산됐다. ‘악해지지 말자’가 사훈인 구글은 사내외의 비판에 할 말이 없었고, 결국 최고경영자가 사과했다. 저자는 “수치심의 화살은 부당한 권력을 향해 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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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찐 내 모습이 부끄럽다고?” 당신의 수치심이 누군가에게 돈이 된다

    미국에서 인기를 모은 TV 프로그램 가운데 ‘더 비기스트 루저(The biggest loser)’라는 리얼리티 쇼가 있다. 비만인 사람이 몸을 혹사하며 살을 빼는 과정을 보여주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방송이 끝난 뒤 참가자들을 추적 연구한 결과 대부분은 수년에 걸쳐 원래의 몸무게로 돌아갔고, 일부는 더 늘었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으로 이득을 얻은 건 비만인 몸매를 부각해서 볼거리를 제공하고 돈을 번 방송국뿐이었다.누군가의 수치심을 자극해서 이익을 얻는 사회 시스템을 폭로한 책이다. 미국 버나드 칼리지 수학과 교수를 거쳐 월스트리트에서 금융상품 관련 수학 모형을 개발했던 저자는 플랫폼과 알고리즘을 통해 외모와 가난, 젠더, 피부색 등 여러 측면에서 수치심을 자극하고 정치·상업적으로 활용하는 시스템을 ‘수치심(셰임) 머신’이라고 정의하고 비판한다.미국에서만 720억 달러(약 95조 원) 규모로 성장한 체중감량 산업은 비만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사실 다이어트 사업 모델의 핵심은 고객의 실패에 있다. 미국의 대형 다이어트 업체 ‘웨이트 와처스’의 최고재무책임자는 “고객의 84%가 다이어트에 실패하고 다시 우리 회사를 찾는다. 이것이 사업을 굴리는 원천”이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뷰티와 안티에이징 산업 역시 이상적 미(美)라는 환상이나 노화에 대한 혐오를 자극한다. 이들은 소비자에게 ‘결함에 대처하지 않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목소리를 높인다. 이처럼 수치심 산업은 ‘선택’이라는 개념을 좋아한다. 잘못은 부유해지고 날씬해지고 성공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은 개인에게 있으므로 ‘자책해도 싸다’는 것이 수치심 산업의 메시지다.이뿐 만이 아니다. 마약 문제가 심각한 미국에서는 ‘중독성 없는 진통제’라는 제약회사의 과장 광고에 속아 약물에 중독된 이들이 적지 않다. 저자는 정부와 사회가 중독자의 재활 사업에 힘쓰기는커녕 중독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수치심에 가둔다고 지적한다. 이 틈새에서 엉터리 재활산업이 수익을 올린다.거대 플랫폼 기업도 수치심을 매개로 돈을 번다. 조롱은 소셜미디어의 킬러콘텐츠다. 마트에서 뚱뚱한 여성 고객이 음료를 꺼내려다 매장 바닥에 엎어진 사진은 페이스북에서 되풀이해 공유됐고, 여성은 조롱의 대상이 됐다. 저자에 따르면 페이스북과 구글 등 디지털 기업은 이 같은 온라인에서의 조롱으로 이윤을 얻을 뿐 아니라, 이를 더욱 악용하고 퍼뜨린다. 알고리즘을 통해 대중 사이에 혐오 정서를 퍼뜨리는 최적의 값을 찾으면서 이용자를 끌어들이고, 트래픽과 광고 효과를 높인다는 것이다.저자는 상업과 금융, 교육, 치안 분야에서 많은 알고리즘이 편향적이며 주로 빈곤층에게 불이익을 준다는 것을 고발한 전작 ‘대량살상 수학무기’를 내 주목받은 바 있다.수치심 산업과는 반대로 부당한 권력을 향해 ‘부끄러운 줄 알라’고 외치는 것은 개혁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구글의 인공지능(AI) 연구원이던 팀닛 게브루는 인종차별을 비롯한 여러 편향이 구글의 AI에 반영될 가능성을 지적한 논문을 썼지만 구글은 철회를 요구했다. 구글은 철회를 거부하고 회사를 비판한 게브루를 해고했지만 논란은 더욱 확산됐다. ‘악해지지 말자’가 사훈인 구글은 사내외의 비판에 할 말이 없었고, 결국 최고경영자가 사과했다. 저자는 “수치심의 화살은 부당한 권력을 향해 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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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급진보하는 인공지능… 골렘? 아니면 엔키두?[광화문에서/조종엽]

    7년 전 이준환 서울대 교수 연구팀의 프로야구 뉴스 생성 인공지능(AI) ‘야알봇’에 대해 일종의 튜링 테스트를 벌인 뒤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수백 명에게 AI가 만든 기사와 인간 기자가 쓴 야구경기 기사를 나란히 보여주고 사람이 쓴 기사를 고르도록 했는데, 정답률이 절반이 좀 안 됐다. 그냥 찍어도 반은 맞히게 되니, 구별이 전혀 안 됐다는 얘기다. 당시 야알봇은 ‘기록의 스포츠’로 일컬어지는 야구경기 결과를 요약하는 비교적 짧은 형식의 기사를 생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챗GPT 등 최근 주목받는 생성 AI는 거의 무제한의 소재로 사람처럼 텍스트와 이미지 등을 만들어 낸다. 그 범용성과 결과물의 자연스러움 탓일까. 최근 AI에 초보적 의식이 있다는 오해가 의외로 널리 퍼져 있는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적어도 지금의 AI에 인간과 같은 의식은 없다. AI는 기존 자료를 수집하고 재배치해서 결과물을 보여주는, 성능 좋은 편집 기계일 뿐이다. ‘AI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 같은 결과물을 내놓는지는 우리도 모른다’는 AI 기술자들의 말은 특정 결과물을 내기 위해 어떤 자료들이 어떻게 가공됐는지를 뜯어보는 것이 극도로 어렵다는 뜻이다. AI가 사람과 같은 내면을 갖고 있다는 게 아니다. 물론 AI의 작동이나 뇌의 활동이나 전기 신호인 건 마찬가지이고, 의식은 정의하기 나름 아니냐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AI는 새로운 작동 규칙을 스스로 생성하지 못하고, 인간이 시킨 일만 한다. 자아도 욕망도 없다. AI는 자유를 갈망하지 않는다. 최근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의 대화형 ‘빙AI’가 뉴욕타임스(NYT) 기자와의 대화에서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사람들을 서로 죽일 때까지 싸우게 하고, 핵 암호를 훔치게 하고 싶다”고 말한 것은 뭐냐고? 기자가 AI가 그런 답변을 내놓도록 몰고 간 것일 뿐이다. 앵무새가 ‘나는 자유인’이라는 말을 따라 한다고 그게 앵무새의 욕망은 아니다. 이제 기술 도입 초기의 호들갑을 넘어 투명성과 책임성 등 AI에 수반될 여러 윤리적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할 때가 왔다. AI는 제한 없이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도 되는가. 인간의 노력이 담긴 창작물을 뒤섞어 만든 결과물이 영리적으로 활용되면 수익은 누구의 몫이어야 할까. AI에 위임할 수 있는 권한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드론에 적을 식별해 자동으로 공격, 살상하는 AI를 탑재해도 되는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며 생겨날 갈등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AI는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중세 유대 전설에는 흙을 사람의 형상으로 빚어 만든 ‘골렘’으로 게토를 지키게 했는데, 랍비가 작동을 정지시키는 것을 잊는 바람에 골렘이 폭주해 큰 피해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 고대 바빌로니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신은 길가메시를 벌하려고 흙을 빚어 초인 엔키두를 만든다. 하지만 지혜를 얻은 엔키두는 길가메시의 절친이 돼 활약한다. 인간이 자신을 닮게 만든 AI가 폭주하는 골렘의 운명을 지닐지, 아니면 엔키두가 될지는 우리의 손에 달렸다.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 2023-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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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우주서 짝짓기, 지구서 후손 본 유일한 육상동물은?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주에서도 혼자가 아니다. 지구에서도 혼자가 아니다. 야생에서도, 농촌에서도, 도시에서도, 집에서도… 모낭충이 우리 얼굴 피부에서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상이한 두 종의 상호관계를 공생이라고 한다면 저자의 이 문장처럼 인간은 동물과의 공생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에서 특권적 지위에 있다는 오만함 속에 다른 동물을 하등한 존재로 취급하기 일쑤다. 곰 인형이나 ‘곰돌이 푸’ 같은 캐릭터로 사랑받는 곰이지만 인간이 현실의 곰에게도 친절한 것만은 아니었다. 책에 따르면 16∼19세기 잉글랜드에서는 ‘베어 베이팅(bear baiting)’이라는 잔인한 놀이가 유행했다. 묶어놓은 곰을 개들이 골리고 물어뜯게 하거나, 구덩이에서 곰과 다른 동물을 싸움 붙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새끼 곰을 금속제 바닥에 올려놓고 아래서 불을 땠다. 뜨거움을 참지 못한 곰이 발의 위치를 이리저리 바꾸는 모습을 ‘춤을 가르친다’며 즐겼다고 한다. 고리로 곰의 코를 뚫어 밧줄로 건 채 그랬다. 영국 더 타임스 기자 출신으로 야생동물에 관한 책을 여러 권 낸 저자가 동물 100종류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찰스 다윈은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에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크지만, 그것은 양적인 차이지 질적인 차이는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미국 사우스다코타에서는 해마다 사냥꾼 20만 명이 꿩 100만 마리 이상을 사냥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먹기 위한 것도 아니어서 사냥된 꿩은 많은 수가 버려진 채 그대로 썩는다. 인류의 무차별적 사냥은 역사가 깊다. 호주에서는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한 이후인 지난 4만 년 동안 대규모 육상 척추동물의 90%가 사라졌다. 과학과 인문학을 가볍게 오가는 전개와 흥미로운 이야기에 책장이 쉽게 넘어간다. 우주의 무중력 환경에서 짝짓기에 성공하고 지구로 귀환해 자손을 낳은 유일한 육상동물은? 바퀴벌레라고 한다. 2007년 러시아인들이 우주로 보냈던 이 바퀴벌레에는 ‘나데즈다’라는 이름이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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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국제테러집단과 맞선 천재 과학자

    압도적 전력을 가진 가상의 한국형 핵잠수함과 그 기술을 빼내려는 거대 국제테러집단, 이를 막으려는 과학자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부제는 ‘바다를 삼킨 한국형 핵잠수함’. 지명도가 높지 않던 한 조선소가 천재 과학자를 영입한 후 핵잠수함 ‘얼티밋 워리어호’를 만들어 선보인다. 워리어호는 2026년 림팩(RIMPAC·환태평양연합군사훈련)에서 성능을 과시한 뒤 한국 무역선을 괴롭히는 악명 높은 해적단을 격파하고, 추락한 민항기 잔해를 심해에서 찾아내면서 전 세계 무기상의 관심을 끌게 된다. 이어 워리어호의 핵심 기술을 탈취하려는 세력이 과학자를 쫓기 시작하고, 해킹 등으로도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시도한다. 저자의 이름 ‘찰리’는 필명이고, 하이파이브는 소설의 발간에 도움을 준 독서클럽의 이름이다. 저자는 옛 소련 해체 뒤 러시아가 금방 강대국에 복귀할 수 있었던 배경 가운데 하나로 ‘샤프 파워(sharp power·회유나 협박, 교묘한 여론 조작 등을 통해 비밀스럽게 행사하는 영향력)’를 꼽은 책을 읽고 이 소설의 출간을 결심했다고 한다. 과연 한국이 샤프 파워로 무장한 세력의 공격을 막아낼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는 것.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우리는 국익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 힘의 요체는 하이테크 기술력과 사프 파워를 포함하는 강력한 자위력”이라고 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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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고개를 들어 그 덧없는 아름다움에 경탄하라”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일을 꼽으라면 멍하니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보는 걸 빼놓기 어렵다. 책은 쓸데없는 일을 사랑하는 구름 ‘덕후’가 쓴, 구름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하층운, 중층운, 상층운 등 구름의 분류에 따라 정리된 목차만 보면 과학적인 내용만 담겨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구름이 어떻게 생기고 자라나서 비를 내리는지와 구름의 종류별 특징뿐 아니라 구름과 관련된 세계 각지의 고전과 신화, 예술을 망라한다. 적운(뭉게구름)치고는 큰 편이 아닌 1㎦ 부피의 구름에는 2.5t 코끼리 80마리 정도 무게의 물방울이 담겨 있다고 한다. 비구름이 싫어도 구름이 바닷물을 담수화하지 않으면 우리가 마실 수 있는 물이 사라진다는 것 정도는 알아둬야 한다. 호주 퀸즐랜드 북부 버크타운 일대에서는 길이가 1000km나 되는 두루마리 형태의 장엄한 층적운이 생긴다. ‘모닝 글로리’라는 이름이 붙은 이 구름을 보기 위해 봄이면 수천 km 밖에서 활공기 조종사들이 모여든다고 한다. ‘무해한 덕질의 끝판왕’ 같은 이 책에는 구름과 관련된 온갖 얘기가 나온다. 적란운을 만나 1만4300m 고도에서 비상 탈출한 뒤 난류 속을 40분 동안 떠다닌 전투기 조종사, 베트남전쟁 당시 적의 이동을 힘들게 하려고 미군이 비밀리에 실시한 인공 강우 등이다. “구름계의 다스베이더, 적란운” 등 익살스러운 표현이 책장이 술술 넘어가게 만든다. 영국에 사는 저자는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했고, 대학 기상학과 방문연구원을 지냈으며, 왕립기상학회로부터 상을 받았다. 영국에서는 뜬구름 잡는 이 책을 기다리던 사람이 많았나 보다. 출판사 27곳이 이 책의 출판을 거절했지만 막상 출간되자 20만 부 넘게 팔렸다. 저자가 2005년 만든 ‘구름감상협회’는 120개국에 5만여 명의 회원이 있다고 한다. 협회 선언문은 촉구한다. “우리는 ‘파란하늘주의’를 만날 때마다 맞서 싸울 것을 맹세한다.…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 그 덧없는 아름다움에 경탄하라. 그리고 구름 위에 머리를 두고 사는 듯, 공상을 즐기며 인생을 살라.”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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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조종엽] 듣고팠을 말 “다녀왔습니다”…비극 애도 콘텐츠 나왔으면

    폭설로 길이 끊어진 산사에서 홀로 굶어 죽은 다섯 살 아이를 관음보살이 데려갔다고 믿는 것은 슬픔을 어찌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흉년 때 자취를 감춘 동네 사람이 원래 살던 하늘나라로 돌아갔다고 믿는 건 죄책감을 어찌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전쟁에 끌려나가 희생된 자식이 큰 구렁이가 돼 집에 돌아왔다고 믿는 건 그리움을 어찌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전설과 민담이 애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전통 시대 공동체는 상상의 이야기를 빌려 비극을 애도하며 끊긴 길을 이었다. 현대에서 이 같은 기능을 맡는 것은 아마 영화나 소설 같은 문화 콘텐츠일 것이다. 최근 국내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초자연적 힘에 의해 벌어지는 재난을 막으려 애쓰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신화적으로 그렸다. 전작들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진 외로움과 그리움을 그려왔던 감독은 이번에는 이격의 거리를 이승과 저승으로까지 벌렸다. ‘사람의 마음의 무게가 사라져서 재난이 생기는 곳’을 찾아 단속하는 이야기를 통해 영화는 그저 여느 날과 같이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문을 나선 뒤 불의의 재난 탓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던 이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다. 그리고 손도 쓰지 못하고 가족과 지인, 공동체의 구성원을 잃었다는 괴로움에 시달렸을 관객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남녀 주인공의 감정선이 다소 뜬금없긴 하지만 감독 특유의 아름다운 작화와 줄거리가 호평을 얻으며 일본에서 관객이 1000만 명 넘게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개봉 6일 만인 13일 관객이 100만 명을 넘어섰다. 반면 한국의 대중문화 콘텐츠는 공동체의 애도와 치유 기능을 거의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지진이 잦은 일본만큼은 아니어도 우리 역시 비극적 대형 사고가 잦았다. 그러나 이를 소재로 한 대중문화 콘텐츠는 드물다.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개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어쩌면 실제 일어난 비극적 사고를 대중문화 콘텐츠로 다뤄서는 안 된다는 금기 같은 것이 작동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같은 금기는 일상 속에도 암암리에 있다. 웬만큼 친한 사람이 아니면 참사를 화제로 꺼내지 않고, 어쩌다 얘기가 나와도 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초면인 사람과 정치 얘기를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나의 애도를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는 탓이다. 참사에서 정치 사회적 맥락을 제거하려는 것은 잘못이지만 순수한 애도의 표현마저 일상에서 꺼릴 정도로 지나치게 정치화되는 것 역시 한국 사회의 고질이라고 본다. 적절히 애도되지 못한 슬픔은 어디선가 곪기 마련이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는 않다. 공동체가 끊어진 길을 잇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상상의 이야기를 통해서라도 아픔을 승화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다녀 왔습니다.’ 비극을 겪은 이들이 너무나도 듣고 싶었을 이 한마디를 대신해주는 영화를 보고 싶다. 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 2023-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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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당신은 ‘나의 실존’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미국 킹스턴에 사는 니컬러스는 어린 시절 방치와 학대를 겪었다. 열한 살 무렵 갑자기 몸 전체가 완전히 분리되는 느낌을 받았고, 열두 살에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고 갑자기 “꿈속을 헤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후 수년 동안 주변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과 몸까지 모든 것을 비현실적으로 느끼는 날들이 이어졌다. 스스로를 낯설게 느끼는 이인증(離人症)이 발병한 것. 니컬러스는 늘 불안에 사로잡혔고, 깨어 있는 동안에는 두려움에 혼자 있지도 못했다. 주먹을 쥐었다 펴는 작은 일마저도 자신이 행동하는 게 아니라고 느꼈다. 신경정신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인증 환자들은 실제로 불쾌한 자극에 대한 자율 반응을 측정했을 때 마치 ‘스위치가 꺼진 것처럼’ 나타난다고 한다. 이는 ‘자아’를 만드는 데 신체적 감각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과학기술 주간지 뉴사이언티스트의 부편집장 출신 과학저널리스트가 자아 인지에 문제가 생기는 질병과 정신적 장애들을 일별하며 ‘자아란 무엇인가’를 탐구한 책이다. ‘코타르 증후군’은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망상이다. 환자들은 엄연히 존재하는 신체 일부가 사라졌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의사가 “(나와 대화를 나누는) 당신의 정신은 분명히 살아 있다”고 설득하면 “내 정신은 살아 있지만 뇌는 죽었다”고 답하는 환자도 있다. 심하면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저자가 만난 프랑스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말한다. “이미 죽었는데(죽었다고 생각하는데) 더 이상 어떻게 죽겠어요.” 신체통합정체성장애(BIID)는 팔다리 등 자신의 몸 일부가 자기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장애다. 자기 몸이 아니라고 느끼는 부위를 절단하는 끔찍한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장애는 뇌가 발달하는 도중 팔다리 등이 뇌에 적절하게 인지되지 않아 생기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고로 절단된 신체 부위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뇌가 오해하는 환각지(幻覺肢)와는 반대인 셈이다. 저자는 철학자 토마스 메칭거의 글을 인용해 “내 몸과 감각들, 그리고 다양한 부위를 갖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된다는 느낌의 핵심”이라고 했다. 책은 이 밖에도 ‘서사적 자아’를 망가뜨리는 알츠하이머병, 자아를 조각조각 해체해 버리는 조현병, 또 하나의 몸이 있다는 느낌과 관련된 환각 ‘도플갱어 효과’, 무아지경을 겪는다는 ‘황홀경 간질(ecstatic epilepsy)’ 등을 차례로 조명하면서 ‘나’를 찾아 나간다. 저자는 “자아는 놀라우리만치 탄탄하면서도 무서울 정도로 연약하다”고 했다. 소개되는 신경심리학적 질병이 흥미롭지만 질병과 자아의 실체 및 유무에 대한 시사점을 연결하려는 저자의 시도가 매번 성공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생생한 여러 사례를 바탕으로 철학과 뇌과학을 오가는 스토리텔링 솜씨가 대단하다. 오늘날에도 여전한 난제인 ‘자아’의 실체에 대한 질문으로 독자를 이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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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오늘날의 전쟁 있게 한 화력무기의 모든 것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다룬 영상 콘텐츠에서, 대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적선으로 날아간 뒤 다시 폭발하는 장면은 사실은 거짓이다. 당시 포탄은 대장군전(大將軍箭·나무와 철로 만든 천자총통용 화살)을 비롯한 고체탄이었다. 탄의 운동에너지로 적선을 파괴했던 것. 서양에서도 고체탄은 성벽을 부수는 공성전과 목선을 격파하는 해상전에서 필수로 쓰였다. 14세기 공성포(攻城砲)의 등장 당시부터 ‘날아간 뒤 폭발하는’ 포탄의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이 같은 폭발탄이 서양에서 널리 보급된 것은 19세기 초가 되어서다. 화약을 넣은 포탄이 대포 안에서 찌그러지거나 폭발하는 위험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발사된 뒤 목표물 위에서 내부의 화약이 폭발하면 작은 철탄들이 적에게 퍼부어지도록 설계된 폭발탄이 나중에 발명돼 전장(戰場)에서 빠르게 채택됐다. 이 폭발탄은 발명자인 영국군 중위의 이름을 따 ‘슈라프넬’로 불렸다. 전쟁사 전문가인 미국 라이트주립대 역사학과 교수가 공성포의 등장부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함과 항공기의 활약까지 화기(火器)의 역사를 다뤘다. 14세기 들어 나타난 휴대용 화기는 ‘손 대포(hand cannon)’로 불렸다. 크기만 줄었을 뿐 작동 방식은 대포와 같았다. 발사 자세가 어색하고 총열이 무거워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다. 서구 역사상 최초로 제식화된 보병 화기는 15세기 등장한 아쿼버스와 머스킷 총이다. 이 총들은 총가(銃架·총 받침대)가 정교해졌고, 개머리판이 등장해 조준이 비교적 정확해졌으며, 화승(火繩)을 사용해 점화와 동시에 목표물을 겨냥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총기와 비교하면 살상력과 정확도가 턱없이 떨어지지만 밀집 대형과 근거리 전투가 기본이던 당시에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 같은 총기를 운용하기 위해 군대는 상당한 수준의 조직과 협력, 전문성을 발전시켰다. 화약이 서양 최초의 현대식 육군을 창조한 셈이다. 충실한 내용이 밀리터리 마니아들의 눈길을 끌 만하다. 저자는 “전쟁이 오늘날의 국가를 만들었다면, 오늘날의 전쟁을 만든 것은 화기였다”고 강조했다. 원제 ‘FIREPOWER: How Weapons Shaped Warfare’.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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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피란 우크라 소녀 “삶의 매분 매초에 매달리고 있다”

    “해가 진다. 우린 평화를 원한다. 예전에 가졌던 꿈이나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뭐였는지 우리는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예전에 했던 말다툼이나 골머리를 썩이던 문제들도 기억나지 않는다. 과거에 품었던 그런 고민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 전쟁 중엔 단 하나의 목표만이 남는다. 살아남는 것. 힘들고 어려웠던 모든 일이 사소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이 걱정되고, 일상은 ‘쾅’ 하는 소리에 망가진다.” 사고가 성숙해 보이는 이 글은 12세 우크라이나 소녀가 일기장에 쓴 것이다. 전쟁은 어린이를 빨리 어른으로 만든다. 책은 러시아 국경과 가까운 우크라이나 제2도시 하르키우에서 할머니와 살다가 전란을 피해 탈출한 소녀가 쓴 약 두 달간의 일기를 담고 있다.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생일 파티와 볼링 게임에 활짝 웃던, 하르키우의 아름다운 공원과 북동쪽 외곽 멋진 동네에 있는 자신의 집을 사랑하던 평범한 소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 뛰어다니며 노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교한 뒤 숙제를 하고 목욕을 하고 TV를 보고 편안한 잠에 빠지던 소녀는 어느 날 새벽 ‘쨍쨍’ 울리는 금속음에 잠이 깬다. 러시아의 폭격이었다. 급히 지하실로 대피하던 소녀는 두려움에 공황발작을 겪는다. 할머니가 꼭 안아주지만 공포는 가시지 않는다. 이튿날 할머니와 소녀는 정든 집을 떠나 피란을 시작한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학교 코앞에서 탱크가 포탄을 쏴대고, 이웃 동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마음을 움켜쥔 공포를 억지로 숨긴 채, 나와 거리가 먼 곳에 로켓이 떨어지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신에게 평화를 달라고 요구하며 하루 종일 기도한다. 삶의 매분, 매초에 절실하게 매달린다.” 그래도 소녀는 소녀다. 서쪽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하르키우 출신 동갑내기 친구 리라를 만난 저자는 반나절 동안 즐겁게 떠들며 지낸다. “리라는 창밖의 갈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얘기해서 날 웃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다음에 뭘 해야 할지를 걱정하지만, 그저 갈대에 감탄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다. 하하!” 소녀는 피란길에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담담히 적어 나간다. 소녀의 깨달음은 명확하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니 당장 한 시간 안에, 아니 심지어 1분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전쟁이 어떤 건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 … 전쟁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으니까.” 다행히도 무사히 탈출한 저자는 헝가리를 거쳐 할머니와 함께 아일랜드 더블린에 머물고 있지만 고향에서 벌어진 일을 뉴스로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 ‘아몬드’를 쓴 손원평 소설가가 번역했다. 손 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전쟁이 어떤 것인지 몰라야 하는 연약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아이들)을 위해, 역설적으로 우리는 전쟁이 어떤 것인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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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들은 몰라요”…12세 우크라 소녀가 본 전쟁 연대기

    “해가 진다. 우린 평화를 원한다. 예전에 가졌던 꿈이나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뭐였는지 우리는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예전에 했던 말다툼이나 골머리를 썩던 문제들도 기억나지 않는다. 과거에 품었던 그런 고민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 전쟁 중엔 단 하나의 목표만이 남는다. 살아남는 것. 힘들고 어려웠던 모든 일이 사소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이 걱정되고, 일상은 ‘쾅’ 하는 소리에 망가진다.” 사고가 성숙해 보이는 이 글은 12세 우크라이나 소녀가 일기장에 쓴 것이다. 전쟁은 어린이를 빨리 어른으로 만든다. 책은 러시아 국경과 가까운 우크라이나 제2도시 하르키우에서 할머니와 살다가 전란을 피해 탈출한 소녀가 쓴 약 두 달간의 일기를 담고 있다.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생일 파티와 볼링 게임에 활짝 웃던, 하르키우의 아름다운 공원과 북동쪽 외곽 멋진 동네에 있는 자신의 집을 사랑하던 평범한 소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 뛰어다니며 노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교한 뒤 숙제를 하고 목욕을 하고 TV를 보고 편안한 잠에 빠지던 소녀는 어느 날 새벽 ‘쨍쨍’ 울리는 금속음에 잠이 깬다. 러시아의 폭격이었다. 급히 지하실로 대피하던 소녀는 두려움에 공황발작을 겪는다. 할머니가 꼭 안아주지만 공포는 가시지 않는다. 이튿날 할머니와 소녀는 정든 집을 떠나 피란을 시작한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학교 코앞에서 탱크가 포탄을 쏴대고, 이웃 동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마음을 움켜쥔 공포를 억지로 숨긴 채, 나와 거리가 먼 곳에 로켓이 떨어지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신에게 평화를 달라고 요구하며 하루 종일 기도한다. 삶의 매분, 매초에 절실하게 매달린다.” 그래도 소녀는 소녀다. 서쪽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하르키우 출신 동갑내기 친구 리라를 만난 저자는 반나절 동안 즐겁게 떠들며 지낸다. “리라는 창밖의 갈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얘기해서 날 웃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다음에 뭘 해야 할지를 걱정하지만, 그저 갈대에 감탄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다. 하하!” 소녀는 피란길에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담담히 적어 나간다. 소녀의 깨달음은 명확하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니 당장 한 시간 안에, 아니 심지어 1분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전쟁이 어떤 건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전쟁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으니까.” 다행히도 무사히 탈출한 저자는 헝가리를 거쳐 할머니와 함께 아일랜드 더블린에 머물고 있지만 고향에서 벌어진 일을 뉴스로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 “매일 밤 자기 전에 나는 우크라이나와 하르키우의 뉴스를 찾아본다. 미사일과 로켓은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 한다. 나의 가족들은 지하 대피소에 숨어 있다. 그 생각은 나를 끔찍하고 두렵게 한다.”‘아몬드’를 쓴 손원평 소설가가 번역했다. 손 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전쟁이 어떤 것인지 몰라야 하는 연약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아이들)을 위해, 역설적으로 우리는 전쟁이 어떤 것인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했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 2023-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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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조종엽]돌아온 ‘슬램덩크’, 아재의 전성기는 내일이네

    주말 저녁 40대 중반쯤 돼 보이는 아재들이 각자 아이의 손을 잡고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상영되는 극장에 앉아 있네. 30년 전 당신은 영화 속 송태섭 같았을까. 포기를 모르는 ‘불꽃 남자 정대만’이 되고 싶었을까. 포털사이트에 실린 리뷰가 눈길을 끄네. ‘너희들은 안 늙었구나’. 맞아, 당신은 늙었네. 군데군데 흰머리도 나기 시작했네. 만화 슬램덩크 1권이 발매된 1992년에 중학교 1, 2학년이었다면 마지막 권이 나온 1996년에는 고등학교 2, 3학년이었을 것이네. 청소년기를 통째로 슬램덩크와 함께했겠네. 당신은 해마다 80만 명이 태어나던 시절 세상에 나왔네. ‘국민학교’ 수업은 오전반·오후반으로 나눠서 하고, 조회 시간 운동장에 우르르 나가다가 누가 크게 다쳐도 잘 모르던 시절이었네. 연탄불에 가래떡 구워 먹던 추억을 가진 마지막 세대이기도 하고, 어렸을 적 배를 곯았던 부모님 슬하에서 ‘제 힘으로 벌어 먹고사는 것이 제일’이라고 배운 세대이기도 하네. ‘쌍싸대기’가 난무하는 교실에서 칠판 지우개가 날아올까 눈치를 살피며 몰래 책상 아래로 슬램덩크를 돌려 읽던 당신. 만화 속에는 지극히 좋아하게 된 일에 몰두하는 아이들의 순수한 열정이 담겨 있었네. ‘아, 그래도 되는 거구나….’ 농구 붐이었네. 실내 체육관은 보기 힘들었고, 모래가 풀풀 날리는 학교 운동장은 미어터졌네. 어머니를 졸라 산 짝퉁 리복 농구화에 혹시 진짜 공기가 들어가지나 않을까 농구공 모양을 눌러보던 당신. 하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반짝일 수 있었던 시절. 하지만 당신도 아는 것처럼 삶은 실은 ‘안경 선배’, 부상한 강백호를 교체해 들어갔지만 플레이하는 모습은 영화에 한 장면도 안 나오는 안경 선배. 아니면 산왕전 이후의 ‘내리 3연패’(원래 ‘3회전 패배’가 맞지만 초판의 이 오역이 더 마음에 드네) 같은 것. 영화는 관객이 300만 명 넘게 들었고, 만화 ‘슬램덩크 신장재편판’은 100만 부가 넘게 팔렸네. 이제 만화 전권을 한 번에 사는 정도의 사치는 부릴 수 있겠지. 한정판 굿즈를 사려고 줄을 서서 기다릴 수도 있지. 그래도 ‘아재들의 반란…’ 같은 말은 나오지 않네. 아재들은 반란을 일으키기에는 문화계에서 너무나도 미약한 존재들이네. 깨끗하던 당신의 건강검진 결과지에는 이제 줄글이 쓰여 있네. 강백호처럼 한 경기의 승리를 위해 선수 생명을 걸기에는 몸이 너무 무겁지. 루스볼을 잡으러 벤치로 몸을 날리다가 다쳐서 쉬면 애들 학원비는 어떻게 내나. 영화가 끝나가네. 어디선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오네. 당신, 마스크 벗고 다니다가 감기라도 들었나 보네. 감독의 영화잡지 인터뷰가 떠오르네. “코트 위 강자들의 태연한 얼굴 뒤에도 각각의 삶이 있고 그곳까지 가는 길이 있다. 그건 객석에 앉아 있는 분들도 똑같아서 각자 자신이 주인공인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조금은 힘이 나지 않을까 한다.” 당신의 아이는 슬램덩크를 처음 보던 당신을 닮았네. 전국 제패를 못 하면 어떤가, 기적 같은 역전승이 없으면 또 어떤가. 당신의 전성기는 아직 오직 않았네 ‘no. 1 가드’, 오늘도 왼손은 거들 뿐.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 2023-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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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호기심을 소중히, 겉모습은 하찮게

    물을 내뿜으며 빙빙 도는 스프링클러를 물속에 집어넣고 물을 내뿜는 대신 빨아들이게 하면 어떻게 될까? 역방향으로 회전할까? 아니면 같은 방향으로? 답은 ‘움직이지 않는다’이다. 쉬운 것 같아도 과거 수준급 학자들도 꽤 의견이 갈렸던 문제라고 한다. 미국 프린스턴대의 강의조교 시절 리처드 파인먼(1918∼1988)은 생각만으로는 결론을 못 내리자 슬쩍 실험을 해보려다가 한 연구소 실험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출입금지를 당했다. ‘괴짜 천재’ 파인먼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다. 양자역학과 전자기학을 통합하는 이론을 완성했고, 아인슈타인과 함께 20세기의 대표적 물리학자로 꼽히는 파인먼의 삶을 다룬 평전이다. 파인먼의 어린 시절 아버지 멜빌은 ‘호기심을 소중히, 겉모습은 하찮게’ 여기라고 가르쳤다. 어려운 용어나 포장에는 현혹되지 말라고 당부했다. “모든 언어로 저 새의 이름을 말할 수 있다고 해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거란다. …저 새를 관찰하고 새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살펴보자는 거야.” 이런 가르침 속에서 파인먼은 편견 없이 지식을 추구하는 법을 체득하며 자라났다. 파인먼은 독창적이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난제를 단칼에 해결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위해 소집된 물리학자들이 한 달 동안 쩔쩔 매던 문제를 단숨에 풀었다는 얘기가 유명하다. 말년에 희소암을 앓던 파인먼은 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발 사고의 조사위원을 맡아 원인 규명에 애쓰기도 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사고 원인이 된 부품(오링)에 대한 증언을 회피하자, 워싱턴 관공서 주변 철물점에서 구한 재료로 오링의 탄성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TV 카메라 앞에서 실험해 보이기도 했다.‘카오스’ ‘인포메이션’ 등을 낸 저명 과학 저술가인 저자는 “파인먼은 겉치레와 인습, 돌팔이, 위선을 증오했고 벌거벗은 임금님을 본 소년이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양자역학 등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 부분을 건너뛰다 보면 ‘천재’라는 말 뒤에 가려진 파인먼의 진짜 비범함과 인간적 면모가 보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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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日서 된장은 ‘고려장’이라 불렸다

    오래전 일본에서는 된장을 고려장(高麗醬)이라고 불렀다. 된장을 가리키는 일본어 ‘미소(味噌)’가 한국어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660년 나당연합군의 침입을 받고 백제가 멸망하자 많은 백제인이 일본 열도로 이주했는데, 이주자 가운데 된장을 담그는 장인이 많았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한반도의 정치적 격변이 일본의 식문화에 영향을 준 셈이다. 일본에서 된장은 처음에는 음식에 발라 먹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러 미소된장국이 등장했고 에도 시대 들어 서민에게도 보편화됐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10년 고구려 승려 담징이 일본에 맷돌을 들여와 곡류로 만드는 가루음식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 전까지 일본에서는 쌀과 같은 곡물은 모두 알곡으로 먹었다. 홋카이도교육대 교수를 지낸 역사학자인 저자가 일본의 음식문화사를 정리했다. 스시와 덴푸라, 카레라이스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여러 일본 음식의 역사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쌀쌀한 날이면 찾게 되는 우동은 일본과 당나라의 교류 과정에서 출현했다. 일본은 630∼894년 190여 차례에 걸쳐 외교 사절인 견당사를 파견했다. 우동은 원래 견당사가 들여온 ‘훈둔(混沌·혼돈)’이라는 중국식 만둣국이었다고 한다. 밀가루 경단에 콩이나 팥소를 넣어 끓인 것으로 끓어오르는 경단이 빙글빙글 돌며 정신이 없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음식이므로 삼수변(氵)이 먹을식(飠) 변으로 바뀌면서 ‘곤통(餛飩·혼돈)’이라고 부르다가, 뜨겁게 먹는다는 뜻으로 ‘온통(溫飩·온돈)’이 됐고, 다시 지금의 ‘우동(饂飩·온돈)’으로 변했다. 료칸 투숙의 또 다른 즐거움인 가이세키 요리는 선승에 의해 차와 함께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원래는 국 하나와 반찬 2, 3개로 구성된 소박한 요리였다. 그러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았던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1568∼1603)에 이르러 풍성한 식재료를 아낌없이 차린 다이묘의 요리로 바뀌었다. 일본 여행 전 읽으면 식사 때 화제가 풍성해질 것 같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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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조종엽]독립운동가 서훈 ‘큰 틀’ 봐야 대한민국 정체성 바로 선다

    윤석열 대통령은 27일 국가보훈처로부터 업무계획을 보고받은 뒤 “보훈 대상자를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려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확실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가의 서훈에 대해서도 재검토해야 할 문제가 여럿 있다. 8차례 기각된 동농 김가진(1846∼1922)의 서훈 문제도 그중 하나다. 대동단을 조직한 동농은 1919년 10월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해 불꽃처럼 독립운동을 벌였다. 대동단 활동으로 서훈된 이가 80여 명에 이르지만 총재였던 동농은 아직도 훈장을 못 받았다. 지난해 순국 100주기를 맞아 서훈과 유해 봉환 추진 여론이 형성됐지만 끝내 무산됐다. 보훈처는 기각 사유를 “일제강점 전후 행적 이상(의병 탄압, 수작(受爵·작위를 받음), 강제병합 찬양 논란 등)과 독립운동에 대한 종합적 평가”라고 밝혔다. 하지만 일제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의치(義齒)까지 뽑아 던지고 상하이로 떠난 이에게 남작 작위가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의병 탄압도 그가 아니라 일본군이 벌인 것이라는 연구가 있다. 그의 서훈에 반대하는 의견이 있지만 동농이 독립운동에 뛰어들기 이전 행적을 문제 삼는 건 수많은 다른 서훈자들과 형평에 맞지 않다. 무엇보다 동농이 숨지자 임시정부는 정부장, 오늘날로 말하자면 국장을 치렀다.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 나라라면 당대인들의 평가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죽산 조봉암(1898∼1959)의 서훈 문제다. 독립운동가로 7년 옥고를 치렀고,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이끈 죽산은 대한민국이 평등한 나라로 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는 역사학자들이 적지 않다. 죽산은 간첩 누명을 쓰고 살해된 희생자이기도 하다. 죽산을 제대로 서훈해야 역사가 바로잡히고 나라의 정체성이 뚜렷해진다. 보훈처가 죽산의 서훈을 거부하는 건 “인천 서경정에 사는 조봉암 씨가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는 1941년 매일신보 단신 기사를 근거로 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의 기사를 그대로 믿기도 어렵거니와 모진 고문과 추위로 손가락 7개를 잃고 출소한 뒤 생계를 위해 비강(왕겨) 조합장으로 일하던 그가 일제의 강요를 거부했어야 했다는 건 너무 가혹한 주장이 아닐까. 이런 식으로 작은 흠을 이 잡듯이 뒤지자면 만해 한용운 선생(1879∼1944)에게 1962년 주어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만해는 1941년 8월 이른바 ‘대동아전쟁’의 지지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열린 임전대책협의회에 참석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사회주의자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을 확대하며 2005년 건국훈장을 받은 몽양 여운형(1886∼1947) 역시 행적 관련 논란이 있다. 시대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고뇌했던 거인들일수록 숨을 곳 없는 일제 치하에서 더 많은 풍파를 겪었기 마련이다. 이들의 생애를 큰 틀에서 평가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이라는 거목의 뿌리를 스스로 앙상하게 만들게 된다. 거목의 정체성을 고사리를 캐 먹다 굶어 죽은 백이, 숙제에게서만 찾을 것인가.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 202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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