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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의힘 의원들 노트북에 붙은 피켓 “가짜 뉴스 공장 민주당”이번 주 초였던 9월 2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가 여야 간 고성이 오가는 공방전으로 난장판이었습니다. 추미애 법사위원장이 국민의힘 의원들이 노트북에 붙인 종이의 문구 ‘정치 공작, 가짜뉴스 공장 민주당’을 문제 삼으며 “이렇게 하는 게 윤석열 오빠한테 무슨 도움이 되냐”고 비꼬았고, 이에 나경원 의원이 “여기서 윤석열 얘기가 왜 나오냐”고 맞섰습니다. 원래 국민의힘 의원들은 노트북에 나란히 붙은 피켓 문구가 화면과 사진으로 국민들에게 전달되길 바랬을지 모르지만 실제 보도된 것은 서로 고함을 치고 있는 추미애 의원과 나경원 의원의 투샷이었습니다. 국회 풍경에 한숨을 내쉬는 국민들이 늘고 있습니다. 국회에서 의원들이 노트북 겉에 구호를 써 붙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에 말할 기회도 많고 채널도 많은 국회의원들이 굳이 피켓으로 항의하는 모습은, 한 발 떨어져 보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장면입니다. ● 피켓과 피케팅의 기원‘피켓(picket)’은 원래 경계병을 의미하는 군사용 용어에서 시작됐습니다. 전투 중인 군대 앞에 배치되어 적의 접근을 막는 병력이라는 의미에서 시작되어 ‘다른 사람들이 공장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배치된 파업 중인 노동자’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고 합니다. 피케팅은 피켓을 들고 있는 행위를 말합니다. 한국에서는 1970~80년대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속에서 피켓 시위가 널리 쓰였습니다. 대규모 집회가 제한되던 시절, 피켓은 소수 인원이 위험을 줄이면서도 의사를 드러낼 수 있는 장치였으니까요. ‘OO노동자 단결투쟁’ 같은 문구가 적힌 피켓은 집단의 결속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2000년대 들어 헌법재판소가 1인 시위를 합법으로 인정하면서, 피켓은 시민들의 일상적인 정치 표현 수단으로도 자리 잡았습니다. 국회 앞이나 정부청사 앞에서 교대로 피켓을 들고 선 이들의 모습은 서울의 흔한 풍경이 되었습니다. ● 국회 안으로 들어온 피켓그러면 피켓이 국회 안으로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요? 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의 기록을 중심으로 유추해보았습니다. 1992년 제14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 탈락설이 나돌던 정웅 의원 지역구민들이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였습니다. 정치인보다는 지역민들이 의사를 드러내는 방식이었습니다.2001년에는 부패방지입법시민연대 이남주 사무총장이 국회 앞에서 ‘빈껍데기 부패방지법 속빈강정 돈세탁 방조법’이라 적힌 피켓으로 48시간 철야 1인 시위를 벌였습니다. 정치권 바깥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피켓으로 표현된 사례였습니다.피켓이 국회 본회의장 안으로 들어 온 것은 2004년이었습니다.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여야 합의에 항의하며 피켓 시위를 벌였습니다. 대부분의 언론이 이 장면을 보도했습니다. 이후 2009년 자유선진당 임영호 의원이 ‘세종시 특별법 제정하라’는 피켓을 들며 항의하는 등, 피켓은 국회 내 익숙한 장면이 됐습니다.● 급기야 국회의원 노트북에 붙기 시작한 피켓국회의원들이 노트북에 문구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2011년 즈음입니다. 당시 국회 교과위 회의에서 야당 의원들은 ‘반값 등록금 약속 지켜라’라는 문구를, 여당 의원들은 ‘민주당 정권 10년 동안 등록금 2배 인상 사과하라’는 문구를 노트북에 붙였습니다. 서로 다른 문구를 맞붙이며 회의를 진행하는 모습은 여야간의 갈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싶어하는 기자들에겐 쉬운 취재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관행이 국회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후 2015년 교육부 종합국감, 2017년 김상곤 교육부 장관 인사청문회 등에서도 피켓과 문구 붙이기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국회의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피켓 시위 그런데 이런 관행이 지금도 적절한 방식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피켓은 원래 발언권이 없고 힘이 약한 사람들이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발언권을 가진 의원들이 피켓을 들고 있습니다. 피켓은 한때 시민들에게 필요한 도구였지만, 국회 안에서는 그저 식상한 장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 많은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가진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개념으로 ‘포토제닉’하다고 해서 유권자의 마음을 얻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정치가 관심을 얻으려면, 이제 피켓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설득해야 합니다. 과거 흑백 프린터로 뽑아 붙이던 문구는 이제 정교하게 인쇄된 인쇄물로 바뀌었지만, 이를 정치 발전으로 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오히려 피켓이나 소품을 활용해 벌이는 시선 끌기 경쟁은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상징이 아닐까요. 기자들은 왜 그런 장면 만을 보도하냐는 비판도 많습니다. 저 스스로 항상 갈등하는 지점입니다. 자극적인 장면에 카메라가 가는 이유는 ‘그림이 되는 게 뉴스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혼자서 육하원칙에 따라 정책에 대해 설명하는 것보다는 여러명이 통일된 소품을 준비해 시각을 끄는 게 노출에 더 유리하다는 것을 국회의원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카메라를 의식한 일들이 많이 벌어집니다. 요즘에는 의원실에서 자체 제작하는 ‘짤’을 염두에 둔 행동도 많다는게 현장의 해석입니다.● 유권자들의 의식 수준을 못 따라오는 정치 문화 시대의 변화에도 변하지 않은, 낡은 시위 방식은 이제 역사 속으로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 이번 주였습니다. 물론, 상임위 위원장 자리를 차지한 6선의 여당 국회의원이 상대방 당을 향해 모멸감을 주는 표현을 하는 것이 국민들 다수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민들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중진 의원들의 막말과 구태는 조용히 지지율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이슈의 중심이 되었다고 해서 그게 마냥 유리한 것만은 아니라는 무거운 경고를 하면서 누가 먼저 선진화된 정치를 할지 지켜보고 있는 것 아닐까요?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보태 주세요.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열린 미국 로스앤젤레스 출신 작가 마크 브래드퍼드 전시회에서 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도시에서 버려진 사물을 활용해 작품을 만드는 작업 방식으로 잘 알려진 작가의 이번 전시는 2026년 1월 25일까지 이어진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철조망이 금단의 땅을 넘는 사람을 경계하고, 거미줄이 틈새를 노려 공중낙하하는 벌레를 붙잡습니다. 물샐틈없는 콤비 수비력을 자랑하네요. ―경기 파주시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신생아 이동 중’이라고 적힌 안내문이 앞 차량에 붙어 있네요. 빛을 본 지 며칠 안 된 아기를 놀라게 할 순 없지요. 아기의 안전을 지켜 주세요∼.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앞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3일 서울 종로구 석파정 서울미술관 천경자 작고 10주기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전시회장에서 관람객들이 작품을 보고 있다. 이 전시는 천경자 작가 생애 마지막 전시 ‘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 이후 최대 규모 기획으로, 작가의 대표 채색화 80여 점이 집대성돼 내년 1월 25일까지 이어진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종점까지 간다며 자신의 목적지를 전하는 안내판. 혹시 앉을 자리가 필요한 승객에게 ‘죄송’하다고 말하는 작은 배려에 웃음이 납니다. ―서울 지하철 7호선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100년 전 가을 풍경 사진 몇 장…이번 주 ‘백년사진’은 100년 전 신문 지면에 실린 가을 풍경 사진 다섯 장을 골랐습니다.계절의 변화는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들의 관심사였습니다. 카메라도, 이동 수단도, 인쇄의 수고로움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던 시절에 정성껏 찍고, 엄선해 지면에 실은 사진들이라 더 소중합니다.사진들을 보면 첫 사진은 고즈넉한 기와집 지붕 위로 뻗은 나뭇가지와 맑은 하늘을 담았습니다. 두 번째 사진은 곡식이 익어가는 가을의 석양 풍경입니다. 세번째 사진 (아래)는 들판에 선 인물이 곡식을 지키기 위해 새를 쫒느라 허공을 향해 손을 치켜들고 있고 저 멀리 야트막한 산들이 보입니다. 네 번째 사진(아래)은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풀을 뜯는 말과 뒤편 양옥집을 보여주면서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사진은 장대비 속 우산을 쓴 사람들이 젖은 도로 위를 걷는 풍경을 전했습니다.그런데 이 다섯 장의 풍경 사진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있어도 풍경 속의 작은 점처럼 스쳐 지나가듯 담겼습니다. 오늘날 신문 사진이나 작가들의 풍경 사진이 사람을 풍경의 일부로 반드시 포함하려 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풍경 사진에 얼굴은 언제부터 들어왔을까사진기자인 제 눈에는, 100년 전 풍경사진은 자연 자체에 집중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당시 시민의 초상권이 지금처럼 문제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진가들이 굳이 사람의 얼굴을 넣으려 하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합니다.그렇다면 한국의 풍경 사진 속에 사람의 얼굴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건 언제였을까요? 정확한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이미지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1980년대 후반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하지만 지금은 반대로 사람들의 얼굴이 풍경 사진에서 다시 사라지고 있습니다. 요즘 서울 프레스센터에 있는 언론중재위원회에는 초상권 관련 다툼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다들 알아서 모자이크를 하기 때문입니다.● 거리 지도에 찍힌 시민 얼굴, 어떻게 할 것인가최근 한국 사회는 개인정보 유출로 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SK텔레콤과 KT의 고객 정보가 해킹당했고, 롯데카드 고객 정보도 새어나간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이 와중에 자율주행차 기술 개발을 위한 인공지능(AI) 학습용 거리 지도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쟁점으로 떠올랐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5일 “AI가 거리에서 사람 얼굴 좀 보면 어떠냐”며 규제 혁파를 지시하기도 했습니다.현행 규정상 자율주행차와 로봇이 촬영한 영상에서 얼굴 등 개인 식별 정보는 모자이크 처리해야 하고, 원본 영상은 원칙적으로 활용할 수 없습니다. 작년 2월부터 카카오모빌리티 등 일부 기업에 한해 규제 샌드박스가 적용돼 원본 영상 활용이 허용되고 있을 뿐입니다.신문과 방송에서도 거의 모든 얼굴이 모자이크되는 현실. 정부와 사회가 이 문제를 창의적으로 풀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초상권의 대안은 무엇일까100년 전 사진은 해상도가 낮아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고, 사진기자들 역시 사람의 얼굴을 풍경 속에 의도적으로 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문에 시민의 얼굴이 실리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하지만 오늘날은 과도한 얼굴 노출도 문제지만, 지금처럼 무분별한 모자이크 역시 어색합니다. 지금 신문과 방송에서 얼굴이 온전히 드러나는 직업군은 정치인과 연예인뿐입니다.100년 전 자연에 집중했던 풍경 사진을 통해, 오늘날 개인정보와 초상권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여러분은 풍경 사진 속에 사람의 얼굴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지금처럼 모든 얼굴을 모자이크하는 게 맞을까요 아니면 다른 방법이 필요할까요?여러분의 생각을 댓글로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건물 천장을 뚫고 바닥으로 쏟아지는 빛 아래 한 인물이 앉아 있다. 18일 대통령실이 공개한 미국 타임(TIME) 매거진에 실린 이재명 대통령의 사진이 눈길을 끈다. 대통령실은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00일을 맞아 지난 3일 타임 아시아지역 상임편집장 찰리 캠벨과 특집 인터뷰를 진행했다고 밝히며, 표지와 기사 원본을 함께 공개했다.표지 사진의 제목은 ‘가교(The Bridge)’다. 표지 문구에는 “이재명 대통령이 한국을 리부팅하면서 도널드 트럼프의 마음을 끌어들이려 한다”는 표현이 담겼다. ● 타임이 선택한 패션 사진가, 홍장현이번 표지 사진은 타임지가 패션 사진가 홍장현 씨에게 의뢰해 촬영한 것이다. 홍 작가는 세계적 패션 잡지와 글로벌 브랜드 화보를 맡아온 인물로, 독창적인 조명과 연출을 통해 피사체의 상징성을 극대화하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BTS 멤버들의 사진을 촬영하기도 하며 타임지의 의뢰를 받아 문재인 전 대통령의 사진도 촬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타임지는 한국의 정치인과 사회현상을 보도하면서 한국 내 사진가를 상황에 맞춰 고용하는 방식으로 사진을 확보한다. ●사진 속 빛의 연출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빛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공 조명을 ‘단절’시켜 촬영한 사진이다. 전문가들은 이 사진에 사용된 조명을 두고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중부대학교 사진영상학과 김대욱 교수는 “영상과 사진에 변화를 줄 때 사용하는 줌 스팟(Zoom Spot) 조명으로 얼굴에 일자 형태의 빛을 준 것 같다”며 “배경에도 창문 모양 줌 스팟 조명을 쓰고, 필라이트로 얼굴 기본 조명을 더한 것 같아 총 3개의 조명이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몇 년 전 프로필 사진에서 유행한 방식으로, 필요에 따라 컬러 필터나 LED 조명으로 색감을 입히기도 한다는 것이다.또 다른 전문가들은 “촬영할 때 빛의 방향을 의도적으로 끊어 얼굴을 가로지르게 했다”며 “패션 사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라고 덧붙였다. 즉, 자연광이든 인공조명이든 양쪽에서 들어오는 빛을 차단시켜 일직선의 강렬한 빛을 만들어낸 연출이라는 설명이다.●정형을 벗어난 새로운 이미지김대중 대통령의 청와대 전속 사진가로 활동했던 홍성규 작가는 이번 사진에 대해 “저런 사진을 찍도록 허락하고 받아들이는 대통령실 사람들, 그리고 대통령 자신이 과거 정부와 차별된다”고 평가했다. 전통적인 대통령 사진이 권위와 무게감을 강조하는 정형화된 구도였다면, 이번 타임 표지는 상징적 조명을 통해 대통령의 이미지를 새롭게 구축하는데 일조할 수도 있다는 해석도 있다. 빛이 만들어낸 단절과 연결의 선. 타임지의 표지 속 이재명 대통령은 ‘가교’라는 제목과 절묘하게 어울리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5일 오후 서울 강동구 강일 리버스트 경로당에서 열린 ‘찾아가는 어르신 안심 디지털 교육’에서 어르신들이 키오스크 이용법을 배우고 있다. 서울시와 강동구는 6월부터 관내 경로당을 순회해 보이스피싱·스미싱 예방과 키오스크 등 디지털 기기 사용법을 교육하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6일 서울 코엑스 마곡 르웨스트홀에서 열린 제8회 항공산업 잡페어를 찾은 구직자들이 상담을 받고 있다. 올해로 8회째를 맞았고 2018년부터 매년 열려 온 대표적인 항공산업 취업 행사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화물차에 한 장의 단풍잎이 달라붙었습니다. 잠깐 내린 비가 접착제 역할을 했나 보네요. 이들이 빚어낸 가을 풍경에 계절의 변화를 실감합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참새 한 마리가 인천공항 출국장 카운터 앞에 두 발을 딛고 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마치 “여기 서 있으면, 저도 외국에 갈 수 있나요”라고 묻는 것 같네요.―인천국제공항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백 년 전 구경거리“그거 봤어? 재밌지 않아?”“그러게 재밌더라. 예쁘기도 하고 좀 어색하기도 하고…”짧은 순간 포착된 이미지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고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짧은 영상이나 패러디 이미지인 ‘밈’ 이전에도 우리는 ‘사진’을 통해 비슷한 경험을 했다. 100년 전 지난 주 동아일보에는 ‘세계의 여자 풍속’ 시리즈가 연재되고 있었다. 지금의 시선으로 봐도 낯선, 세계 여러 나라 여성들이 카메라 앞에 서 있는 사진이 연재되었다. 당시 독자들과 시민 사이에서는 꽤나 흥미로운 대화 소재였을 것이다.● 천안문 망루에 양복을 입고 올라간 김정은최근 북한 뉴스가 많다. 개인적으로 중국 천안문 망루에 올라가서 ‘전승 80주년 기념 열병식’을 보는 북중러 최고지도자의 복장이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었다. 러시아 푸틴은 평소 외교 무대에서처럼 양복을 입을테고 중국 시진핑은 평소에는 양복을 입지만, 전승절 행사에는 ‘중산복’을 입을 텐데 북한 김정은은 과연 무엇을 입을까 하는 점에 관심이었다. 트럼프 대통령과 우리 문재인 대통령과의 외교 만남에서 김정은은 인민복을 입었었다. 평소 북한 내부에서 행사를 할 때도 입는 옷이다. 40대의, 유럽에서 유학생활을 한 젊은 지도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지만 그는 주로 인민복을 입는다.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 김일성과 평생 동안 아버지 김정일이 입었던 종류의 옷이다. 혁명하던 시대의 사람들처럼, 인민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색깔은 자신이 좋아하는 짙은 감색이다. 그런데 만약 망루에 올라 선 북중러 3명의 지도자 중 러시아 푸틴이 양복을 입고, 중국과 북한 지도자가 외형적으로 유사한 중산복과 인민복을 입고 세계의 카메라 앞에 선다면 어땠을까? 시진핑이 입는 일종의 ‘행사용 의복’을 김정은도 옆에서 같이 입고 있었다면 ‘밈’으로 확대재생산되어 입방아에 오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TPO(Time, Place, Occasion)에 맞지 않는 것이다. 북한 김정은의 참모들은 김정은의 최종 복장을 ‘양복’으로 결정했다. 중국에 들어가고 나오는 전용 열차에서 입었던 인민복 대신에 정상국가 지도자들과 똑같은 양복을 입었다. 그 결과 66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인 북중러 최고지도자들의 ‘쓰리 샷’은 자연스럽게 연출됐다. ● “나를 탤런트로 만들 셈이야?” 대통령의 호통시각적으로 어떻게 준비해서 대중이나 국제 무대에 서느냐 하는 것은 이제 정치인들에게는 평범하고도 당연한 과제이다. 보여주는 것을 중시하는 사회주의 국가와 이미지 정치의 끝판을 보여주는 미국에서는 그 과제를 풀어 온 역사가 길고 또 노하우도 많이 축적되어 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미국의 이미지 정치를 10이라고 하면 우리는 5 정도 될까 아니면 10에 근접했을까? 1980년대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던 군인 출신 전두환은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거부감이 컸었다. 포즈를 이렇게 취하면 사진이 잘 나올 것 같다는 공무원 카메라맨의 요청에 “나를 탤런트로 만들 셈이야?”라고 호통을 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이미지 정치 역사는 대략 40년 쯤 된 셈이다. 그 40년 동안 우리 정치의 시각적 포장은 급속한 발전을 했다. ● 시선을 끄는 정치인의 복장지난 주 우리나라 국회 개원식에 참석한 국회의원들의 복장이 화제였다. 앞서 우원식 국회의장이 백혜련 민주당 의원 제안을 받아 개회식 때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높이기 위해 여야 의원들에게 한복을 입자고 요청했다. 여당인 민주당과 친여성향 조국혁신당 그리고 보수성향의 개혁신당 등은 한복을 입고 등장했다. 일부 의원은 영화 케이팝데몬헌터스 유행에 발맞춰 ‘갓’까지 쓰고 나왔다. 반면 정부 정책에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국민의힘 의원들은 검은 양복에 근조 리본을 단 차림으로 참석했다. 사진으로 남은 순간은 보는 사람들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특이한 사진과 화면이 만들어지고 나면 다음 날(신문 기준으로) 사람들은 어제 본 장면을 소재로 이야기를 나눈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뉴스를 접하는 시대라 이미지도 하루에 몇 번씩 만들어지고 소멸한다. 밈으로 만들어 유통되면서 사람들의 평가도 빠르다.● 한복과 상복, 누가 이긴 경쟁이었을까국회 개원식에 단체로 의원들이 한복을 입고 의원들이 등원한 것은 최근에는 없었던 일이다. 해방 직후 나라가 만들어 졌을 때 개원 국회의 개원식 장면에서는 몇몇 의원들이 두루마기를 입고 등장하긴 했었다. 이미지는 그냥 보여지는 게 아니다. 이미지는 서로 경쟁한다. 그래서 쉬지 않고 새로운 이미지가 시도된다. 세계에 한복을 알리려는 시도는 문화 확산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한복 이미지와 상복 이미지는 경쟁했다. 사진기자의 눈으로 보면 문화적 이벤트에서 민주당이 승리했다. 한복은 포토제닉했고 국민의힘 의원들이 주장한 상복은 미흡했다. 아예 노란 톤의 상여 행렬 때 입는 옷을 입었어야 눈과 카메라에 띄는 것은 아니었나 하는 주변 사진기자들의 의견도 있었다. 세계의 시청자들에게 한복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 얼마나 역할을 했는지는 파악되지 않지만 여야가 다른 복장으로 등장한 2025년 국회 개원식은 뉴스가 되었다. 흑백처럼 선과악처럼 이분법으로 구분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여당과 국회의장이 이긴 경쟁이었을까. 보는 사람들에게 감동이나 감성적 치유를 주었을까? 정치 전체가 패배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인터넷을 통해 원래 지지하던 사람들에게 전달된 영상에 달린 ‘좋아요’ 숫자 만큼 일반 국민들의 지지도 받았을까. 불편한 사람들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만약 국민의힘 의원들이 이번처럼 ‘회사 부장님 부친상에 가는 직장인 복장’ 대신에 진짜 상복을 입고 등원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국내 뿐만 아니라 외신의 주목까지 받았겠지만 한국 정치가 국제 사회에서 국민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결론이었다. 그나마 절제한 게 다행이었다. 특이한 장면을 연출하는 것은 시선을 끌기에는 좋다. 그렇다고 꼭 좋은 평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TPO에 맞추는 복장이 중요하다는 걸 지난 주 베이징 천안문 망루와 우리나라 국회의사당을 보며 느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타이어를 쌓아 올린 화분 위로 해바라기가 솟아 있습니다. 새 옷을 갈아입은 붉은 타이어는 자동차가 아닌 해바라기의 보금자리로 거듭났네요. ―서울 강동구 성내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인민복 복장으로 전용 열차에 오른 김정은 2일 오전 북한은 김정은이 열차를 타고 중국으로 향했다는 것을 외부 세계를 향해 보여줬다. 이날 새벽에 공개된 노동신문에는 총 3장의 관련 사진이 실렸는데 전용열차 외부 모습, 전용열차 탑승 전 환담하는 김정은, 전용열차 내부에서 회의하는 김정은 모습이 포함됐다. 전용열차 안에는 미국 대통령실과 유사한 엠블럼이 벽에 붙어 있었고 같은 문양의 서류철도 보였다. 정상국가를 강조하려는 북한의 노력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평양을 떠나는 열차에 탄 김정은은 북한 내부에서 현지지도를 할 때 입는 것과 마찬가지인 ‘인민복’을 입었다. ● 김일성은 양복, 김정일과 김정은은 인민복 인민복은 할아버지 김일성 시대 혁명하던 사람들이 입던 옷이다. 북한에서 인민복을 유행시킨 사람은 김일성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1945년 해방 직후 소련군의 지지를 받으며 북한 대중들에게 얼굴을 드러낸 33세의 지도자 김일성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1950년 1월 농림수산부문지도일군 연석회의에서 연설하는 사진 속에서 김일성은 양복을 입고 있고, 1961년 9월 개최된 제 4차 당대회 때도 양복이었다. 1967년 6월 양복에 모자 쓴 채 옆구리에 팔을 올리고 인민 속에서 웃는 김일성 모습도 확인된다. 하지만 북한 최고지도자의 공식 복장은 인민복이었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초까지 현지지도를 하거나 공식 행사를 할 때 그리고 중국을 방문할 때 김일성은 주로 인민복을 입었다. 김정일이 아버지의 후계자로 북한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김일성은 1984년 7월까지 인민복만 입었다. 1984년 7월 17일 잠비아 공화국 외교부 대표단 접견하면서부터 사망시까지 양복을 입었다.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자신이 ‘닫긴 옷’(인민복)을 입고 모든 일을 할테니 아버지는 제낀 옷 (양복)을 입고 쉬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김정일에게 인민복은 일하는 사람의 복장인 것이다. 어쩌면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 시대와 달리 경제적으로 낙후된 북한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서 양복을 입을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다. 김정일은 사망할 때까지 거의 양복을 입지 않았고 인민복만 입었다. 북한 공식 매체에서 양복을 입은 김정일의 모습 사진은 거의 없었고, 1980년대 촬영된 ‘양복을 입고 상품박람회를 둘러보는 모습’이 김정일의 유일한 양복 사진이었다. 다만 김정일은 2008년 건강이상설 이후 사망 때까지 몇 번 양복을 입고 등장했다. 2009년 8월 김정숙 해군대학 시찰 기념사진 등 현지지도를 하는 모습에서 기존의 인민복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양복을 입고 등장했다. 자신이 권력을 잡은 후 아버지 김일성에게 양복을 권했듯이 아들이 권력을 이행받기 시작하자 김정일 본인도 비로소 양복을 입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분석이 가능하다. 김정은의 경우는 좀 다르다. 2010년 9월 북한 정치에 공식 등장한 이후 김정은은 처음에는 인민복 차림으로 공개 활동을 했다. 김정은이 양복 차림으로 찍은 사진이 처음 공개된 것은 2012년 4월 12일이다. 당시 노동신문은 전날 열린 노동당 제4차 대표자회의에서 김정은이 노동당 제1비서에 추대된 소식을 전하며 양복에 넥타이 차림으로 포즈를 취한 김정은의 대형 사진을 게재했다. 이후 김정은이 행사를 하면서 양복 입은 모습이 등장했다. 2016년 5월 7일 조선로동당 제 7차 대회 개회사를 하면서 양복과 타이 차림으로 등장했고 당대회 직후 첫 공개 일정인 2016년 5월 13일 기계설비 공장을 현지지도하면서 현지지도 복장으로는 처음으로 양복을 입었다. 이후 양복 입은 김정은은 더 이상 특별한 이미지가 아니다. ● 외교 무대에서 김정은의 복장외교무대에서 김정은은 대체로 인민복을 고수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면서 그는 인민복을 입었다. 2019년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과 악수할 때도 인민복을 입었다. 다만, 2023년 러시아를 방문할 때 김정은은 열차를 탈 때는 인민복을 입었지만 열차에서 내리면서 양복에 넥타이로 갈아입은 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났다. ● 혁명하던 시절 사람들이 입던 옷김정은이 입는 인민복을 북한에서는 ‘맞섶 양복’ 또는 ‘닫긴 깃 양복’이라고 하며 주민들은 일본어을 어원으로 둔 ‘쯔메르 양복’이라는 표현을 쓴다. 인민복은 북한의 발명품은 아니다. 인도의 간디와 우리나라 김구 선생 등의 사진에서도 비슷한 형식의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국에서는 ‘중산복(中山服)’이라고 부른다. 신해혁명으로 봉건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혁명정부 대원수로 취임한 쑨원(孫文)의 호가 ‘중산’이다. 쑨원을 계승한 장제스과 마오쩌둥도 중산복을 즐겨 입었고 그래서 서방에서는 ‘마오룩(Mao Look)‘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 중산복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개혁개방 이후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83년 후야오방 총서기가 선전 특구를 방문해 “특구 간부는 옷을 잘 입어야 한다. 과감하게 양복을 입어라” 라고 지시를 내리면서 양복이 중산복을 대체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14년 2월 네덜란드를 방문해 국왕 부부 초청 만찬에 참석하면서 시진핑은 개량 중산복을 입었지만 대체로 외교무대에서는 양복을 입는다.● 인민복 입는 김정은, 시진핑과 깔맞춤 하게 될까내일 3일 중국 베이징에서는 ‘전승 80주년’ 기념행사와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김정은은 천안문 망루에 올라가 군중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시진핑과 푸틴과 나란히 선 채.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지도자들은 북한을 비롯한 외국 정상들을 만날 때 양복을 입는다. 시진핑도 마찬가지다. 다만 예외적으로 중산복을 입고 행사에 참석하는 경우는 있다. 10년 전인 2015년 9월 3일 ‘전승 7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을 때 시진핑은 인민복을 입고 망루에 섰다. 옆에 있던 전직 장쩌민과 후진타오 주석이 양복을 입었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푸틴은 양복을, 박근혜 대통령은 노란색 정장을 입었다. 시진핑이 10년 전 행사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인민복을 입고 망루에 오른다면 왼편에 서는 김정은과 유사한 옷을 입고 서게 될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에 서는 푸틴의 양복과는 대조를 이룰 것을 예상할 수 있다. 혁명하던 시절에 유행하던 인민복을 입고 국제 무대에 등장하고 있는 김정은을 보면서 오랜만에 중산복을 입어 보는 시진핑은 무슨 생각을 할까.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북한 스나이퍼의 등장보이지 않는 곳에서 강력한 총기류를 갖고 타깃을 노리는 사람을 스나이퍼(저격수)라고 한다. 일반인들이 저격수를 볼 기회는 많지 않다. 숨어서 임무를 수행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27일 북한이 공개한 저격수 부대 훈련 모습과 김정은의 기념사진은 특별하기도 했고 의아하기도 했다. 북한 노동신문은 김정은이 27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직속 특수작전 훈련기지를 방문해 저격수 부대를 시찰하는 모습을 28일 보도했다. 전세계 국가들은 모두 군과 경찰 조직 안에 저격수 부대를 갖고 있다. 대통령 및 국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자국을 찾는 VIP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대통령 취임식 또는 주요 국제 행사 현장에 가면 저격수를 볼 수 있다. 외부인의 접근이 차단된 건물 위에서 조준경을 이용해 행사장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확인한다. 그래서 저격수의 모습은 아래에서 건물 위를 촬영한 사진으로 독자에게 전달된다. 가끔 저격수 바로 옆에서 촬영한 사진을 볼 수 있는 것은, 사전에 저격수 부대 담당자들과 협의를 해서 일종의 연출 상황을 만들어서 촬영한 사진이다. 부대 담당자들 입장에서는 주요 행사의 경호 준비 태세가 완벽하다는 것을 홍보하기 위해서 촬영에 협조한다. 경호원을 많이 노출시킴으로써 테러의 의도를 사전에 차단하는 위력경호 효과와 비슷하다. 이번에 북한이 공개한 스나이퍼 사진들은 독특하다. 실제 경호 작전을 수행하는 사진처럼 숨어 있는 모습을 촬영한 것도 아닌데다 최고권력자가 직접 그들의 훈련을 참관하고 기념사진까지 찍었기 때문이다. ● 한국의 스나이퍼사진기자들은 저격수를 발견하면 망원렌즈를 활용해 촬영한다. 하지만 자주 보도하지는 않는 불문율을 갖고 있다. 보안 문제라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도되는 경우는 홍보 담당자와 사후에 협의를 마쳤다고 볼 수 있다. 또는 실제 작전에 투입된 모습이 뉴스 그 자체가 되는 경우이다. 동아일보 DB에서 저격수 키워드로 검색했더니 사진의 종류와 숫자는 빈약했다. 개인적으로 2007년 6월 경찰특공대 훈련에서 긴 총을 담당하는 저격수를 기록한 적이 있다. 2011년 4월 12일 촬영된 사진의 사진설명은 “저격수로 선발된 예비군들이 12일 오후 수도방위사령부 북한산부대에서 조준경이 부착된 소총으로 실거리 사격을 하고 있다. 국방부는 북한의 특수전 등을 대비해 예비군 저격수를 3만명 육성할 계획이다”였다.북한이 공개한 저격수들의 위력적인 모습과는 대조적인 이미지이다. 다만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육군 1군단 특공연대 저격수 팀이 육군을 대표해 2024년 4월 5일부터 12일까지 미국 조지아주 포트무어에 위치한 미 육군 저격수 스쿨에서 열린 ‘제 24회 미 국제 저격수 대회에 출전했다”는 뉴스에서 한국의 스나이퍼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22년에는 제 1회 해병대 사령관배 저격수 경연대회가 국내에서 개최되기도 했었다. 레거시 미디어에서는 다루지 않는 ‘무서운’군인의 모습들이 인터넷에는 계속 기록되어 있었다. ● 영화가 아니라 충격적인, 실제 스나이퍼 이미지를 노출시킨 이유는이번에 북한이 공개한 저격수들은 잡초더미로 위장한 ‘길리슈트(Ghillie Suit)‘를 착용하고 있다. 자연 속에 은신하기 위해 저격수들이 옷에 붙이는, 저격수들의 필수품이다. 영화가 아닌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저격수 옆에, 게다가 군복과 무기가 주는 섬뜩한 이미지 옆에 서 있는 김정은의 모습이 의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김정은이 자신을 호위하는 부대원들의 충성심을 고양시키려고 현장을 찾고 신문과 방송을 통해 얼굴을 홍보해준 것이라는 분석도 가능하고, 중국 전승절 행사를 앞두고 국방 성과를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국제 사회에 자랑하기 위한 것인라는 분석도 나온다. 김정은이 이날 실탄사격훈련과 종합특수체육훈련을 지켜 본 후 “놈들이 동무들을 보기만 해도 공포에 떨게해야 하오”라고 고무격려했다는 노동신문의 보도는 북한이 노출시킨, 특수부대 모습이 우리를 향한 심리전이기도 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두터운 길리슈트를 입은 군인과 함께 찍은 김정은 사진은 그 자체로 시선을 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북한 사진은 김정은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연출일까 아니면 국제 사회를 향한 생존 전략일까.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소리가 지워진 추모의 장면눈물로 가득한 현장. 그러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8월 22일, 북한 노동신문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된 조선인민군 장병들이 귀국해 훈장을 받는 장면을 보도했다. 이어 전사자들의 초상 앞에서 국화를 바치고, 유족들을 위로하는 김정은의 모습도 공개했다. 장소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 청사였다. 먼 타국에서 희생된 젊은 군인들을 국가가 최대한 예우한다는 형식이었다.연단에 설치된 액자 앞을 줄을 지어 지나가면서 어머니들은 아들의 사진을 어루만지며 울음을 참지 못한다. 젊은 군인들과 남편을 잃은 미망인과 아빠를 잃은 아이들의 우는 모습도 보인다. 북한 내부 방송과 유튜브를 통해 북한 당국이 공개한 현장 영상에는 전우를 잃고 살아 돌아와 훈장을 받는 군인들과 유족들의 울음 소리가 없었다. 북한 선전 매체는 행사장의 현장음을 모두 지우고, 아나운서의 멘트와 음악으로 화면을 덮었다. 화면 속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표정만 볼 수 있을 뿐, 오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북한은 ‘침묵의 추모’를 의도적으로 연출했다. 눈물은 허용하지만, 통곡은 제어한 것이다. ● 라운드형 추모의 벽과 생전의 사진행사의 형식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액자 속 얼굴 사진이 차례로 놓이고, 정치 지도자가 국화를 헌화한 뒤 유족이 뒤따른다. 그러나 이번 행사의 무대에는 독특한 장치가 있었다. 전사자 초상들이 전시된 구조물이 직선이 아닌 원형으로 설치된 것이다. 화면에 담았을 때 중앙 집중도가 높아지고, 지도자를 중심에 세우는 효과가 강화된다.전시된 사진의 형식은 주목할 만하다. 모두 정복을 입고 흰 배경 앞에서 촬영한 생전의 모습이다. 파병 직전, 국가가 공식적으로 촬영한 사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개인의 기록’이자 동시에 ‘죽음을 전제로 한 준비’였다.우리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 직후, 국방부는 장병들을 추모할 영정 사진이 충분치 않다는 문제에 직면했다. 그해 뒤늦게 국방부는 전군에 증명사진을 새로 찍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복을 입고 태극기와 부대기를 배경으로 세운 사진이었다. 미국이 중동전쟁 전사자를 기릴 때 성조기 배경의 사진을 사용한 방식을 참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병들 사이에서는 “미리 영정사진을 찍는 것 아니냐”는 불안이 확산됐고, 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살아 있는 자들에게서 ‘죽은 자의 사진’을 미리 뽑아내려는 발상 자체가 장병들의 불안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준비된 죽음의 이미지, 산 자의 정치군인의 희생을 예우하고 추모하는 일은 체제와 상관없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 무대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죽은 자와 유족을 위로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산 자의 권력을 결속하기 위한 것인지 말이다.북한의 장면은 분명 후자에 가깝다. 김정은은 전사자의 초상 앞에서 눈물을 보였고, 유족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어린이를 끌어안고 눈시울을 붉히는 장면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제스처는 계산된 연출이었다. 지도자의 눈물이 클로즈업되고, 그 뒤에 침묵한 유족들이 배경처럼 서 있다. 죽은 자는 조용히 자리만 채우고, 특히 살아있는 지도자의 존재감만 부각된다.유족들의 통곡은 선전 담당자들에게 소음(noise)일 수 있다. 화면을 흐트러뜨리는 요소는 지워지고, 대신 김정은의 눈물과 국가가 일괄적으로 촬영한 증명 사진만 남았다. 개별적이고 우발적인 흔적은 제거하고, 일관된 형식과 깔끔한 화면만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곧 ‘죽음을 정리해 산 자의 정치에 봉사하는 방식’이다.● 남는 질문우리는 누구를 위해 사진을 남기는가. 죽은 자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산 자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인가. 북한이 보여준 장면은 분명 후자다. 죽은 자의 사진은 원래 기억과 위로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권력의 손에 들어가면 산 자의 정치적 무기가 된다. 북한이 이번에 보여준 ‘소리 없는 추모’는 그 극단을 잘 보여준다. 울음소리를 지운 추모, 준비된 사진, 지도자의 눈물이 강조된 영상은 모두 ‘산 자의 이미지 정치’를 위한 연출이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미국에서 낚싯대를 메고 걷는 여인의 수상한 사진흰색 투피스를 입고 낚싯대를 든 채 강가를 걷는 단말 머리 여성의 사진이 있습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평범하지만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이 사진의 내용을 보니 평범하진 않습니다. 통상적인 인터뷰 사진이 아니라 생활 속 한 장면을 자연스럽게 포착한 스냅사진입니다. 그런데 누가 찍었는지에 대한 표기가 없습니다. 본인이 신문사에 제보를 한 것인지, 기자가 찍은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사진 속 주인공은 3.1운동과 애국부인회 활동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였습니다. 1925년 여름, 동아일보 지면에 이례적으로 3회 연속 르포가 실렸습니다. 8월 15일자, 16일자, 17일자 신문입니다. 제목은 ‘金瑪琍亞孃 朝鮮脫走顚末(김마리아 양 조선탈주전말)’. 이번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르포 기사 마지막 날인 1925년 8월 17일자 신문에 실린 사진입니다.이 기사의 시작은 독자의 편지에서 시작했습니다. 신문사로 독자가 궁금한 점을 편지로 알리고, 그에 대해 신문사가 답하는 기사 형식입니다. “몇 년 전 3.1 운동 이후로 애국부인단(愛國婦人會)사건으로 고초를 당했던 김마리아(金瑪琍亞)양이 피신 한 후 4,5년 동안 관련 소식이 없는데, 독자 기자 코너를 통해 기자께서 알아봐 줄 수는 없습니까?” 서울 시내 숭인동에 살고 있다는 한 여학생이 신문사로 보낸 편지입니다.독자의 질문에 신문사가 직접 미국에 가서 김마리아양을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었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그냥 “최근 미국에서 김양을 만나고 귀국한 모(某)씨에 따르면”이라는 표현으로 그녀의 근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독립운동을 했던 젊은 여성의 삶을 간결하지만 비교적 긴 분량으로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도 불분명하고 기획 의도도 익명의 독자 편지에서 시작했다는 점에서 지금의 저널리즘 원칙에 비춰보면 엉터리에 가까운 기사입니다. 1920년대 신문에서 가끔 ‘무명회(無名會)’라는 일종의 공동취재단 명의의 기사가 볼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 관련 또는 일제의 만행을 보도하면서 개인 실명 대신에 사용되었습니다. 독자 제보도 ‘무명씨(無名氏)’라는 방식으로 지면에 게재된 경우도 자주 있었습니다.검열과 문책이 일상적인 언론 환경에서 익명(匿名) 속에 숨을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독자와 기자들의 입장을 생각해보니 이 사진 역시 ‘가장 합리적인’ 보도 방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출처가 불분명하지만 낚싯대를 들러 맨 김마리아 선생의 사진과 함께 3회에 걸쳐 게재된 기사를 읽으면서, 그녀의 길고 고단했던 여정이 활자에 묻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활자를 통해 남아 있는 그녀의 삶을 복원해 보았습니다. ● 감옥과 병상에서 탈출을 꿈꾸다김마리아는 15년 전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를 졸업하고 3년여간 교사 생활을 한 후 일본 유학을 통해 신여성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근대적 여성’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토대로 민족과 여성의 운명을 함께 고민하며, 시대가 부여한 사명을 받아들였습니다.졸업을 앞둔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그는 학생과 여성들을 규합해 시위에 앞장섰습니다. 곧바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같은 해 12월 애국부인단(愛國婦人團) 사건으로 대구 형무소로 다시 수감됩니다. 별의 별 고초를 겪은 후 온갖 병을 얻은 채 1920년 4월 29일에 보석으로 석방됩니다. 감옥은 젊은 여인의 몸을 빠르게 갉아먹었습니다. ‘비상악골충’이라는 무서운 병이 찾아왔고, 얼굴 뼈를 깎아내는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수술대에 오른 여인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조국의 독립을 꿈꾸던 마음은 병든 육신에 갇혔지만, 꺾이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성북동 은신처에서 요양하며 그는 결심했습니다. “반드시 자유를 찾아 떠날 것이다.”● 바다를 건너는 길, 목숨을 건 여정1920년, 그는 이름을 김근포(金槿圃)로 바꾸고 얼굴을 가린 채 서울을 빠져나왔습니다. 인력거와 자동차를 갈아타며 인천에 도착했고, 동지들과 함께 작은 밀항선에 올랐습니다. 병든 몸은 바다의 흔들림을 이기지 못했고, 배 위에서 몇 차례나 쓰러졌습니다. 미리 준비하여 가지고 간 『모펜』 주사를 여러 번 맞았습니다. 함께 배를 탄 동지들이 그녀의 손을 잡았습니다. 기도와 간호가 이어졌고, 김마리아는 다시 일어났습니다. 멀리 고향 송화의 산줄기가 눈앞에 아른거리자, 그는 배 위에서 ‘망향가’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다는 매섭게 요동쳤지만, 마음은 이미 더 넓은 바다로 향해 있었습니다. 기자는 당시 같은 배를 타고 있던 사람의 전언을 통해, 당시 그녀가 망망대해에서 고향을 보며 불렀던 노래의 내용을 알지만, 그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할 자유도 없다고 탄식합니다. 20여 일의 고된 항해 끝에 도착한 곳은 산둥반도 웨이하이. 하지만 상하이로 가는 길조차 그녀에게는 또 다른 싸움이었습니다. 병세 때문에 잠시 현지에 머물며 회복해야 했고, 뒤늦게야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상하이, 그리고 미주로상하이에서 그는 다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애국부인회 간부로, 임시의정원 대의원으로 선출되며 여성 지도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러나 김마리아는 정치만으로는 독립이 완성되지 않음을 일찍 깨달았습니다.“교육이 있어야 민족이 선다.”그녀는 태평양 건너 미국으로 향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병든 몸과 뜨거운 의지뿐이었지만 말입니다.● 미국 유학, 노동으로 마련한 학비김양이 태평양(太平洋)의 험한 물결을 헤치고 22일 만에 미국에 도착한 것은 1923년 7월 11일이었습니다. 미주 땅에 닿은 김마리아는 곧장 노동으로 학비를 마련했습니다. 공장에서 일을 하는 한편 틈 있는 대로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처사(處士)의 생활도 하였습니다. 병세가 도져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지만, 공부를 향한 열망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미소라주 팍빌』에 있는 『팍』 대학 문과에 입학한 것은 1924년 9월이었다는데 본래 총명하고 아담한 그는 반공(半工)생으로 생활하면서도 학과 성적이 좋아서 일반 학생들의 경애를 받았으며 교장 이하 여러 선생들의 사랑도 남달리 받았습니다. 당시 김양을 만나보고 귀국한 모씨의 말을 들으면 양은 2년 후 그 대학을 졸업하고 또 후과(后科)를 일년 더하여 상당한 학위를 얻은 후 교육계에 종신할 결심을 하고 공부에만 열중인데 어떤 좋은 기회가 오면 교육계에 몸담아 민족의 미래를 밝히겠다는 꿈을 키웠습니다. 독립운동의 다른 이름은, 그에게 ‘배움’이었습니다.● 신문 보도 이후의 삶김마리아는 오랜 망명 생활을 정리하고 1933년 귀국했지만 원산에만 머무른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는 해방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젊은 시절의 꿈에 비해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감옥의 어둠 속에서도,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병상의 고통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그녀의 마음. 그것은 단순히 한 여성의 고난이 아니라, 시대를 건너 독립을 향한 민족의 숨결이었습니다. 낚싯대를 멘 채 휴일을 보내는 듯한 스냅 사진 속에는 이런 스토리가 숨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시나요? 좋은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홍콩 앞바다에 떠 있는 배 위에서 도시를 바라본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멀리 산과 도시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 옵니다. 100년 전 서울 사람들은 이 풍경을 부러워했습니다. 그 이유는 서울을 비롯해 전국을 강타했던 홍수 때문이었습니다. ● 대홍수로 무너진 ‘평원 도시’의 꿈1925년 여름, 몇 주 동안 이어진 폭우로 서울을 폐허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특히 한강변 저지대는 물에 잠겨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면서 도시에 대한 계획을 전면 수정하자는 의견이 대두됩니다. 당시 기사를 원문에 가깝게 옮겨보았습니다. <1925년 8월 12일 기사 1. 경성 도시계획은 고지 (高地) 도시로 변천>경성부의 도시계획은 시기와 예산 문제로 겨우 영등포(永登浦) 부근을 공장 지대, 용산을 상업지대, 동부 일대를 주택지대로 개괄 설계는 되어 있으나 그 이상 구체안에까지 이르기에는 현재의 상태로는 아직도 수년을 더 있어야 할 형편인데 자연 현재 경성 도시를 아름답게 하려면 국부적 시구 개정으로 할 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현상인 바, 최근에 이르러 한강 대홍수의 영향을 받아 용산 치수 문제와 한 가지로 경성부의 인접 부락을 병합하여 대 경성의 출현을 계획하는 이 때에 도시 구성을 더욱 연구할 여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본래 총독부에서 연구하고 있던 평면 도시는 단순히 행정적 지역을 확대함에 있어서 윤돈(倫敦,런던), 파리(巴里), 동경, 오사카 등의 평원 도시를 모방한 것이나 실제 경성의 지세를 보면 평원 도시의 관념을 버리고 홍콩(香港), 나가사키 등과 같이 고지(高地)정복을 제일로 하지 아니하면 안되겠다는 것인 바 이번 홍수가 자극을 주어 경성의 도시 계획은 장차 고지 도시로 변해 가리라더라.<1925년 8월 12일 기사 2. 도시 연구 총회 - 13일에 개최>10일 오후 3시 경성상업회의소에서 경성 도시 연구회 위원회를 열고 당분간 회의의 성안(成案)을 응급책과 근본책의 두 가지로 나누어 오는 13일 오후 3시에 다시 열릴 총회에 성안을 부의하기로 되었다는데, 그 중에 근본책은 지금 기고(起稿) 중이라 아직 알 수 없으나 그 응급책으로서는 아래와 같다더라.용산, 영등포 제방을 완전케 할 것용산 고지와 저지 배수의 설비를 완전케 할 것이촌동을 거주지로 하지 말게 할 것● “미래의 경성은 홍콩처럼 산 위에 집을 짓자”는 주장같은 날 매일신보는 더 직접적인 제목을 뽑았습니다. 1925년 8월 12일자 매일신보 2면 기사의 제목은 “홍콩, 미래의 경성의 본보기”입니다. 매일신보의 기사 내용도 같이 보겠습니다. <1925년 8월 12일자 매일신보 기사.홍수로 환멸된 한강 중심의 도시계획 — 수재로 인하여 근본적 변경 추이되는 대경성의 살림터! … 홍콩의 그것과 같이?>밝아가는 조선문화의 횃불잡이가 될 대경성(大京城)의 크나큰 도시계획은 시기와 예산 문제로 일시 허리가 끊기게 되고 다만 ▲ 영등포 부근을 공장 터로 잡고 ▲경성과 용산을 상업지대로 삼으로 ▲ 동부북부 일대를 주택지대로 삼자는 대강 계획만 얽어놓고 있을 뿐이요 지금의 형세로는 아직도 몇 년이나 더 지나야 무슨 결말이 나겠는데 뜻밖에 이번 큰 홍수로 인하여 영등포도 믿지 못할 곳이고 용산도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곳이며 청량리도 편하게 지내기 어려운 곳이라는 쓰린 체험을 하게 되매, 모든 계획에는 큰 변동을 일으키게 되고 만 것이다.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중심으로 대경성의 아리따운 꿈은 마침내 무참이 깨어지고 한강을 피하여 살자하는 소리가 높아가게 되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이 때까지 총독부에서든지 경성부에서든지 경성의 모든 시설은 평면 도시계획으로 대개는 행정지역의 확대를 목표로 하여 영등포를 끌어들이며 청량리를 끌어들여 본다는데 그치어 ‘런던’이나 ‘파리’에서 취하는 평원도시(平原都市)를 모방하게 되었던 것을 무서운 자연의 힘- 한강의 대홍수로 인하여, “높은 곳으로 피해가자”는 느낌이 굿세게 남아서 이제는 향항(香港)이나 장기(長崎)의 그것과 같이 고지정복(高地征服)을 목표하자는 의견이 대개 유력하여 졌음으로 이 문제에 대하여 각 전문가는 지금 가장 신중히 연구 중이라더라. ● 실현되지 않은 ‘고지 도시’ 계획 1920년대 서울은 이미 인구 증가와 거주할 집 문제로 숨이 가빠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문에서는 불량주택과 재해로 인한 이재민에 관한 기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도시계획에 대한 논의도 이어졌지만 하루 아침에 실현할 수 없는 과제였을 겁니다. 그러다 물난리를 겪으면서 기존에 논의되던, 한강변을 중심으로 주거 벨트를 만들자던 계획 대신에 서울의 산과 언덕을 활용해 주거지를 조성하자는 아이디어가 제시된 것입니다. “평원 도시의 모방을 버리고, 고지(高地)를 개발하자” “런던이나 파리가 아닌, 홍콩과 일본 나가사키가 서울의 모델이다”는 제안이었습니다. 결국 서울은 홍콩형 고지 도시로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제방을 보강하고 한강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도시를 확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1925년 대홍수 이후 ‘안전한 집’에 대한 관심은 계속 이어졌습니다.●1930년대 사람들이 꿈꾼 이상적인 주거지1930년 9월 28일자 동아일보에는 공학사 (工學士) 김윤기가 기고한 “안락의 홈은 어떤 곳에 세울까”라는 글이 실립니다. 여기서 그는 이상적인 주택지를 이렇게 제시합니다.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 대경성(大京城)은 25년 후에는 시내 60만 시외를 합치면 90만의 인구가 된다고 합니다. 주택지를 선정할 때 장래 발전성을 고려해야 합니다.1. 출퇴근하기 좋은 곳을 택해야 합니다.2. 생활용품을 구하기 쉽고 싸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교외가 채소 같은 게 조금 싸고 생활용품은 종로나 본정(충무로)가 좋은 것 같습니다. 도시 중심을 오가는데 편리해야 합니다.3. 자녀가 있는 곳은 학교문제를 고려해야 합니다. 시내 학교 교통이 편리한 곳을 선택해야 합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집을 세 번 옮겼다는 것을 생각하면 학교의 유무가 고려대상입니다.4. 사람은 언제 질병에 걸릴지 모릅니다. 병원과 약방의 관계를 고찰해야 합니다. 교외의 주택지는 병원 같은 것이 없어서 걱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5. 교외는 땅값은 비교적 싸나 교통비가 상당히 듭니다. 전차에서 내려서 10분이나 15분 도보로 들어가면 땅값의 차이가 크니 이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6. 지세도 고려해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조건은 건조해야 하므로 남향의 경사지가 이상적입니다. 얕은 땅은 배수가 나쁘며 습하여 위생에 안 좋고 광선도 얻을 수 없습니다. 서북 방향에 구릉지나 산이 있으면 북풍을 막고 석양의 더운 볕을 가릴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낮고 습기가 있는 지대를 택할 때는 터를 높이 올려야 하고 호수(湖水)、하안(河岸)、조망(眺望)은 좋긴 하지만 겨울철에 몹시 춥고 홍수의 염려가 있습니다.7. 방향도 중요합니다. 이탈리아 격언에 “광선이 들어오지 않는 집은 의사가 출입한다”는 말이 있듯이 햇볕이 충분해야 가족이 건강합니다. 가족이 거처하는 방은 동남향으로 하고 객실이나 서재는 서북향도 가능합니다.8. 면적은 위생 측면에서 보면 넓을수록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한정하게 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전원과 도시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한 사람 당 40평이 이상적이라고 합니다. 일가족 5명이면 2백평이니 시외면 모르겠지만, 시내 중류계급으로는 불가능하며 현상을 보면 20평 내외 자리도 많습니다. 이상으로 말하면 일반적인 경우 30평이라야 좋을 것입니다. 주택지 모양은 정방형(正方形)에 근사한 것이 좋으며 동서로 장방이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면 교외면 100평 내외 시내면 50평 내외가 적당할 것입니다 그러고 주택의 건평은 12, 13, 15, 16, 24, 25평까지의 중류 주택이 적당하며 건축법령(法令)에는 원 땅의 10분의 1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오늘에 남는 질문100년 전, 대홍수는 서울 사람들에게 ‘안전한 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수도를 꿈꾸던 사람들에게 홍콩과 일본 나가사키가 모델이라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서울은 한강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올해도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서울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내렸던 100년 전의 결정은 옳은 것이었나요? 그리고 여러분이 꿈꾸는 ‘안락한 홈’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좋은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백번의 경고 문구보다 벽화 속 불끈 쥔 주먹이 훨씬 무섭게 느껴집니다. 이쯤이면 골목에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없겠죠? ―서울 강동구 강풀만화거리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