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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안 작은 화분에 담긴 식물들이 창밖 잡초를 바라봅니다. 실내가 더 안온하지만, 누가 더 오래 살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요. ―충남 부여군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주제관에서 관람객들이 국립극장 무대에 올랐던 의상을 살펴보고 있다. 이달 2일 개막한 ‘공연 예술, 시대를 담다’ 전시에서는 20세기 이후 한국 근현대 공연예술의 흐름과 변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어느 봄밤, 까치 10여 마리가 나무에 한데 모여 앉아 있네요. 사람의 눈을 피해 까치도 봄을 만끽하나 봅니다.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궂은 날씨에 ‘벚꽃 엔딩’이 일러져 아쉬우신가요. 우리만 그런 건 아닌가 봅니다. 직박구리도 벚꽃이 질라 서둘러 머리를 박고 꿀을 먹네요. ―경기 화성시 실내체육관 앞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100년 전에 전람회장 역할을 했던 서울 인사동의 건물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삶을 돌아보는 ‘백년사진’입니다.이번 주 신문(1925년 4월 13일 ~ 4월 19일)에는 유난히 눈에 띄는 사진이 많았습니다. 봄이 되니 행사도 많고, 자연히 카메라 셔터를 누를 일도 많아졌기 때문일 겁니다.1925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 7면 전체를 채운 ‘두만강 건너 북간도’ 사진과 관련 기사는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동아일보 기자 지방 순회 - 정면 측면에서 본 회령의 겉과 속”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당시 기자들이 권력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거침없이 지역의 현실을 기록한 점에서 눈에 띄었습니다. 워낙 방대한 내용이라 이 코너를 통해 전해 드리지 못해 아쉽습니다. 시대를 뛰어넘어 권력에게 때론 무례하기도 한 기자정신을 개인적으로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일제 통치와 상관없이 사상계 교육계 경젝메 및 민간단체 들이 자체 활동하고 있는 상황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었습니다.그 외에도 여러 흥미로운 사진들이 연이어 실렸습니다.4월 13일자에는 영변 유치원의 보육증서 수여식 장면이 있었고,4월 14일자에는 청량리의 봄 풍경,4월 15일자에는 장충단 공원의 봄 소식이 전해졌습니다.4월 18일자에는 조선기자대회 관련 사진도 있었습니다.그 가운데 오늘 제가 고른 사진은 ‘태화여자관 수예 전람회’입니다. 전람회 사진의 전형적인 구성입니다. 연출된 장면, 그리고 사진의 빈 공간을 관람객으로 채워 넣는 방식이 지금의 전시회 사진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평범한 앵글의 사진이지만, 100년 전 서울의 중심가 어디선가 전시회가 이뤄졌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규모야 작았겠지만 마치 서울 강남 코엑스나 일산 킨텍스, 부산 벡스코처럼 말입니다. 제 궁금증은 “전람회가 열린 저 건물은 무슨 건물이었을까?”였습니다. 관청이었을지 상업용 공간이었을지. 우선 당시 신문에 실린 사진의 설명을 살펴보겠습니다. 태화여자관 수예품 전람회 (1925년 4월 19일자 동아일보)시내 인사동에 있는 태화여자관(泰和女子館)에서는 어제 18일에 강당에서 수예 전람회가 있었는데 장내 벽에는 순(純)조선 사람들의 힘으로 된 송고직(松高織)의 오색이 영롱한 필목이 늘어져 있어서 장내를 환하게 하였다. 출품은 노력을 짜서 공부하는 고학생들의 손으로 만든 것인데 한 살부터 십 세 이상의 남녀 아동의 양복을 미국식으로 만들어 걸려 있어서 보는 이의 눈을 황홀하게 하여 사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리 만큼 탐이 나게 하며 그 외에 남녀의 속옷 와이삿즈, 침의, 침대홋이불, 전등 갓 등 여러 가지가 있었는 바, 다 바탕은 송고직이였고 다과점 같은 것도 있었는데 관람객이 자못 답지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더라.● 친일 이완용의 저택에서 낭독된 독립선언문 사진의 실마리를 잡고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지난 주 독립운동가들 기사를 소개드렸는데, 사진 자체보다는 사진을 둘러싼 이야기와 역사를 좋아하시는 독자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에도 사진을 통해 나타난 시대의 흐름과 사진의 맥락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진 속 건물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같은 이름의 건물이 새로 올려져 있습니다. 지금도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29번지에 가면, ‘태화빌딩’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서 있습니다. 그 건물의 이름 속에는 우리가 잊고 지낸 100년 전의 시간들이 조용히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인사동 옛 순화궁 터에 있었던 태화여자관은 원래 친일파 이완용의 저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안순환이라는 인물이 이 집을 임대해 ‘태화관’이라는 요리집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바로 그 장소였습니다. 태화관 후원에 있던 ‘별유천지 6호실’에서 낭독된 독립선언문은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미국 남감리회에서 사회 봉사 활동을 위해 건물 매입3·1운동 이후, 이완용이 이 저택을 매물로 내놓았고 (혹자는 터가 너무 강해서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이를 미국 남감리회 여선교부에서 매입한 뒤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1921년 ‘태화여자관’이라는 사회사업 기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이곳은 한국 최초의 사회복지재단으로 평가되며, 사회교육과 영유아 보건 사업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참고: 서울역사박물관 학술총서 제17권 『100년 전 선교사, 서울을 기록하다』)이후 태화여자관은 근우회, YWCA, 조선여자청년회 등 여성운동 단체들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직업부인협회, 가정부인협회, 연합영아보건회, 연합아동보건회 등의 활동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초기에는 여성의 교육과 자립을 돕는 시설로 출발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고아와 빈곤층을 위한 다양한 복지사업으로 이어졌습니다. 기독교 신앙 교육을 바탕으로 유치원, 탁아소, 성경학원, 요리 및 재봉 교육, 영어 교육까지 다양한 영역의 교육 활동을 펼쳤습니다.● 서울 재개발로 빌딩으로 탈바꿈… 봉사는 명맥이어져1939년에는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고 3층 석조 건물로 새롭게 지었고, 1978년 서울시의 재개발 계획에 따라 이 건물도 철거되고 오늘날의 태화빌딩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교육 기능은 1936년 ‘성신여학교’로 승계되었으며, 현재 태화복지재단은 인사동 태화빌딩 4층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이 재단은 전국에서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는 동시에,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서도 활발한 복지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참고 문헌##: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편, 『믿음의 흔적을 찾아』김태은, 『3.1정신과 여성교육 100년』태화복지재단 홈페이지오늘은 서울 인사동 초입에 위치한 흰색 건물 안에서 100년 전 있었던 전람회 풍경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변천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의 풍경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머금고 있는 거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진 이야기에서 어떤 점을 느끼셨나요?댓글을 통해 여러분의 생각을 함께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강아지가 두 앞발로 문을 딛고 빵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네요. 한시라도 주인이 곁에 없으면 걱정이 되나 봅니다. ―경기 광명시 광명사거리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궁 생과방에서 관람객들이 조선시대 왕실의 별식을 재현한 궁중다과와 궁중약차를 체험하고 있다. 다과 6종과 약차 1종으로 구성된 이 체험은 국가유산청이 주최하는 행사로, 전통 방식으로 다과를 즐기며 경복궁에서 조선시대 문화를 직접 느낄 수 있도록 마련됐다. 행사는 6월 23일까지 진행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봄을 맞아 어딘가에 심겨질 나무가 트럭에 실려 이순신 동상 옆을 지나갑니다. 우리 옆에서 신선한 산소를 많이 내뿜어주기를 기대할게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여기 한 여성과 아이의 사진이 있습니다. 웃지 못하고 멍하거나 힘든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1925년 4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안중근 의사의 동생 가족 입니다. 안중근 선생은 그의 나이 29살이던 1909년 만주 하얼빈역에서 일본 이토 히로부미를 총을 쏘아 사살하고 이듬해 사형당했습니다. 안 의사의 희생은 역사책 뿐 아니라 소설과 영화로 우리 가슴을 뛰게 합니다. 그런데 이 기사는 안 의사의 죽음 이후 15년이 지나는 동안 남아 있던 가족들이 어떻게 삶을 버티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사의 이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사진과 함께 오늘 소개하는 기사는 1925년 4월 10일과 4월 13일 이틀에 걸쳐 실린 “안중근의 계수(季嫂) 최씨 부인의 애화”입니다. 계수는 남자 형제 사이에서 동생의 아내를 이르는 말입니다. 특히 남자 형제가 여러 명일 경우 막내의 부인을 이르는 말입니다. ‘애화(哀話)’라는 부제처럼, 이 이야기는 단순한 가족 비극을 넘어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가족들이 겪은 박해와 빈곤, 사회적 냉대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특히, 안중근 의사의 희생과 의로움이 당시 남아 있던 친척들에게는 오히려 낙인이 되고 고난의 이유가 되었던 현실이 강조됩니다. 다만 피붙이보다 김원식이라는 무명의 청년과 아이의 담임 선생님의 인류애가 그나마 아직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전체 줄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부 요약: “정처 없이 떠나 자유로운 땅을 찾아”안중근의 셋째 동생 봉근은 큰형 안중근의 사형과 둘째 형 명근의 옥살이에 절망하여, 아내와 세 아들을 고향 해주에 두고 망명을 결심.부인 최씨는 세 아이를 키우며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음.점점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며 형제 집에서 구박을 받고, 옹기장사, 유기장사, 행상 등 온갖 일을 해가며 자식들을 키움.맏아들 창익은 학교 졸업 후 재판소와 도청에서 일했으나, ‘안중근 조카’라는 이유로 해고됨. 이후 체신리원 양성소에 합격하여 상경.● 2부 요약: “기러기 나는 계절이면 베개에 떨어지는 눈물”창익이 상경한 뒤 남은 가족들의 삶은 더욱 비참해짐.둘째 아들 창준은 굶주림으로 학교에서 졸도, 급우들과 교사들이 도움을 줌.해주 식당에서 일하는 김원식 청년이 매달 25원씩 후원, 가족의 유일한 생계줄이 됨.그러나 친정 식구들의 냉대, 동생마저 형제를 외면하고, 개가를 권유받는 등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이어짐.남편을 찾아 상해로 떠날 결심을 품음.안중근의 계수 최씨 부인의 애화● 1부 (1925년 4월 10일자 동아일보 기사)◇ 자유로운 땅을 찾아 정처없이 떠나북만주 하얼빈역에서 한번 울린 피스톨의 음향과 함께 교수대 위에서 원한의 눈물을 뿌리고 한 방울 이슬이 된 안중근(安重根)은 4형제인데, 셋째 동생인 봉근(奉根)씨는 큰 형님의 원한 깊은 죽음과 둘째 형님 명근씨의 5년 간의 철창 생활 모든 것이 가슴에 불이 붙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봉근씨는 모든 불합리한 비분 원한을 가슴에 품고 자유가 없는 땅을 벗어나자는 유지대로 『민족을 위하여』라는 굳은 결심으로 사랑하는 아내 최씨 부인(30세)과 당시 5세부터 한 살 된 아들까지 삼형제를 쪽박에 밤 쏟듯이 남겨 두고 정처없는 발길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봉근 씨가 임금 같이 붉고 통통한 어린 뺨 위에 주먹같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석별의 애타는 키스를 어린 이마에 던진 후에 의지할 곳 없는 젊은 부인과 다시 성공하는 날을 굳게 언약하고 떠난 지 10여 년이 지나도 다시 그의 얼굴은 지금까지 고향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기러기 나는 계절이면 베게에 떨어지는 눈물봉근씨를 떠나 보낸 최씨 부인은 굳은 의지를 가진 이로 남편과 같이 즐기던 고향 해주(海州) 땅에서 다시 만나겠다는 결심으로 어린 아들 3형제를 거느리고 짤막짤막하게 전하는 소식을 더 없는 낙으로 삼으며 2,3년간은 두고 간 재산으로 어렵지 않게 생활을 하였습니다. 날이 가고 밤이 가면서 청춘에 끝없는 정서를 풀 곳이 없고 오직 가을 하늘에 짝 잃은 외로운 기러기 날아올 때 청량한 가을 달이 뒷창으로 근심과 초조와 고독과 번민에 찌들어 파리한 그의 얼굴을 비출 때 그는 세상에 고락을 모르는 어린 세 생명의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내는 그 얼굴을 들여다보며 외로운 베게머리에 뜨거운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하며 보통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들들이 작문을 지을 때 아버지를 그리는 글을 지어 가지고 어머니 앞에서 읽을 때 그의 가슴이 메여 터지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그러나 어린 자식의 나날이 느는 재주에 가슴에 막히는 설움이 위로를 받았답니다.◇ 행상을 떠나 옹기 장사가 되어그러나 이 불행한 최씨 부인에게는 또 다시 쓴(苦) 운명의 신이 농락의 손을 그 머리 위에 내렸습니다. 그것은 아무 직없이 없어 수입이 없이 소비만으로 3년이나 쓰고 나니 호구할 방책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할 수 없이 떠날 때 부탁하여 둔 친정되는 해주 서영정에 있는 오라버니의 집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 오라버니는 상당하 재산가로서 불상한 누이 한 사람을 거두지 못할 경우는 아니었으나 세상의 인심은 물욕과 함께 어두어져서 오히려 그 여섯 식구가 그에게는 눈에 가시같기도 하였답니다. 자활(自活)의 정신이 많은 최씨 부인은 그곳에 있음이 심히 괴로웠으나 어린 아들을 학교에 보낼 때 찬밥 덩이라도 한 숟가락씩 먹여 보내기 위하여 모든 굴욕을 무릅쓰고 그 집에 있으면 낮에는 옹기장사 유기장사를 하노라고 연약한 몸에 주린 배를 졸라 매고 동으로 서로 행상하러 다녔답니다. 이리하여 겨우 끼니는 이었으나 그 역시 살 길이 망연하였으므로 눈물을 머금고라도 친가에 기식(寄食)하는 설움을 당치 아니치 못하게 되어 몸이 가루가 되도록 안팎 일을 모조리 보아 주었답니다.◇안씨 조카라고 간 데마다 내쫓겨이렇게 지내는 중에 맏아들 창익이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더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도 어머니의 정경을 살펴 어린 몸으로 마음에 없는 재판소에 급사(給使) 노릇을 하며 밤에는 혼자 책을 읽어 수양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만은 재판소에서는 안중근의 조카라는 혐의로 해고를 하여 버렸습니다. 그 후에 또 도청에 들어갔었지만 다시 나오게 되어 창익은 이를 갈고 쓴 눈물을 뿌리며 할 수 없이 손을 맞잡고 집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 최씨는 그래도 어린 목숨을 위하여 친정에서 쌀을 구걸하였으나 두세 번에 응치 않고 나중에는 할 수 없이 호미(胡米)를 주며 다시 오지 못하게 하였음으로 최씨는 이런 창피하고 쓰린 경우를 당함이 한번뿐이 아니었으므로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비분이 세상에 부모동기의 무정을 원망하고 얻은 호미를 내던진 때도 있었답니다.그 동안 창익은 다행히 경성체신리원 양성소(京城遞信吏員養成所)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되어 상경하게 되었습니다. 홀로 계신 어머니의 슬하를 떠나면서 창익은 일년 후에는 이 괴로움이 적어지리라는 것을 굳게굳게 예약하였답니다.● 2부 (1925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어린 아들 창준이가 배고파서 넘어져이와 같이 창익이가 하루 아침에 불쌍한 어머니와 동생을 두고 간 뒤에 그들의 생활은 더 참담하였습니다. 그 고통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정신적은 물론이지마는 더욱이 물질상으로 심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최씨 부인은 남의 빨래를 빨고 또는 남의 집 곁방 살이를 하여가며 아침저녁으로 연명이나 하여갔습니다. 그러면서도 남편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아들들을 공부시키기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이런 역경에 있는 최씨 부인에게는 다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액상을 당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어떤 하루 날 창준(昌俊)이가 학교에서 우연히 졸도한 일이 있다. 이것은 심한 공복증(空腹症)으로 그윽한 정신에 피로로 인함이었었는데 이와 같이 졸도하매 같은 반 동무 아이들이 이왕부터 마음착하고 공부잘하며 우의가 있는 창준이가 가세가 곤란하여 굶고 다니는 것을 알았으므로 아이들은 일제히 눈물을 흘리며 이 어린 창준이를 구하기 위하여 단돈 몇 십 전씩을 거두기로 하여 붉은 맘에 참된 동정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아이들의 진실된 행동에 그 반 담임 선생도 같이 눈물을 흘리며 그 후부터 자기의 박봉을 뜯어서 어린 창준이의 학비를 돕기로 하였습니다.◇ 김군의 동정 - 매달 25원씩 보조이 참상을 들은 해주 식당에 숙수로 있는 김원식(金元植)(20)군은 곧 자혜의원으로 인도하여 치료케 한 결과 곧 다시 소생케 되었습니다. 그 때에 그 어머니 되는 최씨 부인의 맘이야 어떠하였으리오. 졸도하여 죽어 넘어진 아들은 앞에 있으되 돈 한 푼 없어 자기는 꼼짝할 힘이 없고 당장 창준이가 다니는 학교에 교사로 있는 자기의 친정 아버지가 있으되 그 아들과 며느리의 질투가 무서움인지 어떠냐는 말 한마디 커녕 약 한봉지 값도 주지 않았습니다.더욱이 성마리아 앞에서 자기 누이의 장래를 약속하던 소위 지사인 최씨 부인의 오라버니 되는 이는 고개 한 번 기웃하지 않음을 볼 때에 이 금전으로서만 행사하며 돈! 이것만을 아는 자기 오라버니를 원망하는 이보다 이 더러웁고 추악한 세태를 한없이 저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반면에 친분도 없는, 앞에서 말한 김원식 군이 매달 25원이라는 돈으로 가계를 보태어 줌으로 그 식구에게는 한 줄기의 살 길이 비추었습니다.◇ 없는 자의 설움 - 형제가 남만 못해이렇게 지내는 동안에 어느 덧 여름이었습니다. 어떤 여학교에서 교수하는 자기의 동생이 오라버니의 집에 돌아와서도 한 고개 넘어 살고 있는 형을 한번도 찾아오지 않을뿐더러 최씨 아들과 오라버니 아들을 길에서 한꺼번에 만나도 최씨 아들은 본 체도 않고 오라비의 아들은 쓰다듬어 만지고 귀여워하는 것을 보았다는 어린 아들 창준의 서러운 사정의 하소연을 들을 때 누구나 다르랴 그의 맘에는 한낱 자식을 사랑하는 맘에 분개한 생각을 금치 못하였으나 오직 쓰린 운명 만을 한탄하였을 뿐입니다. 여름 동안에 친정에 와 있을 때 거기서 울려 나오는 풍금 소리를 들으러 거기로 들어가려하면 문까지 거는 일이 있었답니다. 이 뿐 아니라 그의 친정에서는 개가(改嫁)하라고 자못 성가시게 굴었답니다.◇ 남편 찾아 상해로 곧 떠날 터이다이런 가운데서 그의 은인이라 할만한 김군의 도음으로 어린 아이들의 공부를 시키고 지났습니다. 그 기나긴 동안에 한번 간 그의 남편은 소식조차 망연하여 생사까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3년 전에 상해(上海)에서 해주 사람이 그가 기다리는 남편 봉근씨를 만났었는데 그는 자기의 가족을 자기 처남에게 맡기었으므로 아주 안심하더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것을 듣는 최씨 부인의 맘은 더 미여지는 듯 하였습니다. 그 후에 아들 창익이도 상해로 건너간 소식을 들은 최씨 부인은 어린 아들 3형제와 딸 창수(昌壽)를 데리고 좀 더 자유로운 지대로 가서 혹이나 남편을 만날까하는 생각으로 김군과 함께 상해로 며칠 후에 떠날 터이라는데 그 어린 남매들은 수양산 머리에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빨리 떠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합니다. (끝)● 추억과 기억에도 용기가 필요했던 시절지난 3월 26일 서울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에서는 안 의사 순국 115주년 추모식현장을 취재차 다녀왔습니다. 의식있는 일본인들까지 내한해 참석한 추모식은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매년 치러지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게 한 고인의 숭고한 뜻을 많은 사람들이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이어가기 위해 매년 행사가 열리고 어떤 언론들은 그 행사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제 시대 당시에는 유족들이 주변의 두려움과 그로 인한 냉대 속에 외롭게 살았다는 것을 100년 전 기사와 사진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추모하고 기억하는 것도 정치의 영향을 받습니다. 1925년에 언론이 안 의사의 남겨진 친척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한 것도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기사에서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안중근의 동생 이름은 안정근(1885-1949. 건국훈장 독립장)과 안공근(1889~ 사망연도 미상. 건국훈장 독립장)입니다. 기사에서 언급된 안봉근과 안명근(1879~1927. 건국훈장 독립장)은 안 의사의 사촌동생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 사진은 안 의사의 사촌 계수씨와 오촌 조카의 모습인 것입니다. 다만, 당시에는 사촌지간이 같은 동네에서 자라고 아주 가까운 관계이다 보니 신문에서 그들을 형제라고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느껴지셨나요. 좋은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한 담벼락에 홍보 인쇄물을 붙였던 테이프가 덕지덕지 남아 있네요. 인기를 얻고 사랑을 많이 받으면 이렇게 흔적이 남나봅니다. ―서울 마포구 홍익대 앞 거리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네탄야후 이스라엘 총리가 7일(현지시간)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미국 AP통신의 사진에는 뭔가 중요한 게 빠져 있었다. 두 사람이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오벌 오피스에 앉아 있는 모습 말이다. AFP와 UPI 등 다른 통신사들의 사진에는 당연히 두 사람이 악수하는 사진이 있었다. 그런데 미국 AP통신은 그 사진을 찍지 못했다. 대신 백악관으로 들어서는 이스라엘 총리를 맞이하는 트럼프의 사진만 10여 장 전송했다. 이후에 다른 통신사가 POOL(공동취재)로 찍은 사진을 받아 발행을 했지만 전 세계 고객사를 두고 있는 유수 통신사로서는 곤혹스런 일이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트럼프와 참모들은 지금 AP통신과 소송 중이다. 멕시코 만을 미국 만으로 불러달라는 대통령측의 요구를 통신사가 거부한 것을 계기로 백악관 출입을 금지 시켰기 때문이다. 백악관측은 “AP가 특별한 권한을 갖고 트럼프에 접근할 자격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AP통신은 이에 대해 트럼프의 참모 3명을 고소했고, 이달 초 미 연방법원은 AP통신의 요청대로 백악관 출입을 허용하라고 판시했다. 백악관 오벌오피스, 1호기 그리고 백악관 경내에서 이뤄지는 행사에 대해서 취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명령이었다. 형식적으로 AP 통신은 다시 트럼프를 촬영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8일 전송된 사진을 보면 AP통신 사진기자가 트럼프 바로 앞에 근접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런데 이스라엘 총리 면담 사진 등 최근 우리 언론사로 전송되고 있는 사진을 살펴보면, 온전한 접근권(access)를 보장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트럼프와 참모들의 꼼수 작전이 아직 진행 중이라는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AP통신의 백악관 출입 사진기자는 에반 부치(Evan Vucci) 기자이다. 그는 지난 2024년 괴한의 총탄을 맞고 피를 흘리는 트럼프 후보의 사진을 촬영했다(이 사진은 최근 백악관 기자단에 의해 올해의 정치 사진으로 선정됐다). 트럼프의 아이콘 같은 사진을 촬영해 음으로 양으로 미국 대선에서 영향력을 끼쳤지만 그는 최근 몇 달 백악관 출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의 인스타그램에는 취미인 주짓수 사진만 왕창 올라와 있었다.그러다 지난 4월 3일부터 백악관 야외에서 움직이는 트럼프 대통령 사진과 백악관으로 초대된 LA 다저스 선수단 사진 등의 대통령 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백악관 풀 (POOL)에 다시 복귀한 거냐는 인스타 친구들의 댓글에 그는 “아직이다. 그래도 일정한 수준의 취재가 가능하게 되어 행복하다”고 썼다. 트럼프는 언론에 대해 단호하다. 특히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언론은 얼마들지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자신의 지지자들 역시 트럼프의 언론 대응에 대해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고, 확실하게 ‘우리 편’으로 순치된 언론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에반 부치 기자는 “어느 때보다 독립적이고, 당파적이지 않은 포토저널리즘이 필수적인 시대가 되었다. 나는 역사의 초고를 기록하는 시간에 감사한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가로등이 파란 하늘을 등에 지고 세상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평안해 보이네요. 우리도 때로 하늘을 올려다보면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서울 마포구 홍익대 앞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여기 평범해 보이는 가족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진에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의열단이 되어 독립운동 활동을 하러 떠난 가장(家長)의 부재로 가족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들의 고통과 희망을 기자가 르뽀 형식으로 정리했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를 읽기 쉽도록 다시 구성해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그런데 추가 자료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사진 속 앞줄 오른쪽에 있는 작은 소녀가 현재 한국 주요 정치인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름 볕이 돌이라도 녹일 듯 내리쬐던 재작년, 서울을 비롯한 온 나라가 의열단 사건으로 들끓었고 김한 씨는 그 격랑 속에서 5년의 형기를 선고받고 차디찬 감옥에 갇혔습니다. 기자는 김한 씨의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서울 시외 공덕리 224번지 허름한 초가집. 남은 가족들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등불을 밝히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습니다.김한 씨의 노모 이씨는 예순여덟입니다. 백발이 성성했으나 여전히 꼿꼿했고, 젊은 시절의 고운 자취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녀의 곁에는 며느리 배 씨가 있었습니다. 올해 서른여덟, 남편보다 한 해 아래입니다. 배 씨는 두 딸을 품에 안고, 그리움을 삼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큰딸 원정(元貞)은 이화학교 보통과 6학년에 다니고, 작은딸 예정(禮貞)은 아홉 살입니다.갑자기 김한 씨가 잡혀간 이후, 네 식구는 의지할 곳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배 씨의 삶은 하루아침에 바뀌었습니다. 생계를 위해 그녀는 십 리 밖 용산의 고무 공장에 나갔습니다. 아침 여섯 시에 나서서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습니다. 날마다 손에 굳은살이 박히고 몸은 점점 쇠약해졌지만, 그녀는 남편의 사식을 마련하고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습니다. 곱던 얼굴은 고생의 흔적으로 마르고, 눈은 피로에 짓눌려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남편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감옥에서 먹는 거친 콩밥, 그리고 딸들이 아버지를 찾으며 우는 모습이 떠올라, 그녀는 매일같이 눈물을 삼켰습니다.늙은 어머니 이 씨는 그런 며느리를 애처롭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녀는 조석으로 조밥을 지으며 어린 손녀들을 돌보았습니다. 작은딸 예정은 학교에서 공부를 배우면서도 때때로 아버지를 찾으며 울곤 했습니다. 원정이는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던 딸이었습니다. 두 달에 한 번 오는 면회와 편지는 이들의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 김한 씨가 동경으로 증인으로 불려간 후 소식이 끊긴 지도 오래입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가 조선으로 돌아와 다시 면회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밤이 되면, 그들의 집은 희미한 등잔불 하나에 의지했습니다. 낡고 허름한 방은 겨울이면 얼음장처럼 차가웠습니다. 그런 삶 속에서도 이 씨는 기자를 향해 말했습니다.“이렇게 궁한 우리를 찾아주어 고맙소. 늙은 몸이 그날까지 살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며느리를 생각해서라도 하루라도 더 버텨야지요. 가끔 가슴이 미어질 때도 많지만, 참고 또 참습니다. 어린 손녀들이 아버지를 찾으며 우는 모습을 보면, 이 원수 같은 세상을 원망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습니다. 이토록 가난하고, 이토록 외로운 가정. 하지만 그들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라는 이름을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100년 전 김한 씨 가족의 사진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었습니다. 시대의 격랑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살아간 한 가족의 삶을 증명하는 사진이었습니다.사진 속 막내딸 김례정 씨는 어린 시절부터 모진 시간을 견뎌내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201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서 남측 최고령자(당시 96세)로 참석해 다시 한번 역사에 등장했습니다. 헤어진 가족을 다시 만나는 순간, 그녀의 눈에는 100년 전 어머니와 할머니가 흘렸을 눈물, 어린 시절 아버지를 그리며 보낸 긴 밤들이 영화 필름처럼 스쳐 갔을 것입니다.그녀의 아들은 우원식 현 국회의장입니다. 100년 전 신문 사진 속 가족의 이야기가 오늘날까지도 살아 숨쉬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주 백년 사진에서는 한 가족의 사진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들의 표정과 눈빛, 그리고 사진 속에 담긴 삶의 무게가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다가왔나요? 댓글로 생각을 나눠주세요. 다음 주에는 또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사진을 찾아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창문에 매달아 둔 경고판의 글씨가 지워졌습니다. 원래는 ‘쓰레기 투기 금지’ 문구가 쓰여 있었다는데요. 더 이상 경고할 필요가 없어진 걸까요? ―서울 강동구 길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일 오후 서울 양천구 해누리타운에서 ‘2025 양천구 취업박람회’에 참석한 구직자가 면접을 앞두고 퍼스널컬러 진단을 받고 있다. 이날 박람회에는 20개 기업이 참여했다. 미취업 청년과 중장년 150여 명이 박람회 부스를 찾아 현장 면접을 진행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옛 궁궐 앞에 산수유 꽃이 피었네요. 궁궐 주인은 더 이상 없지만 산수유는 매해 봄마다 어김없이 꽃망울을 피워 냅니다. ―서울 종로구 광화문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노부부가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보행신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해서일까요? 뒷모습이 똑 닮아 있습니다. ―경북 포항시 북구 칠성시장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30일 오전 서울 경복궁에서 2025년 전국 수문장 임명 의식이 열리고 있다. 깃발을 든 수문장들이 광화문을 통과한 뒤 흥례문을 향해 걷고 있다. 수문장 임명 의식은 왕이 흥례문에 행차해 수문장을 임명하고 축하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행사다. 올해는 영남 산불을 고려해 행사가 축소됐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철거를 앞둔 건물 밖으로 긴 비닐 호스가 나와 있습니다. 마치 긴 다리를 쭉 뻗은 듯하네요. 실내의 나쁜 공기를 빼내는 용도일까요? ―서울 강동구 길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유치원 때부터 입시 경쟁이 시작될 정도로 교육에 대한 한국인의 열정은 대단합니다. 그런데 정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초등학교 입학이 어렵다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을까요. 카메라를 발견하곤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꼬마수험생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오기도 합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은 초등학교 입학시험이 치러진 날 학교 앞에서 벌어진 풍경입니다.● 초등학교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 모인 학생들 어린 아이들이 학교 정문 앞에 부모들과 함께 서 있습니다. 1925년 3월 25일자 동아일보와 매일신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백년 전인 1925년 3월. 서울 시내 각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서는 입학 선발시험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어린아이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부모의 손을 꼭 잡고 학교로 향했습니다. 조선의 아이들은 소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시험을 치러야 했고, 부모들은 그런 자녀의 장래를 걱정하며 교문 앞에 모여들었습니다.교동보통학교의 시험은 오전 10시에 시작되었지만, 이른 아침 8시부터 수백 명의 학부모와 아이들이 교정에 몰려들었습니다. 시험을 치르러 들어가는 아이들과, 밖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부모들의 얼굴에는 희비가 엇갈렸습니다. 어떤 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어떤 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그러나 시험을 치르는 것만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학교 정원보다 훨씬 많은 아이들이 지원했다는 점이었죠. 1925년, 서울 시내에 있는 17개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할 아동은 5천여 명에 달했지만, 실제로 학교가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3천 명 남짓이었습니다. 약 2천 명의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채 또 한 해를 보내야 했던 거지요.입학 정원이 부족한 문제는 전국적으로 심각했습니다. 수원에서는 학령기에 도달한 아동이 1만 8천 명이었지만, 실제로 공립학교와 사립학교가 수용할 수 있는 학생 수는 4천 5백 명에 불과했습니다. 이처럼 입학난은 도시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중요한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넘치는 학생, 부족한 교실 경남 김해에서는 보통학교 입학 경쟁이 10대 1에 달했습니다. 김해군 내 여러 마을에서 학부모들은 자녀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읍내로 몰려들었습니다. 어떤 이는 밤을 새워 학교 문 앞에서 대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김해보통학교는 남자 120명, 여자 30명, 총 150명만을 선발할 방침이었습니다. 결국, 입학에 실패한 학부모들과 지역 주민들은 군민대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기에 이르렀구요. 주민들은 향교 건물을 임시 교사로 활용할 것, 김해군에 새로운 학교를 신속히 설립할 것, 교육비용을 학구 내 주민들에게 추가 부담시킬 것 등을 결의하고, 이를 관청에 요구하기로 했다.● 입학 시험에서 떨어지면 1년을 집에서 기다려당시 조선인 학생들의 입학 경쟁은 일본인 학생들보다 훨씬 치열했습니다. 경성 내 공립 중등학교를 예로 들면, 일본인 학생들의 지원 초과율은 약 17~18%였지만, 조선인 학생들의 경우 50%를 훌쩍 넘었습니다. 조선인 학생들은 일본인 학생들보다 3배 이상 입학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입학시험을 치르고도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 자녀의 교육을 위해 군청과 학교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부모들. 1925년 조선의 봄은, 새로운 배움을 향한 아이들과 부모들의 간절한 열망으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기대를 온전히 담아낼 만큼 넉넉하지 않았습니다.학교 문 앞에서 결과를 기다리던 부모들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요? 입학을 허락받은 아이들은 기뻐했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또 한 해를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학교 앞에 모인 아이들과 부모를 다룬 저 기사의 제목이 “난관(難關)에 모여든 희비의 얼굴”입니다. 100년 전 조선에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었던 셈입니다. 오늘은 그 시절,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모인 어린이들과 부모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사진 속 풍경에서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리셨나요? 여러분의 초등학교 입학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댓글로 함께 이야기 나눠 주시면 좋겠습니다. 참고 기사: 1922년 3월 18일자 동아일보. 10배나 되는 지원자로 인하여 김해군민이 대회를 열고 결의1925년 3월 9일자 동아일보. 취학부득할 아동 1만3천5백여명 1928년 3월 8일자 동아일보. 조선학생 입학난은 일본학생 3배 반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