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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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논설위원입니다.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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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3~2024-05-03
칼럼45%
문학/출판40%
문화 일반3%
음악3%
인사일반3%
언론3%
미술3%
  • [오늘과 내일/조종엽]한국인이 제일 어려워하는 일 ‘대화와 타협’

    분열하고, 타협하지 못하는 건 정말 한국인의 특성일까. 악의적 편견에 불과하지만 새삼 마음이 무겁다. 최근 일련의 뉴스에서 우리 사회가 가진 대화와 타협의 역량에 일찌감치 한계가 드러나는 일이 잦아서다. 침수 문제가 불거지고도 24년 동안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처지로 방치된 국보 반구대 암각화 문제만 해도 그렇다. 1970년 발견된 반구대 암각화는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선사 유적이지만 앞서 건설된 울산 사연댐 탓에 침수를 반복하며 훼손돼 왔다. 학계가 대책 마련을 촉구한 2000년 이후에도 원형 보존을 둘러싼 이견, 예산 문제 등에 더해 대구·경북 지자체 간의 물 갈등까지 엮이면서 해결책을 내지 못했다. 사연댐의 수위를 낮추면 지자체 간에 도미노식으로 식수를 끌어와야 하는데 2009년 발암물질 낙동강 유출 사태로 대구와 구미가 물 분쟁을 벌이는 가운데 대책이 함께 표류했다. 정치권이 개입한 가변형 임시 물막이 설치는 수리 전문가들의 반대에도 추진했다가 실패하면서 아까운 시간만 버렸다. 최근 환경부가 사연댐에 수문을 설치하기로 했지만 식수 갈등은 여전히 잠재해 있는 실정이다.‘힘 대 힘’ 갈등의 패자는 국민 재정안정론과 소득보장론이 팽팽한 국민연금 개혁 논의는 사실과 의견이 뒤섞여 혼란스럽다. 기금의 고갈 시기나 이후 가입자에게 약속한 급여를 지급하는 데 필요한 돈은 계산하면 나온다. 비교적 정해진 미래에 가깝다. 반면 고갈 뒤 부족액을 모두 가입자의 보험료로 충당할지, 재정을 투입할지, 자산소득에도 보험료를 부과할지 등은 가치 판단과 의사 결정의 영역이다. 두 영역이 뒤섞인 채 전문가들이 다투다가 지난해 8월엔 재정계산위원 2명이 사퇴하기까지 했다. 최근 일단락된 국회 공론화위 시민대표단 숙의토론회는 새로운 시도였음엔 틀림없다. 그러나 미래세대에 대한 대표성이 약한 시민 500명을 ‘대표단’이라고 부르기도, 이들 대상 설문조사 결과가 온전한 민의라고 보기도 어렵다. 토론회에 관련 참고 자료가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다는 등의 뒷말까지 나오고 있다. 영국은 연금개혁 당시 전문가 보고서를 가지고 여러 차례 간담회와 많은 국민이 참여하는 토론회를 거친 뒤, 정리된 안을 가지고 다시 전국 각지를 돌며 간담회와 토론회를 열어 개혁안을 마련했다고 한다. 갈피를 못 잡는 의대 증원 문제는 갈등 관리 실패의 전범처럼 보인다. 지난해 정부와 대한의사협회의 대화는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평행선을 그렸다. 의정 대화를 사회적 협의체로 끌고 가는 등 새로운 방식의 공론화가 필요했지만 정부는 총선을 두 달 앞두고 ‘2000명 증원’을 전격 발표하면서 갈등을 폭발시켰다. 협상 상대에 대한 상호 존중도 찾기 어렵다. 의사 측은 시종일관 집단행동을 통해 힘으로 정부를 꺾을 심산이다.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더니 ‘원점 재검토’만 되풀이하며 의료개혁특위 참여마저 거부한다. 이런 전개에선 누가 이기건 국민은 패자가 될 공산이 크다.타자 입장 생각 않으면 함께 길 잃을 것 “한국인은 너무 극단적이다. ‘끝장을 보자’ ‘너 죽고 나 죽자’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그래서 너무 무섭다.” 양서를 꾸준히 내 존경받았던 한 출판계 어른이 작고 전 사석에서 가끔 했던 말이다. 그게 한국인의 민족성이라기보단 격동의 근현대사에서 극단적인 상황을 너무 많이 경험한 탓일 게다. 이젠 사생결단식 소통을 넘어설 법도 한데, 최근 정치의 양극화와 맞물리며 대화와 타협은 더 어려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독일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최근 책 ‘공론장의 새로운 구조변동’에 실린 인터뷰에서 공론장의 포용성을 강조했다. 토의엔 “타자의 관점을 취하고 그의 상황에 서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같은 공동체의 일원임을 잊고 산적한 과제 앞에서 함께 길을 잃을까 두렵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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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콜레라 확산 방지 영웅”… 세계 유일의 韓 중소 백신업체

    “그저 책상 앞에 앉아서 이런 대화를 할 수밖에 없어요. ‘(콜레라 백신을) 아이티로 보낼까요, 시리아로 보낼까요? 아니면 짐바브웨?’”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전한 국경없는의사회 국제의료 코디네이터의 한탄이다. 최근 수년간 아프리카 등에서 콜레라가 대규모로 확산한 가운데 국제 의료구호 단체들이 모진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예방 백신이 극도로 부족한 상황에서 수천 명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지원처 선별을 해야 하는 탓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21년 22만여 명까지 감소했던 세계 콜레라 감염자가 이듬해 47만여 명으로 늘었다. 콜레라는 카리브해 연안과 중동, 남아시아 등에서 급속히 확산했다. 케냐의 소말리아 난민촌 어린이들 사이에서, 내전으로 기반 시설이 파괴돼 강물을 마셔야 하는 시리아에서, 무정부 상태가 된 아이티에서 창궐했다. 특히 최근 2년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맹위를 떨쳐 7개국에서 집계된 것만 4000여 명이 숨졌다. 백신도 동이 났다. 전쟁으로 콜레라 발생 소지가 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공급할 백신마저 없는 실정이다. ▷현재 콜레라 백신을 생산하는 세계에서 하나뿐인 기업이 한국의 유바이오로직스다. 인도의 회사가 한 곳 더 있었는데, 지난해 생산을 중단했다. NYT에 따르면 유바이오로직스는 최근 생산 단계와 성분을 간소화하는 한편 제2공장 가동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올해부터 백신 수천만 회분을 증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유엔의 지원을 받는 국제백신연구소(IVI)의 줄리아 린치 박사는 이 회사를 두고 “(콜레라 대응의) 숨은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뒤늦게 인도와 남아공의 회사 세 곳이 백신 제조에 뛰어들었지만 빨라야 내년 말부터 제품이 나온다. ▷지난해 매출이 약 700억 원인 중소기업 유바이오로직스는 서울대 수의대 출신 백영옥 대표가 2010년 설립했다. 국제백신연구소와 기술이전 계약을 맺은 뒤 2015년 WHO 인증을 받고 이듬해부터 콜레라 백신을 수출하며 자리를 잡았다. 질병 퇴치를 목표로 하는 게이츠재단의 지원금을 받기도 했다. 수출용 코로나19 백신도 개발했고, 해마다 연구개발에 적지 않은 돈을 쓰면서 다른 백신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는 중이라고 한다. ▷수인성 질병인 콜레라는 부유한 나라에선 거의 유행하지 않는다. 빈국의 전염병이다. 최근 극단 기후 탓에 가난한 나라의 국민은 홍수로 상하수도 시설이 파괴되거나 가뭄이 들어 깨끗한 마실 물도 모자란 상황이다. 콜레라 백신은 당분간 공급이 달릴 것으로 전망되지만 글로벌 대형 제약사들은 별 관심이 없다. 개당 수 달러에 이문도 적은 탓이다. 그 결과 콜레라와의 전투에서 승부가 사실상 한국의 한 중소기업에 달린 형국이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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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쌍둥이 버스, 묵언 유세… 위성정당 선거운동 꼼수

    ‘한 당인 듯 한 당 아닌’ 총선 선거운동이 4년 전에 이어 다시금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4·10총선을 앞두고 각각 국민의미래와 더불어민주연합이라는 위성정당을 또 꾸린 탓이다. 공직선거법은 후보자 등이 다른 정당을 위해 선거운동을 하는 걸 금한다. 매수된 후보가 상대 후보를 위해 뛰는 등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다. 한데도 모(母) 정당과 위성정당이 연합해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한 몸처럼 선거운동을 벌이는 장면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4년 전 민주당과 그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은 똑같은 디자인의 선거유세용 ‘쌍둥이 버스’를 운영하다 선관위로부터 시정명령을 받았다. 비례대표 후보자는 기호가 적힌 유세 차량을 사용할 수 없는데, 두 정당의 기호이면서 선거일(4월 15일)을 의미하는 1과 5를 버스에 커다랗게 적는 꼼수를 썼던 것이다. 이번 선거에선 기호를 빼고 쌍둥이 버스를 만들었다. 모 정당과 위성정당의 기호(이번 총선에선 1, 3번)를 나란히 보여주는 수법은 대신 ‘더 몰빵 13 유세단’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요즘 유세 현장에서 국민의힘을 지원하러 나온 국민의미래 비례대표 후보들은 입은 있는데 말은 없다. 어법에도 맞지 않는 “국민 여러분 미래합시다” 등의 문구가 쓰인 손팻말을 든 채 멀뚱히 섰을 뿐이다. 침묵 시위를 벌이는 것도 아니고 묵언 유세다. 물론 선거법 위반을 피하려는 꼼수다. 지난 총선에서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의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 원유철 대표가 당 기호를 가리려고 점퍼를 뒤집어 입거나 가슴에 스티커를 붙였던 것과 비슷한 촌극이 재현되는 모양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위성정당을 직접 홍보할 수 있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못 한다. 한 위원장은 불출마했지만 이 대표는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자 신분이기 때문이다. 4년 전 이해찬 민주당 대표,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의 경우와는 반대다. 그러나 이재명 대표는 최근 공개 석상에서 “더불어민주연합 비례 24번 서승만이었습니다. 24번까진 당선시켜야지요”라고 말했다가 선거법 위반 논란이 일었다. 국민의미래 후보도 ‘불러서는 안 될’ 국민의힘 후보 이름을 연호하다 지적을 받았다. 이 당이나 그 당이나 마음속으론 어차피 한 당이니 헷갈리기도 할 것이다. ▷지난해 7월 헌법재판소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합헌으로 판단하면서 거대 정당의 위성정당 창당을 막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데도 두 거대 정당은 방지책은커녕 또다시 위성정당을 만들고 선거법을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피해가며 양당 체제만 강화하는 중이다. 입법자들이 앞장서 국민과 법을 농락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가 갈수록 우스워지고 있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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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중2 모집책까지 고용한 도박사이트

    온라인 불법 도박 범죄자들은 회원 모집책을 ‘총판’이라고 부른다. 최근 중학교 2학년 학생들마저 총판으로 고용한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5000억 원대 도박사이트를 운영하며 중고교생 12명을 모집책으로 썼다. 도박에 중독된 아이들에게 돈을 주고 친구를 도박에 끌어들이거나 텔레그램 채팅방 등에서 도박사이트를 홍보하도록 했다. 말이 좋아 총판이지 경찰에 붙잡힐 위험을 해외에 있는 총책 대신 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이들을 총알받이로 쓴 것이다. ▷‘산에 가야 범을 잡고, 물에 가야 고기 잡고, 자, 돈 놓고 돈 먹기.’ 교묘한 눈속임으로 행인들의 쌈짓돈을 뜯어내던 과거 야바위꾼도 아이들은 상대하지 않았다. 어른들의 틈을 비집고 아이가 머리를 들이밀면 야바위꾼은 사설(辭說)에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를 끼워 넣었다. 요즘엔 ‘무슨 짓을 저지르든 돈만 벌면 된다’는 사고가 팽배하다 보니 범죄자들이 아이들을 동원해 아이들에게 도박을 권한다. ‘도박으로 한 번에 큰돈을 벌었다’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라고 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범죄자들 탓에 도박이 교실을 좀먹어 들어가고 있다. 청소년 사범, 중독 환자, 상담 수가 모두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아이들은 친구 얘기를 듣고 마음이 동하거나, 공짜 웹툰과 드라마를 보려고 접속한 불법 공유 사이트에서 호기심에 배너 광고를 눌렀다가 도박을 시작하게 된다. 도박에 중독된 아이가 부모님의 지갑에 손을 대거나 절도, 온라인 사기 등 범죄의 길로 빠져드는 사례도 적지 않다. 청소년이 청소년에게 도박비를 고리로 빌려주는 ‘작업 대출’ 생태계까지 있다고 한다. ▷10대 자녀를 뒀다면 아이가 평범한 게임을 하는 건지 도박에 빠진 건지 눈여겨 살펴야 한다. 아이들이 하는 온라인 도박은 카지노처럼 딱 봐도 도박처럼 생긴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사다리 타기나 게임형 도박은 얼핏 봐선 일반 게임 앱과 구별하기 쉽지 않다. 불법 스포츠토토 도박사이트 역시 ‘요즘 아이가 스포츠 경기에 관심이 많구나’ 하고 오해할 수 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불법 도박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다. ▷청소년의 뇌는 어른보다 중독에 더 취약하다. 신경세포가 쉽게 흥분할 뿐 아니라 보상 및 여러 중독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파민이 어른보다 많이 분비된다. 즉석에서 보상이 생기는 도박에 쉽게 빠져드는 이유다. 초중고교의 도박중독 예방 교육은 2022년부터 음주 흡연 마약 등 다른 예방 교육과 함께 의무화됐지만 잘 이뤄지지 않는 실정이라고 한다. 흡연 등의 예방 교육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은 탓이다. 교육이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일도 적지 않다고 한다. 성장기에 도박에 중독되면 나중에 헤어나오기도 힘들다. 학교와 학부모가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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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요논점/조종엽]땜질 처방으론 고갈 못 막아… 낸 만큼 받는 ‘新연금’ 주목

    《최근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연금특위) 공론화위원회가 압축한 두 가지 국민연금 개혁안에선 연금 기금 고갈에 대한 위기의식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론화위는 내는 돈(보험료율)을 현행 소득의 9%에서 13%로 올리고 받는 돈(소득대체율)은 40%에서 50%로 늘리는 ‘1안’과, 내는 돈을 12%로 늘리고 받는 돈은 지금대로 유지하는 ‘2안’을 내놨다. 더 많이 받는 1안은 연금 재정수지가 장기적으로 오히려 나빠진다. 2안 역시 재정 건전성을 담보하기엔 역부족이다. 1, 2안은 각각 기금 고갈 시점을 2055년에서 2062년, 2063년으로 7, 8년 미룰 뿐이다.》국민연금이 미래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일각에선 기금 고갈 이후엔 수급자들에게 줄 보험료를 해마다 가입자들에게 걷는 ‘부과방식’으로 전환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난해 제5차 연금 재정추계에 따르면 부과방식 전환 뒤 현행 소득대체율(40%)을 유지할 때 매년 급여를 충당하는 데 필요한 보험료는 2060년 29.8%, 2080년 34.9%에 이른다. 보험료율이 35%면 월 소득이 300만 원일 때 세금과 다른 보험료를 제외하고 국민연금보험료로만 약 105만 원을 내야 한다는 얘기다. 보험료율을 공론화위 안처럼 3, 4%가 아니라 아예 현행의 두 배인 18%로 대폭 올린다고 가정해도 비슷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기금 고갈 시점은 2080년대로 연기되지만 이후 세대는 여전히 30∼40%의 보험료율을 감당해야 한다. 부과방식으로 연금을 안정적으로 지급하려면 합계출산율이 2명은 돼야 한다. 그래야 뒷세대가 적절한 보험료로 비슷한 인구의 앞세대를 부양할 수 있다. 출산율이 1.8명인 프랑스도 지난해 연금 수급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2년 늦추는 개혁을 단행했다가 전국적인 반대 시위가 벌어지는 등 진통을 겪었다. 하지만 한국은 출산율이 올해 0.7명도 안 될 것으로 전망된다. 앞으로도 극적 상승을 기대하긴 어렵다. 이 같은 문제는 국민연금이 처음부터 앞선 세대가 낸 보험료와 운영수익보다 훨씬 많은 급여를 받도록 설계된 데서 비롯됐다. 개혁이 지연되고 급격한 저출산 고령화의 덫에 빠지면서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보험료율 조정을 뛰어넘는 제도 자체의 근본 개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내후년 이후 출생아들, 낸 연금 절반도 못 받아” 지난달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이강구(47) 신승룡(36) 연구위원이 ‘KDI 포커스’ 보고서를 통해 파격적인 국민연금 개혁안을 내놨다. 기금 고갈 우려가 없는 ‘신(新)연금’을 출범시키자는 제안이다. 핵심은 미래세대도 가입자가 납부한 보험료와 운용수익만큼은 급여로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있다. 이른바 ‘기대수익비 1’의 연금이다. 현 연금의 세대별 기대수익비를 살펴보자. 이번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만 60세가 되는 1964년생 이전 세대는 기대수익비가 ‘2’가 넘는다. 누군가 보험료로 1억 원을 냈고, 그 운용수익이 1억 원이라고 치면, 연금 급여는 4억 원 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연금에 소득재분배 기능이 있지만 고소득자의 기대수익비도 1이 넘는다. 이런 초과 수익은 미래세대가 감당해야 한다. 기대수익비는 점점 하락해 올해 만 20세가 되는 2004년생은 ‘1’까지 떨어진다. 기금 고갈 이후 앞선 세대의 급여를 충당하기 위해 보험료가 급격히 오르는 탓이다. 그래도 이들 세대까진 적어도 낸 돈과 운용수익만큼은 급여로 받을 수 있다. 지금의 어린이와 청소년 세대부턴 기대수익비가 ‘1’ 아래로 떨어진다. 내년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기대수익비가 약 ‘0.5’이고, 이후 아이들은 쭉 ‘0.4’대다. 누군가 낸 보험료와 운용수익이 6억 원이라고 칠 때 급여는 3억 원도 못 받는다는 뜻이다. 미래세대가 이런 구조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기적적인 출산율 회복이 없다면 국민연금은 언젠가 파국을 맞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한편에선 베이비붐 세대의 기대수익비가 ‘2’에 가까운 건 잘못이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이들은 부모를 봉양했으면서도 자식으로부턴 부양을 기대하기 어려운 세대이고, 빈곤율도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기초연금을 개혁해 대응할 문제라는 의견이 나온다.● “적립된 만큼 가져가는 DC형 연금 필요” ‘기대수익비 1’의 신연금을 만들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줄 돈을 미리 정해 놓지 말고 받을 시점에 납부한 보험료와 운용수익만큼만 급여로 지급하는 것이다. 이를 확정기여형(DC)이라고 한다. 현 연금은 연금 가입 이력 등으로 나중에 받을 급여가 미리 정해지는 확정급여형(DB)이다. 그러나 전체 연금 차원에선 DB형은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어려운 구조다. 수십 년 뒤 인구와 경제 환경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연금 재정을 5년마다 새로 추계함에도 매번 재정수지 전망이 악화하는 것도 그 탓이다. KDI 연구진은 신연금은 수급 시작 시점에 해당 세대의 기대여명에 따라 급여 수준을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적립된 만큼만 가져가도록 하면 기금은 이론적으로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다.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은 설계하기 나름이다. 연구진은 “보험료율을 15.5% 안팎으로 하면 2006년생부터 현행과 같은 소득대체율 40%의 급여 수준을 보장할 수 있다”고 봤다. 둘째, 빚이 쌓여 가는 현 연금과 단절하는 일이다. 국민연금 기금적립금은 지난해 말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에 이르는 1036조 원으로 커졌지만 현 가입자에게 약속한 급여를 지급하기에도 부족하다. 현 연금이 당장 문을 닫고, 추가 가입도 납부도 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2045년까지만 약속한 급여를 줄 수 있다. 이듬해부터 모든 가입자가 사망할 때까지 줘야 할 연금액(미적립 충당금)이 올해 가치로 환산해 609조 원(GDP의 26.9%)에 이르지만 이 돈은 없다. 기존 가입자가 보험료를 계속 내도록 할 경우엔 미적립 충당금의 규모가 더욱 커진다. 줘야 할 돈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전영준 한양대 경제금융대 교수는 이 ‘암묵적 부채’의 규모가 지난해 가치 기준 1825조 원에 이른다고 최근 연금개혁 세미나에서 밝혔다. KDI 보고서는 현 연금은 계정을 분리하고 추가 납부를 중단한 뒤 국가 일반재정을 투입해 미적립 부채를 충당하자고 제안했다. 연구진은 “기금운용수익을 5%로 잡으면 해마다 30조 원씩 투입해도 600조 원의 뭉칫돈을 넣은 것과 같은 효과가 난다”며 “당장 재정을 투입해야 기대수익비가 상대적으로 큰 현세대도 미래세대의 부담을 나눌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고갈 이후 위험 과장’ vs ‘낙관 기대 안 돼’ 신연금 구상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다.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신연금은 공적연금의 가치인 ‘세대 간 연대’를 단절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며 “최저보장 연금에 대한 고민도 엿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강구 연구위원은 “신연금도 개인 계좌가 아니라 연령이 같거나 비슷한 집단(코호트)을 묶어 지금과 비슷한 방식으로 세대 내에서 소득을 재분배할 수 있다”며 “현 세대 저소득층의 부양 부담을 인구도 적은 미래세대에 떠넘기는 건 옳지 않다”고 했다. 정부 재정을 신연금이 아니라 현 연금에 투입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남찬섭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베이비붐 세대가 지나간 뒤 2070년대가 되면 인구구조가 안정화되고 그동안 출산율이 오를 수도 있다”며 “현 연금에 재정을 투입해 저소득 가입자와 영세사업장을 지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기금 고갈 이후의 위험이 과장됐다는 분석도 있다. 김연명 중앙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2050년대 이후 아이들이 줄어들면 교육비 지출을 연금 기금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KDI 연구진은 “최근 25년 동안 경제성장률과 출산율이 계속 떨어지고 기대여명은 길어졌는데, 낙관적 기대를 바탕으로 연금을 개혁해선 안 된다. 신연금 개혁을 하지 않을 땐 현 연금에 투입해야 할 재정 규모가 609조 원보다 더욱 커질 것”이라는 입장이다. 현 국민연금의 미적립 부채 규모가 커 해결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연금이 미래로 가는 길은 지금도 계속 좁아지는 중이다. 지난 정부가 개혁의 골든타임을 흘려보낸 사이 연금 재정의 장기 건전성은 더욱 나빠졌다. 신연금 제안은 우리 연금이 그나마 ‘젊은 연금’이어서 가능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금부터 5년만 지나도 현 연금의 미적립 충당금은 869조 원 이상으로 늘어난다. 이강구, 신승룡 연구위원은 “최소한 미래세대가 기성세대의 노후 보장을 위해 수용하기 어려울 정도의 부담을 져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해소해야 보험료도 인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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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이른바 파우치, 외국회사 그 뭐 쪼만한 백”

    “이른바 파우치, 외국 회사 그 뭐 쪼만한 백이죠”, “방문자가 김건희 여사를 만나서 앞에 놓고 가는 영상이…”. KBS 박장범 앵커가 7일 방영된 윤석열 대통령과의 특별대담에서 부인 김건희 여사의 디올 명품 가방 수수 논란에 대해 물으며 한 말이다. 자막은 “최근 김건희 여사의 ‘파우치 논란’”이라고 달렸다. 이를 놓고 일부 시청자 사이에서는 ‘명품 백을 왜 명품 백이라고 일컫지 못했느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먼저 ‘조그만’을 뜻하는 “쪼만한”. 김 여사가 받은 가방의 크기는 작은 것일까 큰 것일까. 한 손으로 잡을 만한 크기이지만 보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한데도 진행자가 굳이 질문에서 가방이 작다고 강조할 이유가 있는지…. 원래 엄밀함을 요구하는 보도에선 다수가 상식 선에서 납득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크다’ ‘작다’ 같은 형용사엔 ‘…보다’를 붙여 다른 대상과 비교하는 것이 원칙에 맞다. 적어도 ‘비교적’ 등으로 수식해 절대적이지 않음을 드러낸다. 객관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가방이 프랑스 명품 브랜드 디올의 제품이라는 건 빼놓은 채 그냥 ‘외국 회사’라고 한 것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디올’은 값싼 물건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중요 팩트다. 정식 제품명은 ‘송아지가죽 여성 디올 파우치’. 파우치는 작은 물건들이 가방 안에서 섞이지 않게 넣어두는 별도의 주머니를 가리킨다. 하지만 모양도 그렇고, 아직 ‘백’만큼 뿌리깊게 정착되진 않은 외래어여서 그냥 가방이나 백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 사건을 보도한 외신의 경우 로이터통신은 ‘디올 백 스캔들’이라고 썼고, 블룸버그도 ‘디올 백’,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2200달러짜리 디올 핸드백’, 뉴욕타임스는 ‘영부인과 디올 파우치’라고 했다. ▷‘방문자가 앞에 놓고 갔다’는 것도 알쏭달쏭한 표현이다. 그래서 김 여사가 가방을 받았다는 건가, 안 받았다는 건가? 다수 국민은 김 여사가 악의적 공작에 당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가방을 받은 건 대통령 배우자로서 옳지 않은 처신이라고 생각한다. 주어를 방문자가 아니라 김 여사에 두고 사건의 실체를 궁금해하는 이유다. ‘명품 백(가방) 수수 논란’이라고 이미 통용되는 용어가 있는데, 대통령에게 표현을 바꿔 질문할 이유가 있나. ▷‘대담 프로그램의 진행은 균형성·공정성을 유지해야 한다.’ 방송 심의 규정이다. 만약의 경우를 가정해서 출연자가 ‘방문자가 외국 회사의 작은 파우치를 놓고 갔다’고 말을 했더라도, 진행자가 ‘김 여사가 디올 명품 가방을 받았다는 논란’이라고 첨언해 보완하는 게 옳다. 한데 이번 대담에선 진행자가 먼저 무딘 질문을 던졌고, KBS가 당사자 대신 변명해 준 꼴밖에 안 됐다. 많은 국민이 공영방송에 바라는 건 이런 모습이 아니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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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가짜가 진짜를 몰아낸다

    다국적 금융그룹의 홍콩지부 직원이 딥페이크(deep fake·인공지능 기술로 정교하게 합성된 인물 영상이나 이미지, 음성)에 속아 2억 홍콩달러(약 342억 원)를 송금하는 사기를 당했다고 홍콩 경찰 당국이 2일 밝혔다. 직원은 본사 최고재무책임자(CFO) 및 원래 알던 동료 여럿이 참석한 화상회의에서 내려온 지시에 따랐는데, 사실은 사기범들이 딥페이크로 조작한 얼굴이었다는 것이다. 지난달 말엔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의 딥페이크 음란 이미지가 소셜미디어로 확산해 미국이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딥페이크가 뜨거운 감자다. ▷‘맥락을 잘 살피면 딥페이크를 가려낼 수 있다’고 자신한다면 오산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선 딥페이크가 교란의 도구로 쓰였다. 양국 대통령이 각각 항복하거나 평화를 선언하는 영상을 비롯해 적잖은 딥페이크가 제작됐다. 한데 아일랜드 코크대 연구진이 전쟁 초기 트윗을 분석한 결과 미디어의 진짜 보도에 ‘딥페이크’나 ‘가짜뉴스’라고 잘못된 딱지를 붙인 사례가 조작된 딥페이크 게시물을 잡아낸 것보다 오히려 더 많았다고 한다. ▷2021년 3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선 고교생 치어리더들이 음주, 흡연하는 가짜 영상을 만들어 전송한 혐의로 한 여성이 체포됐다. 영상 속 학생은 ‘명백히 조작된 영상’이라고 했다. 미국 주요 방송사도 학생을 딥페이크의 피해자로 보도했다. 그러나 두 달 뒤 영상은 진짜인 것으로 밝혀졌다. 딥페이크의 확산에 기대어 일단 ‘가짜 영상’이라며 잘못을 부인할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화된 것이다. ▷진실과 거짓이 불확실해지면 사람들이 진실을 더욱 믿지 않게 되는 ‘거짓말쟁이의 배당금(liar’s dividend)’이 생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실수를 모아 놓은 광고 영상을 두고 ‘AI를 사용한 가짜’라며 대놓고 거짓을 말하는 것도 이제 사람들이 영상마저 믿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최근 미국 민주당 경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음성으로 ‘투표를 거부하라’는 가짜 전화가 걸려오는 등 딥페이크가 만든 혼란이 불신을 낳고 있다. 가짜가 진짜를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 ▷딥페이크가 공신력 있는 매체로 유통되면 혼란은 더욱 증폭된다. 지난해 6월 우크라이나와 접경한 러시아 일부 지역 TV와 라디오에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연설이 방송됐다. ‘우크라이나가 침공했으니 대피하라’는 내용이었다. 우크라이나군 또는 반(反)러시아 민병대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딥페이크였지만 일부 주민들은 실제로 대피했다. 후방 교란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한국도 총선일에 임박해 악의적인 딥페이크 영상이나 이미지, 음성이 유포되면 사실상 대책이 없다. 딥페이크 등 허위·조작정보를 가려내는 전통 미디어의 어깨가 더욱 무겁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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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 [횡설수설/조종엽]

    최근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를 여행했다”는 제목의 한국 관련 유튜브 영상이 화제다. 미국 베스트셀러 ‘신경 끄기의 기술’(2016년)의 저자 마크 맨슨이 여행기 형식으로 한국 사회의 극심한 경쟁과 정신건강 문제 등을 짚은 영상이다. 착점이 흥미롭다. 영상 도입부는 아파트 이층 침대에서 합숙했던 과거 스타크래프트 게임 프로팀의 집중 훈련을 소개한다. 한국의 케이팝 스타나 운동 선수, 첨단 기술도 이 같은 경쟁 압박을 통해 세계 무대에서 성공했다는 것. 하지만 ‘100점이 아니면 0점이나 마찬가지’라는 식으로 도태되는 이를 양산하는 부작용을 만들었다는 비판이다. ▷영상은 한국 사회가 물질주의와 돈벌이를 강조하면서도 개인주의와 자기표현은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 한국인이 물신을 숭배해서 그런 게 아니다. 양극화한 노동 시장이 고착돼 모두가 소수의 대기업 정규직이 되기 위해 달려야 하는 탓이다. 선점한 이들만 ‘지대(地代)의 이익’을 누리다 보니 영상 속 전문가의 말처럼 많은 이들이 ‘항상 실패의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일부 대목은 다소 피상적인 느낌도 든다. 영상은 ‘유교적 수치심(shame)과 (타인에 대한) 비판(judgement) 문화’가 문제라고 했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알고 남의 평판을 의식하는 걸 중시하는 건 그나마 물질주의가 한국을 모두 좀먹는 것을 막는 방패다. 오히려 미국에서 대낮에 마약에 찌든 이들이 좀비처럼 걸어 다니는 현실은 극단적 개인주의의 해독과 관계가 없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이 가족을 중심에 놓고 사는 것이 문제’라고 짚은 건 앞뒤 맥락을 더 살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압축적 발전을 하며 사회가 져야 할 책임을 가족에게 지워 왔다. 가족 안에서 특히 여성이 양육을 하며 미래 노동력을 키웠고, 살림을 하며 현재의 노동력을 재생산했고, 노인을 부양하며 과거의 노동력을 책임졌다. 하지만 과거 한국 사회는 이를 무시했다. 노동력이 스타크래프트의 SCV(일꾼)처럼 마우스를 클릭하면 만들어지는 셈 쳤다. 그러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겪고 가장이 가족을 부양하는 구조가 해체되면서 각종 사회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강대국인 미국도 우리보다 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인종 마약 이민 범죄 총기 등 많은 사회문제를 갖고 있다. 우울증 유병률도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라는 말은 충격 요법으로 받아들여도 좋겠다. 제작자 맨슨의 격려 섞인 믿음처럼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관용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삶이 각자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개성적으로 살아도 먹고살 수 있어야 한다. 패자가 부활할 수 있게 안전망도 촘촘히 구축해야 한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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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내 속엔 울음이 산다”… 美 에미상 휩쓴 ‘성난 사람들’

    “가능하다고 보세요?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게?” 올해 미국 에미상 미니시리즈·TV 영화 부문을 휩쓴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에서 에이미(앨리 웡)는 상담사에게 이렇게 묻는다. 사업가인 에이미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행복을 포기했다는 분노와 딸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크다. 가난한 건축업자인 대니(스티븐 연)는 부모를 다시 미국으로 모셔와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지만 되는 일이 없다. 심리적으로 벼랑에 몰린 두 사람이 사소한 시비에도 화를 참지 못하고 악연을 키워 가는 모습은 현대인의 초상 같다. ▷외로움, 불안, 죄책감, 질투, 자기혐오, 인정 욕구…. 손대면 톡 하고 터질 듯 취약한 것이 사람의 자아다. 이 드라마 3화 제목 ‘내 속엔 울음이 산다’는 실비아 플라스(1932∼1963)의 시 ‘느릅나무’에서 따왔다. “내 속엔 울음이 산다/밤마다 울음은 날개를 퍼덕이며 나와/자신의 발톱으로, 사랑할 무언가를 찾는다”. 피부색이 어떻건 누구나 남모르는 어둠과 공허가 있게 마련이다. 드라마는 갈피를 잡지 못한 분노가 어떻게 상대를 해치는 발톱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성진 감독과 배우 스티븐 연을 비롯해 한국계가 대거 제작에 참여한 이 드라마의 수상이 특히 반가운 건 그래서다. 감독은 이민자라는 특수성 대신 보편적 고민으로 승부를 걸었다. ‘성난 사람들’은 미국에서 이민자로서의 정체성 문제를 핵심 주제로 다루지 않고도 한국계가 만든 드라마가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설렁탕집과 깍두기 등 한국적 배경과 소품이 등장하는 건 부차적이다. ▷‘모범적 소수자(model minority)’라는 아시아계 이민자에 대한 찬사가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그려지는 건 덤이다. 에이미는 성공한 사업가이지만 돈이 넘쳐나는 백인 조던 앞에선 ‘을’에 불과하다. 조던에게 사업체를 팔기 위해 갖은 아양을 떨어야 한다. 가족이 극도로 아끼는 시아버지의 유품마저 “얼마면 되는데?” “가격이 있을 텐데?”라는 조던의 탐욕에 사실상 빼앗긴다. 에이미가 “분노는 일시적인 의식 상태일 뿐”이라며 화를 잘 참는 이미지를 지켜야 하는 건 아시아계에 대한 억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드러낸다. ▷예측불허의 전개 끝에 대니와 에이미는 서로에 대한 이해에 이른다. 과격한 다툼을 통해 비로소 내면에 숨겨두었던 부정적 감정을 직면하는 것이다. 에이미는 말한다. “정상인들이…맛이 간 사람들일 수도 있어.” 마음 건강이 ‘괜찮다’고 자부하는 건 역으로 곪아 있는 감정을 부정하려는 것일 수 있다. ‘새들은 노래하는 게 아니야. 고통에 울부짖는 거지’(드라마 1화 제목). 당신도,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울고 있는지 모른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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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중국 GDP가 세계 1위였던 시대

    중국 청나라의 전성기로는 강희제부터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까지의 ‘강희-건륭년간’이 꼽힌다. 그중 건륭제의 생애를 다룬 책이다. 건륭제는 실질 통치 기간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길었던 군주다. 재위(1735∼1796년) 뒤 태상황으로 최고 권력을 행사한 3년까지 더하면 총 63년 4개월이다. 이 기간 청나라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경제 규모는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을 차지해 세계 제일이었다. 건륭제는 청나라 영토를 최대로 넓혔으며,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하는 등 문화적으로도 업적을 남겼다. 아버지 옹친왕(옹정제)이 강희제의 여러 아들들 가운데 후계자로 간택된 데에는 홍력(건륭제)의 덕이 컸다고 한다. 청고종실록에 따르면 강희제는 열두 살 손자 홍력을 처음 보자마자 호감을 느꼈다. 그의 총명함에 반했던 것. 강희제는 ‘후계자가 어떤 아들을 두었는지’ 중요시했는데, 그런 아버지의 눈에 들려는 옹친왕의 치밀한 계획이 성공한 것이었다. 옹정제가 재위 13년 만에 죽고, 24세에 황위에 오른 건륭제는 황태후와 황비, 외척, 환관의 정치 개입을 철저하게 막으며 권력을 공고하게 다졌다. 어머니인 황태후의 생일엔 앞에서 몸소 춤을 추고 막대한 돈을 쓰는 등 효자 역할을 했지만 황태후가 정치에 나서는 건 철저하게 막았다. 이런 명도 내렸다. “황궁 밖에서 일어나는 일, 자금성 밖에서 들려오는 일은 누구도 태후께 보고해서는 안 된다.” 황태후에게 들어가는 정보를 차단한 것이었다. 어느 날 황태후가 한 사찰을 수리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자 태후를 모시는 태감(고위 환관)들을 모조리 불러 모아 족치기도 했다. 건륭제가 황위에 오르기 전 다양한 역사서를 공부하며 태후의 힘을 빌려 일을 도모하려는 무리를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건륭제도 말년에 사치를 부렸고, 고집불통에 기고만장해서 누구의 의견도 듣지 않고 스스로 그 성세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중국의 역사학자가 펼친 강연을 정리한 책이어서 옆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듯 느껴지고 읽기가 쉽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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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우주, 마치 인류 탄생을 위해 설계된 것만 같은

    “우리 망원경에 잡힌 우주는 누군가에 의해 정교하게 설계된 것처럼 보입니다. 우주는 왜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존재하게 되었을까요?” 마치 ‘도를 아십니까’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물음이다. 진지한 과학으론 취급되지 않는 지적설계론(우주와 자연을 지적 존재가 설계했다는 이론)자의 주장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질문은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1942∼2018)이 1998년 ‘내 연구실에 들어올 의향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저자를 만나 던진 것이다. 저자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저자는 이후 20년 동안 호킹과 함께 연구했다. 호킹은 작고 직전 다중우주 관련 논문도 저자와 함께 썼다. 벨기에 루뱅가톨릭대 이론물리학과 교수인 저자가 호킹과의 공동 연구를 소개하는 교양과학서다. 문제는 이렇다. 우주배경복사(우주에 퍼져 있는 우주 탄생 초기의 빛)는 주변 영역과 온도 차가 10만분의 1도밖에 안 된다. 온도 차가 1만분의 1도였다면 우주는 블랙홀 세상이 됐을 것이고, 100만분의 1도였다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만 있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나 ‘생명 친화적인 우주’다. 우주의 인플레이션(팽창) 속도, 공간이 3차원이라는 것, 중성자와 양성자의 질량 비율, 강한 핵력과 전자기력의 강도 비율, 암흑 에너지의 밀도…. 이처럼 우주의 각종 변수가 생명체에 유리한 쪽으로 맞춰진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을 ‘미세 조정(fine-tuning) 문제’라고 한다. 한 가지 설명은 이런 것이다. 방대한 공간에 수많은 우주가 존재하는데, 우주마다 물리법칙이 다르다. 우리의 우주가 생명 친화적인 이유는 우리가 그런 우주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생명 친화적이지 않은 다른 수많은 우주에는 우주를 고민할 생명체가 없다. 지적 생명체의 존재가 우주를 설명한다는 이른바 ‘인류 원리(anthropic principle)’다. 1973년 처음 제기됐다. 단순하지만 강력한 이 주장은 검증과 예측이 불가능하다. 과학의 영역인지 애매하다는 말이다. 책엔 호킹과 이 같은 질문에 직면하며 우주론을 발전시킨 이야기가 논쟁의 전사(前史)와 함께 소개된다. 호킹이 우주가 과거 특이점에서 시작됐을 것으로 예측한 이야기, 허수 시간을 도입하고 ‘무경계 가설’을 제안해 양자 중력의 세계로 진입하는 교두보를 마련한 이야기 등이 이어진다. 호킹은 “영구적 인플레이션 추종자들과 다중우주 추종자들이 똘똘 뭉쳐서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며 ‘하향식 우주론’을 제안한다. 이 우주론은 “깊은 양자적 수준에서 우주와 관찰자가 하나로 묶여 있다는 사실로부터 생명 친화적 특성의 기원을 추적하는 것”이다. 읽다 보면 현대 물리학에서 우리의 직관과 배치되는 많은 아이디어가 진지하게 연구된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관찰자의 역할은 무성하게 뻗어 있는 갈림길 중 대부분을 가지치기 하듯 잘라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관찰자가 경험한 세계만이 유일한 가지로 살아남는다.” 일본 만화 ‘나루토’에서 유리한 현실만을 고를 수 있는 닌자의 ‘이자나기’ 술법처럼 들리지 않는가?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을 건너뛰다 보면 천천히 경이로움이 느껴진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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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조종엽]마음까지 얼어붙는 연말… 詩에 기대어 손 잡아봐요

    연말이다. 회사 앞 서울 청계광장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불을 밝혔다. 행인들은 스마트폰을 치켜들며 세밑 풍경을 즐긴다. 지난해에도 같은 모습을 보며 퇴근하던 기억이 생생한데 올해도 끝이 보인다. 이런… 벌써 연말이다. “하루라는 오늘/오늘이라는 이 하루에//뜨는 해도 다 보고/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죽을 때가 지났는데도/나는 살아 있지만/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천년을 산다고 해도/성자는/아득한 하루살이 떼” 나눔을 실천하며 무애(無礙)의 삶을 살았던 ‘선(禪) 시조’의 대가 설악 무산 조오현 스님(1932∼2018)의 ‘아득한 성자’다. 만해축전을 계기로 무산 스님과 오래 인연을 맺었던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는 최근 출간한 산문집 ‘수선화 꽃망울이 벌어졌네’(푸른사상)에서 스님을 ‘내 마음속의 큰 산’에 비유했다. 스님 앞에서 시 ‘아득한 성자’를 평론가로서 분석하자 스님은 그냥 듣더니 이내 묻더란다. “권 박사는 ‘하루살이’를 아느냐?” 시를 읽다 보면 ‘하루살이는 하루에도 제 할 일을 다 하는데, 나는 하루라도 제대로 살았던가, 올해는 어땠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무산 스님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1879∼1944)이 1918년 발간(1∼3호)했던 잡지 ‘유심(惟心)’을 2001∼2015년 시 전문지로 다시 발간했다. 설악·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올 9월 ‘유심’을 재창간했고, 이달 1일 2호를 냈다. 시는 둘째 치고 활자 매체 자체의 인기가 시들한 요즘 같은 시대에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다. 이번 호 권두에는 최근 세상을 뜬 김남조 시인(1927∼2023)에 대한 문현미 시인(백석대 교수)의 추모 글이 실렸다. 문 시인은 “자신의 고독과 추위만이 아니라 타인의 처지도 그러함을 알아서 같이 울어주는 사람, 그가 진정한 시인이며, 바로 김남조 선생님이시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고(故) 김 시인의 시 ‘시인’을 인용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춥고 무섭고 외로웠다/자라면서/다른 사람들도/춥고 무섭고 외로워함을 알았다/멈추지 않는 눈물처럼/그에게/말과 글이 솟아났다” 기술적으로는 인류사 그 어느 때보다도 긴밀하게 연결돼 있지만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고립돼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타인도 자신처럼 나약함을 이해하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 수 있게 만드는 건 그 어떤 첨단 기술의 힘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일 것이다. 기승을 부리는 북극 한파 탓인지 몸은 얼어붙고 유난히 마음까지 추운 연말이다. 시의 힘에 기대어 보는 건 어떨까.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등의 시집을 낸 박준 시인은 유심 2호에 게재한 산문 ‘고요의 힘’에서 이렇게 썼다. “시에 기댈 때만 말할 수 있는 진실이 있다. 더 정확하게 하자면 시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읽고 쓰는 삶에 기대는 것이다. 만약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실만을 말해야 한다면 우리는 서로에 대해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해 말보다 더 긴 침묵을 늘어놓아야 할 것이다. 또한 스스로를 향하는 혼잣말도 거두게 될 것이다”라고. 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 20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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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송나라 사신 눈에 비친 고려의 멋

    고려의 나전 공예 솜씨가 빼어났던 것, 회계 처리 수준이 세계적이었던 것 등을 알 수 있는 건 송나라 휘종이 보낸 사신 서긍(1091∼1153)이 고려를 방문한 경과와 견문을 적은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남겼기 때문이다. 고려도경을 쉽게 풀어 쓴 책이다. 서긍은 1123년 6월 12일 바닷길로 벽란도에 도착해 한 달 남짓 개경에 머물다가 송으로 돌아갔다. 서긍이 본 고려 여인들은 머리카락의 반은 오른쪽 앞으로 늘어뜨리고, 나머지는 등 뒤로 늘어뜨렸다고 한다. 귀부인들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몽수(蒙首)라는 긴 너울을 써서 얼굴과 눈만 노출했다. 치마 속엔 바지를 입고, 외출할 땐 수레나 가마가 아닌 말을 탔다. 고려인들은 시냇물에 모여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의관을 언덕에 벗어놓은 후 목욕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상거래에선 주로 모시나 삼베, 은병으로 값을 치렀고 값어치가 작은 건 쌀로 지불했다. 송상을 통해 고려로 유입된 화폐는 왕부의 창고에 보관돼 잘 유통되지 않았다. 서긍이 본 고려의 궁궐과 성곽, 관아 등의 모습도 자세히 담겨 있다. 고려인들은 바삐 걸었고, 불교 국가임에도 고관대작들의 집에서는 고기반찬이 끊이지 않았으며, 밤엔 곳곳에 불을 밝혔고 술 마시는 걸 즐겼다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의 모습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서긍의 사행에 동행하는 것처럼 서술돼 독자가 마치 90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서긍의 그림 대신 삽입한 여러 삽화가 이해를 돕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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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망각의 세계에서 기억은 광증일 뿐

    가족의 비극적 죽음을 겪은 모자는 죄책감에 시달린다(단편 ‘목소리들’). ‘자신을 탓하는 순간 스스로에 대한 고문이 멈추지 않을 걸 알기에’ 끊임없이 책임을 다른 이에게 돌린다. 인간은 모순적이고 나약한 존재다. 작가가 2018년 이후 발표한 단편소설 8편을 묶은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요령이 없거나, 예민하고, 낯이 두껍지 못한 사람들이다. 부당한 대우를 겪고도 항의하지 못하거나, 마지막 통화를 거절했다가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 스스로에게 눈 딱 감고 그냥 넘어갈 줄은 모르는 이들이다. 단편 ‘공가(空家)’에선 폭력적인 소음이 이들을 괴롭힌다. 남편의 출장이 길어진 동안 시댁 식구들이 집에 눌러앉고, 급기야 노래방 기기까지 들여와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자 ‘그녀’는 도망치듯 집을 나선다. 또 다른 주인공 ‘나’는 어린 시절 사이비 종교에 빠졌던 부모에 의해 늘 귀신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방에 갇혀 있어야 했다. ‘나’는 삶의 마지막이 다가왔다는 생각이 들자 옛집을 찾아가지만 집은 재개발 지역의 공가가 돼 있다. 내몰린 두 사람이 들어서면서 빈집은 빈집이 아니게 된다. 주인공들은 ‘사랑마저 차별을 만들어 내는’ 역설적인 세계에 놓여 있다(단편 ‘마음의 부력’). 구약성서에서 야곱은 쌍둥이 형 ‘에서’인 척하며 아버지가 내리는 장자의 축복을 훔쳐 가지만, 소설에서 동생은 본의 아니게 형을 소외시킨 처지가 괴로울 뿐이다. 죽은 형과 자신을 헷갈리는 어머니 앞에서 동생이 보이는 연기는 작은 구원의 신호일까. 그 역할은 누가 부여한 것일까. 부조리한 세계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건 사실 망각 때문이다. 뺑소니 교통사고, 민간인 학살 같은 비극이 일어났다는 것조차 잊고 사는 이들 속에서 제대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미친 여자’가 될 뿐이다(단편 ‘소화전의 밸브를 돌리자 물이 쏟아졌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탄식 없이 슬퍼하고 변명 없이 애도하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고 했다. 등단한 지 42년 된 작가의 묵직한 주제의식과 섬세한 문장이 펼친 책을 좀처럼 놓지 못하게 만든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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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방금 한 그 행동, 알고보면 인류 삶 전체와 연결돼있다

    미국 남북전쟁의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던 게티즈버그 전투에선 단발식 머스킷 총이 2만7000정 가까이 회수됐는데, 그중 약 2만4000정은 한 번도 발사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아비규환의 전쟁터에서 병사 대부분은 총을 쏘기는커녕 부상자를 돌보거나, 명령을 외치거나, 달아나거나, 망연자실 배회했다는 것. “인간은 근거리에서 타인에게 중상해를 입히는 걸 강하게 꺼리는 성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개인을 쏘기보다는 오히려 집단에 수류탄을 던지는 게 더 쉽다. 멀리 떨어졌다지만 화상으로 상대를 관찰해야 하는 드론 공격도 마찬가지다. 드론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적을 감시하다 공격해 죽인 미군들은 상당수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걸렸다. 인간은 전쟁을 벌여 수천만 명을 죽이지만 동시에 얼굴을 마주치는 적군과 쉽게 유대를 느끼는 존재이기도 하다. 남북전쟁 때도 병사들은 적과 서로 친해져 물물교환을 하거나 전투를 앞둔 저녁에 공동으로 예배를 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에서 자연스럽게 ‘크리스마스 휴전’이 있었던 건 잘 알려져 있다. 도대체 인간은 왜 이렇게 모순적으로 행동하는 걸까. 부제 ‘인간의 최선의 행동과 최악의 행동에 관한 모든 것’처럼 인간의 폭력성과 이타성이라는 양면, 도덕성과 자유 의지, 부족주의와 외국인 혐오 등에 대해 ‘생물학과 심리학, 문화적 측면을 종합해’ 다룬 책이다.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로 세계적으로 저명한 신경과학자인 저자가 집필에만 10년 넘게 걸린 역작으로, 인용한 연구의 출처를 밝힌 후주(後註)만 얇은 책 한 권 분량이다. 전반부는 ‘특정 행동은 왜 일어났을까’라는 질문 아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장을 나눠 설명한다. 행동이 일어나기 ‘1초 전’은 뇌신경과학의 시간대다. 뇌의 편도체는 공포, 불안, 공격성과 관련돼 있고, 통제를 담당하는 이마엽(전두엽) 겉질이 손상되면 사람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다. 뇌에서 정서를 담당하는 부위와 인지를 담당하는 부위가 서로 따로 놀기도 한다. “다섯을 구하기 위해 한 명을 죽여도 괜찮으냐”라는 이른바 ‘트롤리 문제’에서 답변자가 ‘직접 한 사람을 밀쳐야 하는’ 상황을 제시하자 뇌의 정서와 관련된 영역이 함께 활성화됐지만 ‘그저 레버를 당기면 된다’는 상황에선 인지 영역만 활성화됐다. 행동하기 ‘몇 초에서 몇 분 전’은 감각의 시간대다. 실험에 따르면 우리 뇌는 피부색에 매우 예민하다. 누군가의 얼굴 사진을 10분의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보여주면 사람들은 뭘 보기는 한 것인지마저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진으로 본 얼굴의 인종을 맞히라면 꽤 잘 맞힌다. 피험자와 다른 인종의 얼굴을 보여주면 편도체가 더 잘 활성화되기도 한다. 이는 인간의 뇌가 ‘우리’와 ‘그들’을 순식간에 가른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은 거기에 무조건 지배되는 존재는 아니다. 저자는 “의식이 감지할 만큼 오래(약 0.5초 이상) 노출되면 뒤이어 이마앞엽 겉질이 활성화되고 편도체가 조용해진다. 스스로도 불편한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라고 했다. 책은 이런 식으로 ‘몇 시간에서 며칠 전’의 호르몬 이야기와 ‘며칠에서 몇 달 전’의 신경가소성을 살핀 뒤 청소년기, 아동기, 태아기에 겪은 변화가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탐구한다. 뒤이어 문화와 진화로 주제를 넓혀 간다. 저자는 사람이 누군가를 돕는 것에 대해선 “자전거 타기처럼 오래전부터 몸에 익힌 나머지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행동의 문제”라고 했다. 위트 있는 문장과 풍부한 사례를 통해 전개하니 책의 두께에 지레 겁먹을 것은 없다. 원제 ‘Behave’.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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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이올리니스트 다니엘 전 피아노 트리오 악보집 출간

    바이올리니스트 다니엘 전(전강호)이 피아노 트리오 악보집 ‘바이올리니스트 다니엘 전의 피아노 트리오 이야기’(예솔)를 올해 10월 출간했다.하이든, 모차르트, 차이콥스키, 드뷔시 등 고전부터 현대까지 12개의 피아노 트리오 악보와 함께 연주 팁과 곡 해설을 담았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자기만의 언어로 곡을 표현하고 연주자로서의 느낌을 풀어냈다. 직접 곡을 연주해 본 경험이 연주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다니엘 전은 서울예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을 거쳐 독일 만하임 국립음대와 영국 런던 길드홀 음악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미국 미시간 주립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뉴욕주립대 교수를 지냈다. 서울시향, 대전시향을 비롯해 미국의 잭슨 심포니, 독일 모차르트 캄머 오케스트라, 영국 로얄 리버풀 필하모니에 악장 또는 솔리스트로 초청됐다. 나눔 피아노 트리오를 창단해 영국, 독일, 이탈리아에서 연주회를 열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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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조종엽]도심에도 노거수 살 수 있게 나무에 흙바닥 돌려주자

    강원 평창군 오대산 월정사 앞 전나무숲길엔 2006년 쓰러졌다는 육백 살 나무가 있다. 텅 빈 속에 곰이 들어앉아 쉴 것 같은 크기다. 그 건너편 그루터기, 곰곰이 들여다보면 어지러워질 만큼 동심원이 많은 나이테 위에서 ‘멍 때리며’ 앉아 있으면 ‘사람의 삶은 참 짧다’ 싶다. 겨울 산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고요 속에서 늙고 키 큰 나무들의 존재감은 더욱 커진다. 다람쥐가 뒤척이며 떨어뜨린 눈이 살포시 지면을 두드릴 때면, 나무의 물관이 지표 아래에서부터 한껏 물을 빨아올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럴 땐 거대하고 말 없는, 뿌리 박아 움직이지 않는 초연한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이 가슴을 채운다. 강원이 산이라면 제주는 숲이다. 거문오름 곶자왈에서 ‘돌은 낭(나무) 의지, 낭은 돌 의지’라는 제주 속담처럼 돌을 붙잡고 깊이 뿌리 내린 거목과, 그 위를 다시 콩짜개덩굴이 뒤덮은 모습을 보노라면 ‘고다마’(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숲의 정령)가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밀 것만 같다. 이런 기분은 이젠 도시를 떠나서야 느낄 수 있게 됐지만 전통시대엔 노거수(老巨樹)가 일상의 일부였다. 마을 어귀마다 느티나무가 정자나무로 서 있었고, 산기슭의 당산나무는 신령하게 여겼다. 그 시절 경이와 신비는 마치 밥을 먹는 것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물론 산업화를 거치며 대부분 사라졌지만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도 오래된 마을엔 여전히 아름드리나무가 꽤 있다. 다만 거기서 놀라움은 좀 다른 것이다. ‘이런 채로도 생존할 수 있다니!’ 건물과 도로가 장악한 공간의 한구석에서 노거수는 산다. 늙고 큰 나무가 빗물과 양분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 한쪽, 가로세로 1m 정도밖에 안 되는 흙바닥이 전부인 경우가 적지 않다. 그마저도 길을 정비하면서 원래 지표보다 높게 흙을 덮은 탓에 뿌리엔 공기도 잘 통하지 않는다. 노거수가 이런 환경에 처하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 처음으로 데이터로 밝혀졌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은 18일 ‘네이처’ 자매지인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노거수의 생육 환경과 나무의 활력에 관한 연구 결과를 게재했다. 연구팀이 느티나무 노거수 25주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나무의 가지와 잎이 펼쳐진 넓이만큼의 지표, 지하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채 자라는 노거수는 광합성을 잘하지 못했다. 지하에 장애물이 있으면 뿌리가 뻗지 못하고, 바닥을 콘크리트로 덮으면 그만큼 공기와 물, 영양분이 땅속으로 전해지지 못하는 탓이다. 마찬가지로, 바닥에 흙을 두껍게 덮어 물이 땅속으로 침투하기 어려울수록 나무의 활력을 보여주는 지표가 낮았다. 노거수 주위의 콘크리트를 뜯자. 뿌리가 숨을 쉴 수 있게, 인위적으로 덮은 흙은 걷어내자. 연구진은 전화 통화에서 “벤치를 놔두는 정도야 괜찮겠지만 적어도 수관(樹冠) 폭만큼은 바닥을 자연 상태로 둬야 노거수의 생육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천연기념물 가운데는 600∼700년을 산 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도 있다. 우리가 오래 살 나무를 천천히 죽이고 있는 셈이다. 말라 죽는 노거수와 함께 우리의 경이로움도 사라져 간다. 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 202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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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실패한 역사? 오히려 배울 점 많다

    “동학군을 진압해 달라고 청군을 불러들여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할 구실을 내주고 조선 몰락의 물꼬를 튼 이가 고종이다. … 권력 유지를 위해 외세에 의존하려 했던 용렬한 군주 고종이 미화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책머리에 던지는 저자의 질문이다. 저자는 우리 역사 인식이 “은폐와 과장, 왜곡,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면서 이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한다. 위화도 회군은 ‘명분 없는 군사 쿠데타’였으며, 만약 고려 우왕이 이성계 대신 최영 장군을 보냈다면 요동에 진출했을 것이라고 저자는 본다. ‘해볼 만했던’ 원명 교체기, 쿠데타로 집권해 명분이 부족했던 이성계가 스스로 굽히고 명나라의 신하를 자청했다는 것이다. 반면 명청 교체기엔 막강한 상대에게 무모하게 대들다가 깨졌다. 저자는 “‘병자호란은 미개한 만주족이 문화국 조선을 유린한 것이며 만주족에 고개를 숙이지 않은 절개를 높이 기린다’는 식의 역사 서술은 국내 정치 투쟁의 명분을 지키고자 국가 안보를 포기함으로써 백성을 고난과 치욕으로 몰아넣은 정치 세력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밖에도 ‘축적된 해양 역량을 포기한 조선의 해양 정책’, ‘성리학 질서에 매몰된 일류 과학기술’ 등 역사에서 배울 교훈을 조곤조곤 짚는다. 지식경제부 장관을 지내기도 한 저자가 DBR(동아비즈니스리뷰)에 기고한 글을 보완해 묶었다. 저자는 “실패한 역사는 전략적 사고 능력을 기르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교재”라고 강조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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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전쟁 중 발행된 종이 조각, 세계경제 흔드는 금융 무기로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기준금리를 발표하는 날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연준이 부여하는 달러의 가치에 지구 반대쪽 나라에서 수백만 명의 일자리가 왔다 갔다 한다.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달러의 힘’이다. 국제정치·경제전문가로 앞서 ‘지정학의 힘’(아카넷)을 펴냈던 저자가 달러의 탄생과 패권 구축 과정을 다뤘다. 달러의 등장은 전쟁과 직결돼 있다. 영국 식민지 시대 초기 미국에선 옥수수나 비버 모피, 담배 등이 물품화폐로 쓰였다. 영국은 미국이 주화를 주조하는 걸 막았다. 화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은 차용증서인 ‘신용증권’을 발행해 지폐처럼 통용하기도 했다. 그러다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대륙의회는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콘티넨털 달러’를 발행했다. 이 화폐는 금, 은과 바꿔준다고 명시됐지만 사실 재원이 없었던 데다, 영국이 독립군에 타격을 주려고 위조해 뿌리면서 가치가 폭락했다. 전쟁에서 이긴 미국은 화폐 발행권을 각 주가 아닌 연방의회가 갖도록 하고 달러를 단일 통화로 발행했다. 이를 통해 미국은 순식간에 세계 최대의 자유무역지대로 떠올랐다. 당시 1달러는 금 1.6g에 해당했다. 오늘날과 같이 미국 정부에 대한 신뢰만으로 가치를 갖는 달러는 남북전쟁으로 등장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취임할 당시 연방정부의 재정 상태는 엉망이었다. 링컨은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불환지폐(금화, 은화 등과 태환이 불가능한 화폐)를 발행하고 법정통화로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지폐가 국가 권력에 의해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이 화폐는 뒷면이 녹색이라서 ‘그린백’이라고 불렸다. 1879년 금 태환이 재개되면서 그린백은 소멸했지만 오늘날의 달러 역시 그린백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책은 이 밖에도 중앙은행의 부재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한 연준의 등장,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달러가 국제 금융의 중심에 서는 과정, 영국의 유로달러시장 발명, 1971년 달러의 금 태환 정지, 달러 기반의 신용 확장과 금융 혁신 등 달러의 역사를 시간 순으로 살핀다. 1997년 한국 외환위기에도 한 장을 할애했다. 기축통화인 달러의 위력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국제 달러 결제는 대부분 미국 은행 시스템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에 미국은 외국인에게도 손쉽게 달러 거래를 금지할 수 있다. 굳이 유엔을 통해 제재할 필요도 없다. 자산을 동결하고, 거래와 송금을 금지하는 미국의 금융 제재는 치명적이다. 달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중국은 위안화 결제를 확대하면서 달러 패권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아직 멀었다. 중국은 정치와 법, 규제 환경 면에서 투자자와 각국 중앙은행의 신뢰가 부족하다. 세계의 안전 자산은 여전히 미국 국채 같은 달러 자산이다. 이는 미국이 갖춘 제도와 금융시장 때문이다. 저자는 “통화 패권은 글로벌 세력 균형의 핵심적인 열쇠”라고 했다. 그러나 미국은 소비를 줄이고 수출을 늘리는 대신 더 많은 달러를 ‘수출하며’ 국제수지 적자를 메우고 있다. 저자는 “달러 체제는 대안이 없어서 지속되는 차선의 시스템일 뿐”이라며 “다른 화폐가 달러를 위협하는 상황이 된다면 미국의 정책 실패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꼼꼼한 자료 조사가 눈에 띄는 책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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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당신의 아픔이 당신이 되지 않길

    1944년 봄 헝가리에 살던 열여섯 살의 저자는 가족과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부모님은 도착한 날 가스실에서 살해됐다. 나치 친위대 간부를 위해 강제로 춤을 춰야 했던 저자는 속으로 어머니의 조언을 생각하며 견뎠다. “네가 마음에 새긴 것은 아무도 네게서 뺏을 수 없단다.” 수용소의 생지옥을 견디고 가까스로 살아남아 시체 더미에서 구조된 저자는 쉰이 넘은 나이에 임상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40년 이상 미국에서 내담자들의 심리를 치료해 왔다. 그런 저자가 ‘해로운 생각을 멈추고 삶을 선물로 바꾸는 법’에 관해 쓴 책이다. 저자는 수용소에서 울었던 기억이 없다고 했다. 당장 생존이 다급했기 때문이다. 풀려난 뒤에도 홀로코스트에 관해 말하는 걸 꺼렸다. 그렇게 오랜 세월 회피했던 감정들은 나중에 닥쳐왔다. 중학교에 입학한 딸이 홀로코스트에 관해 묻자 남편은 저자가 아우슈비츠에 있었다고 알려줬다. 저자의 가슴이 그제야 무너져 내렸다. 종전 30여 년이 지난 뒤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방문해서도 거의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 됐다. 하지만 오랫동안 회피했던 감정들과 마주한 뒤엔 몽땅 밖으로 쏟아낸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저자는 “우리는 연약한 작은 어린아이가 아니다. 모든 현실과 똑바로 마주 보는 것이 좋다”며 “감정은 감정일 뿐 우리의 정체성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저자는 상실, 범죄 등을 경험한 이들을 상담한 사례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를 통해 ‘나를 제외한 모든 관계는 언젠가 끝난다’, ‘내면의 대본은 다시 쓰일 수 있다’, ‘분노 안에는 해소되지 않은 슬픔이 있다’, ‘오직 나만이 나를 해방해줄 수 있다’ 등 치유를 위한 열두 가지 메시지를 던진다. 저자는 책을 읽고 사람들이 ‘내 고통은 그녀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대신 ‘그녀가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최악의 감옥은 나치가 나를 가두었던 감옥이 아니다. 최악의 감옥은 내가 스스로 만들었던 감옥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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