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조종엽]“내 속엔 울음이 산다”… 美 에미상 휩쓴 ‘성난 사람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17일 23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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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다고 보세요?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게?” 올해 미국 에미상 미니시리즈·TV 영화 부문을 휩쓴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에서 에이미(앨리 웡)는 상담사에게 이렇게 묻는다. 사업가인 에이미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행복을 포기했다는 분노와 딸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크다. 가난한 건축업자인 대니(스티븐 연)는 부모를 다시 미국으로 모셔와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지만 되는 일이 없다. 심리적으로 벼랑에 몰린 두 사람이 사소한 시비에도 화를 참지 못하고 악연을 키워 가는 모습은 현대인의 초상 같다.

▷외로움, 불안, 죄책감, 질투, 자기혐오, 인정 욕구…. 손대면 톡 하고 터질 듯 취약한 것이 사람의 자아다. 이 드라마 3화 제목 ‘내 속엔 울음이 산다’는 실비아 플라스(1932∼1963)의 시 ‘느릅나무’에서 따왔다. “내 속엔 울음이 산다/밤마다 울음은 날개를 퍼덕이며 나와/자신의 발톱으로, 사랑할 무언가를 찾는다”. 피부색이 어떻건 누구나 남모르는 어둠과 공허가 있게 마련이다. 드라마는 갈피를 잡지 못한 분노가 어떻게 상대를 해치는 발톱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성진 감독과 배우 스티븐 연을 비롯해 한국계가 대거 제작에 참여한 이 드라마의 수상이 특히 반가운 건 그래서다. 감독은 이민자라는 특수성 대신 보편적 고민으로 승부를 걸었다. ‘성난 사람들’은 미국에서 이민자로서의 정체성 문제를 핵심 주제로 다루지 않고도 한국계가 만든 드라마가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설렁탕집과 깍두기 등 한국적 배경과 소품이 등장하는 건 부차적이다.

▷‘모범적 소수자(model minority)’라는 아시아계 이민자에 대한 찬사가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그려지는 건 덤이다. 에이미는 성공한 사업가이지만 돈이 넘쳐나는 백인 조던 앞에선 ‘을’에 불과하다. 조던에게 사업체를 팔기 위해 갖은 아양을 떨어야 한다. 가족이 극도로 아끼는 시아버지의 유품마저 “얼마면 되는데?” “가격이 있을 텐데?”라는 조던의 탐욕에 사실상 빼앗긴다. 에이미가 “분노는 일시적인 의식 상태일 뿐”이라며 화를 잘 참는 이미지를 지켜야 하는 건 아시아계에 대한 억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드러낸다.

▷예측불허의 전개 끝에 대니와 에이미는 서로에 대한 이해에 이른다. 과격한 다툼을 통해 비로소 내면에 숨겨두었던 부정적 감정을 직면하는 것이다. 에이미는 말한다. “정상인들이…맛이 간 사람들일 수도 있어.” 마음 건강이 ‘괜찮다’고 자부하는 건 역으로 곪아 있는 감정을 부정하려는 것일 수 있다. ‘새들은 노래하는 게 아니야. 고통에 울부짖는 거지’(드라마 1화 제목). 당신도,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울고 있는지 모른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성난 사람들#美#에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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