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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시니의 ‘신데렐라(라 체네렌톨라)’는 ‘오페라 아메리카’가 집계한 ‘북미대륙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 목록에서 11위에 오른 작품이다. 푸치니 ‘투란도트’, 베르디 ‘아이다’보다 순위가 높다. 친근한 이야기와 경묘하고 즐거운 음악이 어울렸으니 그럴 만하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유독 우리나라에서 공연될 기회가 적다. 최고도의 콜로라투라(목관악기처럼 여러 음을 빠르게 오가는 기교) 창법을 요구하기 때문에 적합한 성악진을 골고루 갖추기 힘든 점이 가장 큰 문제다. 경기 안산문화예술의전당이 21, 22일 전당 내 해돋이극장에서 공연한 ‘신데렐라’로 이 쉽지 않은 작업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 결과는 ‘2010년 한국 오페라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과 중 하나’로 미리 점찍어둘 만했다. 타이틀롤을 맡은 메조소프라노 김선정 씨는 타고난 신데렐라였다. 초점이 뚜렷한 소릿결부터 지혜와 순수함을 갖춘 신데렐라다웠고, 훗날 쇼팽이 플루트용 변주곡으로 편곡해 친숙한 아리아 ‘슬픔과 눈물 속에서 태어나’에서 화려한 기교로 경탄을 자아냈다. 최고음을 바로 찍지 않고 아래 음에서 올려붙이듯이 접근한 점을 제외하면 고금의 명음반들에 뒤지지 않았다. 왕자의 연회 장면에서 베일을 벗어젖힐 때 일동이 발하는 탄성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그의 신데렐라는 시각적인 면에서도 딱 들어맞았다. 테너 강요셉 씨 역시 타고난 라미로 왕자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힘겨울 정도로 높은 음역에서 이어지는 라미로의 노래가 전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고, 마음을 빼앗기는 사랑의 악구가 사뭇 달콤했다. 계모 없이 계부와 의붓언니 둘이 등장하는 이 오페라에서 계부 돈 마니피코 역을 맡은 바리톤 장성일 씨의 활약도 주목할 만했다. 탐욕과 분노, 비굴함을 오가는 음성의 결을 요령 깊게 전환했고 웬만한 희극배우 못지않은 표정연기도 일품이었다. 이 밖에도 왕자의 시종 단디니 역의 바리톤 공병우 씨가 중창 ‘희극의 종말에는 비극이’에서 보여준 매끈한 기교, 의붓언니 클로린다와 티스베 역의 소프라노 박선영, 메조 신민정 씨가 보여준 투명한 앙상블, 전 배역 중 유일하게 웃음기가 없는 진지한 철학자 알리도로 역의 베이스 김재찬 씨가 들려준 깊은 공명 등 어느 배역 하나 빠지는 부분이 없었다. 성악진들의 앙상블에서는 1막에서 약간의 불일치가 발생했다. 부분적으로는 극장의 건조한 음향 탓이었다. 현악기의 저미는 리듬이 가진 중고(中高) 음역의 에너지가 묻혀버리는 바람에, 쉴 새 없이 변화하는 리듬에 성악진이 즉각 반응하기 힘들었다. 이번 공연에서는 연출의 묘(妙)도 흡족한 부분이었다. 무대를 단순한 벽체로 처리한 대신 프로젝션을 투사해 변화하는 날씨와 분위기를 전달했다. 참신한 착상은 아니었지만 예상보다 좋은 효과를 낳았다. 다만 어린이 관객의 눈높이를 고려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종종 프로젝션이 ‘과용’에 흘렀다. 여러 색깔의 점을 퍼져나가도록 해 출연진의 내면적 행복감까지 표현하려는 시도는 불필요해 보였다. 1막 후반부에서 가족의 공간인 2층 창문에 외부인인 알리도로가 갑자기 나타난 점은 의아했다. 무대외적인 부분에서는 공연장 로비에 각 배역진의 의상 디자인을 전시해 포토존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이곳에서 공연 전 구연동화 순서도 마련한 부분이 돋보였다. 요령 있게 번역한 한글 자막까지 어느 부분 하나 중앙 무대에 뒤떨어지지 않았던 이번 프로덕션이 이틀 공연을 넘어 긴 기간 여러 지역에서 청중의 갈채를 받을 수 있기 바란다.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살면서 누군가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듯 자신을 바라봤던 눈길이 있었는가. 내 경우는 다행히도 단 한번이었다. 깨진 병과 최루탄 탄피가 뒹굴던 1980년대 대학 교정, 생각에 잠겨 걷고 있던 내게 친구가 다가와 물었다. “무슨 고민 있냐?” 당시 마음을 사로잡던 문제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 그게,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친구의 눈가가 찡그려졌다. “야, 그런 게 문제냐? 철 좀 들어라.” 속상하진 않았다. 당연히 그런 반응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답답함은 깊어졌다. “음악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어요.” 11일 ‘앱솔루트 클래식’ 기자간담회에서 첼리스트 겸 지휘자 장한나 씨는 이렇게 말했다. 장 씨는 서류심사와 동영상 오디션으로 선발한 100여 명 규모의 오케스트라를 2주 동안 연습시켜 28일까지 성남아트센터에서 세 차례의 연주회를 연다. “물 한 방울은 작지만 물방울이 모이면 나무가 자라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죠. 한 사람씩 음악이 주는 감동을 나누다 보면 세상은 아름다워질 거예요.” 8일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실에서 만난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의 말도 비슷했다. “자라나는 세대가 위대한 음악의 세계를 한 사람이라도 더 알고 느끼면 세상이 한 걸음 나아갈 텐데,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왜, 어떻게 음악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인가. 사실 이는 증명하기 난감한 명제다. 음악을 연주하거나 듣고 자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사회에 공헌한다든가 성취욕이 높다는 식의 검증된 통계는 없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사회 음악 훈련 프로그램 ‘엘 시스테마’의 결실로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교향악단’이 세계적 조명을 받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범죄율을 낮추고 빈민층 어린이의 계층 극복 효과도 크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그러나 이 경우도 음악의 힘이 청소년들의 정신세계를 고양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인지, 단지 함께 호흡을 맞추는 오케스트라의 ‘참여적’ 특성이 효과를 나타낸 것인지는 검증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장 씨와 정 씨의 열정에 공감하는 것은 세상이 증명할 수 있는 일로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 씨는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경이로운 체험을 30∼40분 동안 압축해 경험하게 해주는 게 클래식이고 교향악”이라며 행사를 통해 ‘감동의 에너지’가 퍼져나가도록 하겠다고 했다. 세상을 감동의 에너지로 채울 것이라면 연주에 참가하지 않는 청중의 참여도 늘렸으면 좋겠다. 다행히 장 씨는 행사기간에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갖는다. 내년 이후엔 악기를 연주하지 않는 청소년들이 무대 뒤에서 벌어지는 일들까지 체험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이는 연주자들에게도 좋은 일이다. 물고기에게 물이 필요하듯 연주자에게는 호기심과 열정을 갖춘 관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지만 1977년 8월 서울에서는 ‘주네스 무지칼 월드 오케스트라’ 한국대회가 열렸다. 각국에서 모인 청소년들이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치열한 연습을 거쳐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그때 참가한 한국 청소년 여럿이 오늘날 훌륭한 연주가로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당시 관악기나 현악기와 거리가 멀었던 한 초등학생은 TV로 방영된 행사 다큐멘터리를 보며 열광했다. “나도 저 자리에 있었으면, 참가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연습 현장도 보았으면”이라고 생각했던 그 어린이는 오늘날 동아일보에 공연정보와 연주회 리뷰를 쓰는 기자가 됐다.유윤종 문화부 차장 gustav@donga.com}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가면 관현악단이 무대에 등장한 뒤 음을 맞추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대 뒤에서 미리 맞추지 않는 것은 일종의 ‘의식’ 차원인가요. 음을 맞출 때 굉장한 ‘불협화음’이 일어나는데 음 맞추기에 절차가 있나요.(남지운·17·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A: 현악기, 온도-습도 따라 음높이 변해 현장서 튜닝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나와서 음을 맞추는 것은 악기가 무대로 나오는 순간 음높이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현악기의 경우 온도와 습도에 민감해 공간이 바뀌는 것 자체가 튜닝(음 맞추기)의 이유가 됩니다. 튜닝의 절차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먼저 목관악기인 오보에가 A(라)음을 길게 불면 바이올린을 비롯한 현악기가 먼저 음을 맞추기 시작하고 곧이어 목관악기, 음량이 큰 금관악기와 타악기 중 유일하게 음높이가 정해져 있는 팀파니가 소리를 맞춥니다. 관악기의 경우 연결부를 빼거나 넣어 관의 길이를 조절하는 식으로 소리를 맞춥니다. 많은 사람이 ‘왜 유독 오보에에 소리를 맞추지’라는 의문을 가집니다. 꼭 오보에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음높이의 기준이 될 수 없는 악기를 하나씩 ‘빼나가다’ 보면 오보에가 남게 되는 거죠. 먼저 현악기의 경우 자기 자신의 음높이가 잘 변하기 때문에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금관악기는 세게 불면 어느 정도 음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는 데다 남들이 소리를 다 맞출 때까지 오래 한 음을 끌기도 힘이 듭니다. 그러다 보니 목관악기 중 하나가 기준이 돼야 하는데 바순은 소리가 너무 낮고 플루트는 소리가 또렷이 집중되기보다 부드럽게 퍼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결국 클라리넷과 오보에가 남는데 클라리넷은 모차르트 시대에야 오케스트라에 끼어들게 된 ‘후배’ 악기죠. 게다가 오보에 소리는 한층 또렷하게 다른 악기의 소리들과 구분됩니다. 그래서 오케스트라 기준음의 영예는 오보에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오보에도 기준을 양보하는 ‘지존’ 악기가 있습니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할 때는 먼저 악장(콘서트마스터)이 피아노의 A음을 ‘땅’ 하고 치면 오보에가 그 소리에 맞추고 이어 모든 악기가 이 소리에 음높이를 맞춥니다. 왜 피아노를 오보에에 맞추지 않느냐고요? 피아노의 음높이를 새로 맞추려면 88개 건반마다의 음을 모두 건드려야 하기 때문이죠. 음을 맞추는 기준이 다른 국악기와 양악기가 합주할 때는 어디에 음을 맞추느냐는 질문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양악기와 합주할 수 있도록 음높이를 양악기에 맞춘 국악기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반면 국악기에 음높이를 맞춘 양악기는 찾기 힘드니 국악기가 양보해야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연극 뮤지컬 무용 클래식 등을 보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팬텀(phantom@donga.com)에게 e메일을 보내주세요. 친절한 팬텀씨가 대답해 드립니다.}

17일 저녁 서울 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내 연습실 앞. 문틈으로 또랑또랑한 피아노 소리가 새어 나왔다. 슈베르트 5중주곡 ‘송어’ 피아노 파트였다. 문을 열자 바이올리니스트 이유라 김수연, 첼리스트 송영훈, 베이시스트 성민제 씨의 얼굴이 보였다. 피아노로 빠른 악구를 반복해 치는 주인공은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이었다. “이대로 수연이가 바이올린, 내가 비올라를 하나?”(이유라) “한 번씩 바꿔보고 연주가 잘 되는 쪽으로 하면?”(송영훈) “곤란하지, 흐흐.”(김수연) 다섯 사람은 23일 오후 8시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7인의 음악인들’ 연습을 위해 모였다. 1997년 ‘7인의 남자들’이란 제목으로 시작한 이 콘서트 시리즈는 중간 중간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비올리스트 유리 바시메트 등 세계적 명인들이 화음을 보탰고 7년을 쉬다 지난해 속개됐다. 올해는 ‘송어 5중주’ 외 베토벤의 피아노 3중주 ‘대공’, 쇼팽의 ‘서주와 화려한 폴로네즈’ 등을 연주한다. ‘송어’에 끼지 않는 첼리스트 양성원, 피아니스트 김선욱 씨는 이날 연습에 빠졌다. 다섯 사람은 이날 ‘송어’를 처음 맞춰봤다고 했다. 그런데도 평생 맞춰온 것처럼 착착 감겨오는 ‘감(感)’이 느껴졌다. 송영훈 씨는 “다른 데서 여러 번 연주했고 서로의 개성을 잘 아니까 각자의 연주에 즉각 반응할 수 있다”고 했다. 리듬이 미묘하게 흐트러질 때는 다섯 사람 전원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oh, embarrassing…(아, 난처해).’ 스케르초 악장의 도입부를 늦게 처리한 김수연 씨가 탄식하자 저마다 낄낄거리면서도 연주를 이어갔다. “실내악은 순전히 재미로 하는 거예요. 마음이 편하죠.” 정명훈 씨의 말에 “이유가 뭐죠?”라고 묻자 그는 싱긋 웃으며 “틀려도 20%만 책임지면 되니까…”라고 했다. 순간 네 사람의 입에서 “bad answer!(나쁜 대답)”라는 야유가 터졌다. 연습하다 의견이 갈리면 어떻게 할까. ‘연장자’인 정 씨가 결정권을 가질까. 그는 “난 실내악을 하면서 한 번도 ‘리더’라는 생각을 안 해봤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누나들 반주를 했는데 어떻게 내가 리더가 돼요?(웃음)” 정 씨는 “무엇보다 실내악은 한국 젊은 연주자들의 변화를 나타내는 모습이어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예전에는 줄리아드음악원에서 한국인은 ‘그저 솔로만 죽어라고 연습하는’ 걸로 유명했어요. 그만큼 여유가 없었죠. 이제는 달라졌어요. 실내악을 하면서 스스로 즐기는 모습을 보면 음악을 대하는 의식이 성숙해진 거라고 생각하죠.” 연습에서도 그런 여유가 묻어나는 듯하다고 했더니 지난해 앙코르곡 연습할 때 얘기를 꺼냈다. “브람스 헝가리 춤곡을 연습했는데 잠깐 쉬는 동안에 저마다 악기를 바꿔서 호흡을 맞추며 장난을 치더라고요. 나만 손해죠. 할 줄 아는 게 피아노밖에 없으니까!” 그는 어릴 때 현악기를 포기한 사연도 털어놨다. “바이올린을 해보려니 소리가 영 마음에 안들더라고요. 귀가 ‘벙∼’ 하고. 경화 누나가 그렇게 잘하는 소리를 들어왔는데 처음 잡은 바이올린에서 소리가 잘 나겠어요?” 듣고 있던 김수연 씨가 “아니에요. 지금도 바이올린 소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세요”라고 ‘고발’했다. 정 씨가 껄껄 웃었다. 올해 앙코르 계획을 묻자 그는 “아직 얘기 들은 거 없는데…”라고 했다. 김수연 씨가 “아까 악보 왔어요!”라며 악보 한 뭉치를 건넸다. 악보를 받아든 정 감독이 거슈윈의 ‘서머타임’ 전주를 치기 시작했다. 악보도 없이 송영훈 씨가 첼로의 피치카토로 화음의 ‘베이스 라인’을 뜯기 시작하자 김수연 씨와 이유라 씨는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호흡이 착착 맞았다. 예술의전당 연주에 앞서 19일 오후 7시 반에는 경남 창원 성산아트홀, 20일 8시에는 서울 노원문화예술회관, 21일 오후 7시 반에는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콘서트를 연다.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 4만∼10만 원. 1544-1555, 02-518-7343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독일의 부촌’ ‘독일의 자연공원’으로 불리는 동남부 바이에른 주의 주도(州都) 뮌헨에서 젊은 화음이 온다. 10대에서 30세까지의 유망 연주자들로 구성된 ‘융에(젊은) 뮌헨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음악감독 마크 마스트 지휘로 9월 3일 오후 8시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첫 내한연주를 연다. 유엔 제정 세계평화의 날(9월 셋째 화요일·올해는 9월 21일) 30주년과 독일통일 20주년(10월 3일)을 축하하는 ‘세계 평화 콘서트’다. 융에 뮌헨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1996년 창단됐다. 주빈 메타, 콜린 데이비스, 에사 페카 살로넨 같은 명지휘자들이 지휘를 교습하는 ‘교향악 마스터클라스’를 매년 개최하고 있으며 2004년 이후엔 매년 모차르트 탄생기념 자선음악회를 개최하고 해외순방 연주회도 열며 탄탄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첫 내한 연주회에서는 베토벤 ‘에그몬트’ 서곡과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신세계에서’, 피아니스트 김미경 씨가 협연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을 연주한다. 작곡가 권용진 씨가 ‘평화’라는 테마를 형상화한 대편성 오케스트라곡 ‘세계 속의 경희’도 초연한다. 권 씨는 “한국과 독일이 공유한 통일의 정서를 음악적으로 형상화했다. 현대적 기법을 응용했지만 어렵지 않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한 독일대사관과 동아일보 21세기평화연구소가 후원하고 한화와 독일문화원, 독일 외교부가 협찬한다. 3만∼15만 원. 02-580-1300, 1588-7890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서울 예술의전당이 14일부터 675석 규모의 토월극장에서 공연 중인 푸치니 ‘투란도트’는 큰 규모의 관현악과 합창, 중국 황실의 위세를 표현할 무대가 필요한 오페라다. 중형 극장인 토월극장에 본디 적합한 작품은 아니다. 예술의전당 측도 ‘코끼리 냉장고 넣기’에 이를 비유했다. 다행히 작은 무대가 눈에 띄는 무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칼라프 왕자의 ‘수수께끼 심판’이 열리는 2막 무대는 간결한 편이었지만 강한 황금빛 조명으로 황제의 권위를 나타냈다. 천자(天子)의 자리가 계단 한가운데 있어 첫눈에는 어색했으나 ‘하늘과 땅을 중개하는 존재’를 나타낸 상징으로 이해할 만했다. ‘투란도트’에서 연출가들의 해석이 가장 갈리는 부분은 백성 또는 ‘군중’의 표현이다. 이 작품에서 군중은 권력자에게 고난당하며 맹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때로는 권력자의 잔인함에 편승해 약자를 박해한다. 이탈리아 연출가 제피렐리는 쉴 새 없이 부유하듯 움직이는 무질서한 군중의 모습으로 이를 표현했고 중국의 장이머우는 조명의 변화로 이들의 변덕을 드러냈다. 이번 공연에서 장영아 연출은 인형처럼 저마다의 자리에 붙박인 모습으로 ‘조종당하는’ 군중을 표현했다. 많은 움직임을 줄 수 없는 작은 극장에는 적합한 연출이었지만 3막 리우의 자살 장면에서는 군중의 놀라움과 후회가 설득력 있게 표현되지 않았다. 첫날인 14일의 출연진 중에서는 권력을 뺏긴 티무르 왕 역의 베이스 최웅조 씨가 인상 깊었다. 호소력을 담은 음성뿐 아니라 표정과 제스처 연기도 일품이었다. 투란도트 역의 소프라노 조영주 씨도 아리아 ‘먼 옛날 이 궁전에서’에서 힘 있게 뻗는 고음역의 포르티시모로 만족감을 주었다. 칼라프 왕자 역 윤병길 씨는 1막에서 소리가 트이지 않았고 관현악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다행히 2막부터는 충분한 볼륨을 되찾았다. 지휘를 맡은 최희준 씨는 일반적인 해석보다는 빠르게 전막을 끌고 나갔다. 1막과 3막의 피날레에서 쌓아올리는 악기들의 밸런스가 귀에 뿌듯하게 다가왔다.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I: 4만∼6만 원. 26일까지 오후 3시(21, 22일 오전 11시 공연 추가. 23일 공연 없음)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02-580-1300}

《“채취, 가공, 그리고 조리하는 세 과정이 해삼 문화의 요소다. (…) 노동과 기술이라는 점에서 보면 해삼 문화의 세 요소 가운데 가공과 조리의 비중이 크다. 채취하는 것보다 그 후의 작업에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 작업에 대해 모르면 해삼의 수수께끼에 도달할 수 없다.”》말린 해삼에 담긴 교류史극피(棘皮)동물인 해삼은 불가사리나 성게가 그렇듯 눈이 없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은 무슨 뜻을 담았을까. 저자는 “이 책은 해삼과 인간 족의 교류사다. 해삼과 인간이 서로 응시하듯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을까”라고 말한다. 저자는 ‘아시아와 일본인’ ‘말라카 이야기’ ‘바나나와 일본인’ 등의 책을 써온 문명교류 전문가. 스스로 ‘내 시야를 열대 아시아와 아이누까지 넓혀준 것이 해삼’이라고 말한다. 왜 해삼일까. 첫째, 해삼은 열대에서부터 홋카이도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대부분의 바다에서 잡힌다. 처음 해삼을 먹은 인류는 오늘날의 함경도 일대에 살았던 구석기인으로 추정된다. 둘째, 해삼은 말리면 무게가 95%까지 줄어든다. 마른 상태에선 쉬 상하지 않으므로 교역품목으로 좋다. 셋째, 말린 해삼을 다시 불려 먹는 곳은 중국뿐이다.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태평양의 숱한 나라와 지역들에서 생산된 말린 해삼이 중국으로 유입됐다. 한마디로 해삼의 길을 따라가면 ‘허브(중심)’와 ‘외곽’의 교류사를 추적하기 쉽다는 설명이다. ‘해삼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역사상 중국의 부(富)가 얼마나 강력한 힘으로 주변 국가들을 흡입했는가를 알 수 있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 초기의 일본은 비단을 대량 소비했다. 그러나 당시 비단은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다. 일본은 비단을 얻기 위해 금, 은을 수출했지만 곧 소진됐다. 지배층은 상어지느러미, 전복 등 해산물 수출에 눈을 돌렸다. 압도적 비중을 차지한 것이 해삼이었다. 19세기 중반 태평양에서는 제국주의의 영토 재분할이 시작됐다. 신흥강국 독일은 미크로네시아 지역으로 관심을 돌렸다. 헬른스하임 등의 상사가 팔라우를 비롯해 각지에 영업소를 열었다. 가장 교역량이 많은 상품은 해삼이었다. 건해삼을 만드는 데는 해삼 자체보다 땔감 비용이 훨씬 많이 든다. 피지 섬 해삼산업의 호황기엔 7년 동안 50만 세제곱피트의 나무가 연기로 사라졌다. 이 같은 분석을 통해 저자는 “서구세력의 유입과 함께 근대적 국제교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라는 통념이 도전한다. 해삼은 이미 서구가 아시아에 들어오기 전부터 세계적 시장 시스템에 좌우되는 상품이었다. 이른바 ‘근대적 교역’은 예전부터 면면히 이어지던 인간과 해삼의 교류사에 뒤늦게 편입됐던 것이다. 이상이 책의 줄거리를 이루는 내용이지만 책의 ‘잔가지’를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해삼과 함께 호주의 식민화를 주도했던 상품이 ‘고래’다. 책은 고래뼈로 만든 코르셋을 이야기하며 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까지 언급한다. 어떤 해삼은 외부에서 위협이 오면 ‘큐비에 관’이라는 장기를 토해낸다. 끈끈한 내장으로 적을 휘감는 것이다. 일본 신화를 기록한 고지키(古事記)에도 해삼이 등장한다. 한 여신이 물고기를 모아놓고 “따르겠느냐”고 묻는데 해삼만 대답하지 않아 칼에 입을 찢겼다…. 이 밖에 가마우지를 이용한 물고기 잡이에서 남방문화의 전달 계통을 추적하고, 전복을 끼우는 꼬챙이의 모양에서 샤머니즘의 영향을 유추해내는 저자의 ‘지적 수다’가 책읽기의 즐거움을 더한다. 이 책은 1990년 신초(新潮) 학예상을 수상했다.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세대차요? 마젤 선생님은 스마트폰과 아이패드를 자유자재로 쓰시죠. 저는 둘 다 없어요.”(장한나) “어디서나 젊은이들은 부모보다 조부모와 친하죠. 하하.”(마젤) 지휘자로서의 세계에 갓 입문한 28세 첼로 명인, 8세 때 데뷔해 72년째 지휘 활동 중인 80세의 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두 사람이 젊은 세대에 음악의 감동을 전하기 위해 손을 잡는다. 14∼28일 경기 성남아트센터에서 ‘장한나의 앱솔루트 클래식’을 진행하는 첼리스트 장한나 씨와 지휘자 로린 마젤 씨가 11일 오후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장 씨는 10, 20대 연주가 100여 명으로 구성한 ‘앱솔루트 클래식 오케스트라’를 20, 28일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지휘한다. 오케스트라는 동영상 오디션으로 선발했다. 연습 기간만 각 콘서트에 1주일씩 2주일이 걸릴 예정이다. 마젤 씨는 축제기간 내내 장 씨를 코치하는 ‘음악고문’ 역할을 무보수로 맡고 20일 공연에서 베버 ‘오베론’ 서곡을 지휘한다. 마젤 씨는 “나이든 음악가로서 ‘횃불을 들고’ 음악 예술을 이끌어나갈 젊은 예술가를 육성해야 한다는 책임을 느껴 흔쾌히 초청에 응했다”고 말했다. 그는 “3년 전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을 지휘하는 비디오를 봤을 때부터 장 씨가 지휘자로서 가진 재능을 봤다. 내가 지휘하는 마스터클래스와 공연에 여러 차례 초청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지휘자 장한나’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자신이 미국 버지니아에서 주최하는 ‘캐슬턴 페스티벌’에 지난해부터 장 씨를 초청해 지휘를 지도해 왔다. 장 씨는 이번 행사의 의미를 ‘감동의 확산’으로 설명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경이로운 체험을 30∼40분 동안에 압축해 경험하게 해주는 게 클래식이고 교향악이죠. 자극에 민감하고 세상에 열려 있는 젊은 사람들에게 이 같은 감동은 더욱 중요해요. 이번 행사를 통해 나눌 감동과 긍정의 에너지가 관객을 통해 더 큰 감동으로 퍼져나갈 것을 확신합니다.” 본 행사에 앞서 14일 오후 7시에는 장 씨가 국립경찰교향악단을 지휘하는 오프닝콘서트가 성남아트센터 야외음악당에서 열린다. 마젤 씨도 베를리오즈 ‘로마의 사육제’ 한 곡을 지휘한다. 무료 입장. 031-783-8000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정명훈 예술감독이 이끄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26일 교향곡 2번 ‘부활’을 시작으로 2년간의 말러 교향곡 전곡 시리즈 연주에 돌입한다. 올해 구스타프 말러 탄생 150주년과 내년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장정이다. 정 감독은 프랑스 라디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2004∼2005년 시즌에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를 펼쳐 ‘음악계의 일대사건’(르 피가로)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정 감독을 8일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실에서 만나 그가 생각하는 말러 음악과 그의 삶에서 말러가 차지하는 의미를 물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교향악단이 말러 교향곡 전곡에 도전하는 사실이 반갑습니다. 음악 팬들이 말러에 열광하는 이유에 대해 여러 분석이 있습니다만 지휘자로서도 말러의 교향곡은 특별한지요. “오케스트라는 완벽한 악기입니다. 어떤 음색, 어떤 감정도 표현할 수 있게 설계됐죠. 그런 오케스트라의 색채를 완벽하게 보여준 작곡가가 말러입니다. 지휘자라면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죠.” 정 감독은 “말러의 교향곡은 오케스트라만을 위해 쓰인 작품이어서 다른 형태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베토벤의 교향곡만 해도 피아노 편곡판 연주가 많은데 말러는 없지 않습니까.” ―교향곡 2번 ‘부활’로 시작하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요. “말러의 교향곡은 한 곡 한 곡이 인생 전체를 표현한 드라마지만 2번은 현세를 넘어 내세, ‘애프터라이프(Afterlife)’까지를 표현했죠. 힘이 넘치고, 시작의 의미를 담기에 1번보다 오히려 좋습니다.” 그에게 6년 전 프랑스에서 펼친 말러 전곡 연주에 대해 자평을 부탁하자 미간이 찡그려졌다. 당시 찬사가 쏟아졌기에 의외였다. “악보를 볼 때마다 새로운 게 보입니다. 그만큼 예전에 했던 것들은 모두가 미숙하게 느껴져요.” 그의 새로운 말러 시리즈가 예전보다 더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다는 약속처럼 들렸다. 악단은 준비가 됐을까. ―서울시향은 올해 유럽 연주에서 베를린 ‘타게스슈피겔’을 비롯한 언론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말러의 교향곡을 완벽하게 연주할 준비도 됐을까요. “완벽히 준비됐다는 것은 없습니다. 연주를 하면서 악단도 성장합니다. 말러 전곡을 통해 악단이 성장할 단계가 됐기 때문에 하는 것이기도 하죠.” 그는 2005년 서울시향 예술감독 취임 당시 ‘5년이면 아시아 정상권, 10년이면 세계 수준에 오를 수 있다’고 한 사실을 상기했다. “이제 도쿄 필 수준에는 도달했습니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입니다. 혼자선 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사회적 지원과 관심을 당부하는 말로 들렸다. 문득 2005년 그가 도쿄 필을 지휘한 말러 교향곡 5번 리허설을 본 일이 떠올랐다. 격렬한 표현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그는 악단에 ‘입으로 얍, 하고 소리를 내보라’고 주문했다. 단원들이 얍, 함성을 지른 뒤 소리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 일을 상기시켰더니 그는 파안대소했다. “일본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한국에 있고 한국인에게 가장 필요한 게 일본에 있습니다. 일본은 정확하고 준비를 잘하죠. 우리는 뜨거운 표현을 잘합니다. 물론 말러 연주에는 양쪽 모두가 필요하죠.” 정 감독은 23일 오후 8시에는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피아니스트 김선욱, 바이올리니스트 이유라 김수연 씨 등이 출연하는 실내악 콘서트 ‘7인의 음악인들’에 출연한다. 그는 “연습이 재미있기 그지없다”고 했다. “연습하다 선욱이가 갑자기 바이올린을 잡고, 유라가 피아노로 달려가 바꿔 연주하며 깔깔대는 식이죠.” 26일 콘서트에서는 메조소프라노 페트라 랑과 소프라노 이명주 씨가 솔리스트로 출연한다. 1만∼10만 원.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02-3700-6300. 전곡 연주 중 올해 10월 열리는 교향곡 10번(미완성, 복원판 연주)은 미국 지휘자 제임스 드프리스트 씨가, 내년 교향곡 7번 연주는 성시연 서울시향 부지휘자가 지휘봉을 잡는다.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회사원 최의식 씨(48·서울 송파구 신천동)는 최근 휴일을 맞아 외식을 하다 대학교 1학년생인 아들 앞에서 낯을 붉혔다. 입대 계획을 묻는 질문에 아들이 ‘헛고생’ 운운하며 군대를 비하하는 말을 한 게 발단이었다. 최근 한 인터넷 수능 강사의 군 폄하 발언까지 생각나 울컥해진 최 씨는 6·25전쟁에서 부상한 부친을 거론하며 “할아버지도 헛고생한 거냐”고 꾸짖었다. 한참만에 아들은 “제 생각이 잘못됐다”고 사과했지만 ‘나라 지키는 일이 홀대를 받아서야…’라는 씁쓸한 생각은 줄곧 가시지 않았다.》 “한국에 태어나 사는 것이 자랑스럽다.”(78.8%) “우리나라는 살기 좋은 곳이다.”(75.7%)….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2008 한국인의 의식 가치관 조사에서 나타난 수치다. 두 문항과 대조적으로 “국가를 위해서라면 내 이익을 희생할 수 있다”라는 항목에는 48.8%만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어도 국가를 위해 희생하려는 의식은 높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의식은 보훈 관련 활동에 대한 낮은 인식에서도 드러난다. 국가보훈처가 조사한 국민보훈의식지수에 따르면 보훈대상자나 보훈시설 방문, 자원봉사에 참여할 의향을 묻는 질문에 47.5%(2004년), 47.0%(2007년)만이 ‘의향이 있다’고 응답했다. 최광수 총신대 교수는 “나라가 경제적으로 부강해도 보훈의식이 미흡하면 누구도 나라와 공동체를 위해 나서지 않을 것이다. 이는 국가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국가보훈처와 보훈교육연구원은 보훈의식 고취 행사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올해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 추모행사와 청산리전투 90주년 등 기념행사와 홍보 활동을 펼쳤고 영화 ‘포화 속으로’와 드라마 ‘전우’ 제작을 지원하기도 했다. 오일환 보훈교육연구원장은 “지금까지는 국가보훈이 물질적 보상에만 치중했지만 앞으로는 나라사랑 정신을 길러 정신적 국력을 키우는 보훈교육에 더욱 신경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으로는 6·25전쟁 참전 용사들이 학교로 찾아가 진행하는 특강이나 독립군 체험이 있다. 교사들이 직접 수업에 활용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어 각급 학교에 보내기도 한다.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독립군 체험 학교·캠프. 일제강점기 독립군 양성기관으로 중국에 세운 신흥무관학교를 본떠 만든 이 학교는 2008년 8월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에서 문을 열었다. 학생들은 신흥무관학교의 의식주를 체험하고 나무 키트를 이용해 독립군 막사를 만들어볼 수 있다. 국립중앙청소년수련원에서는 독립군 활동을 가정한 서바이벌게임을 할 수도 있다. 보훈처 남궁선 사무관은 “사람들이 다양한 행사와 교육, 대중매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역사의식을 갖도록 하면 보훈의식 제고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민족 통합을 위해서는 보훈교육의 범위를 해외까지 넓혀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오일환 원장은 “정신적 국가만 망하지 않았다면 형식상의 국가는 망하였을지라도 그 나라는 망하지 않은 나라라는 백암 박은식 선생의 말처럼 해외 곳곳에 퍼진 재외동포들이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훈교육연구원은 내년부터 재외동포재단과 함께 재외동포들이 한국을 찾을 때 국가정체성을 되새기고 모국에 대한 흥미를 느낄 수 있게끔 전쟁 체험과 견학, 특강과 인터넷을 통한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계획 중이다. 강석승 한국보훈학회 부회장은 “보훈 과목을 정규 교과과정에 넣는 것도 필요하지만 국가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와 그 가족에게 최고의 예우를 해 주는 것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교육은 없다”며 “전쟁 영웅이 학교와 기념관 등에서 자연스럽게 어린이들과 접촉하며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미국과 캐나다 등 다른 나라의 사례를 참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강은지 기자 kej09@donga.com ▼ 사선 넘어온 탈북 국군포로 고국선 ‘고난의 포로’가 되다 ▼브로커 협박 시달리고… 정착지원금 놓고 가족과 불화… 정부, 연금 전환 등 대책 검토국군포로 출신 탈북자인 최병선 씨(76·인천 연수구)는 1950년 11월 국군에 징집됐다. 배치된 곳은 북한군과 치열한 교전이 펼쳐지던 강원도 인제. 1951년 1월 북한군에게 잡혀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풀려난 뒤 결혼을 해 자식 5명을 낳았지만 아버지의 출신성분은 자식들의 진로에 장애물이었다. 부인이 1997년 사망하자 그는 아들 손자와 함께 2002년 12월 25일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갔고 2003년 6월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 암흑 세상에 갇혔던 국군포로들에 대한 세상의 관심과 지원이 아쉽다”고 말했다. 현재 최 씨 같은 국군포로가 북한을 빠져나오기 위해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는 도움은 사실상 없다. 정부는 남북회담 등을 통해 몇 차례 국군포로 문제를 제기했으나 그때마다 북한 측은 “국군포로가 없다”고 답해 공식적으로 조치를 취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이 때문에 국군포로들은 스스로 탈북하거나 탈북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곤 한다. 그러나 수십 m 간격으로 촘촘하게 초소를 세워둔 북한군의 감시를 피해야 한다. 발견 즉시 사살하는 경우도 있고 생포될 경우 죽을 때까지 노동수용소에 갇히게 되므로 말 그대로 ‘사선’을 넘는 일이다. 간혹 뒷돈을 챙긴 북한군의 외면으로 도강에 성공하지만 국군포로 대부분은 80대 이상의 고령으로 몸을 가누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일단 강을 건너도 대한민국으로 돌아오기까지 넘어야 할 고개는 여전히 높다. 탈북까지 ‘도우미’ 역할을 했던 브로커는 중국으로 들어선 순간 ‘악당’으로 변하기 일쑤다. 상당수의 탈북자가 돈을 노린 중국 내 브로커에게 ‘각서’를 강요받고 탈북하는 경우가 많다. 남한 내 가족을 잠깐 만나고 가라는 제안에 국경 지역에 갔다가 갑자기 강요된 탈북에 말려드는 ‘사기’도 횡행한다. 말을 듣지 않으면 북한으로 넘기겠다는 협박에 중국에서 무조건 수천만 원을 지불하겠다는 각서를 쓴 국군포로들이 한국에 와서까지 돈을 강요받기도 한다.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의 땅을 밟고 나서도 이들의 고난은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정착지원금’을 놓고 혈육과 갈등을 겪기도 한다. 정부는 귀환 국군포로에게 북한에 억류된 기간을 복무연한으로 계산해 정착지원금을 지급하는데 금액은 6억∼8억 원에 이른다. 최근 한 시민단체의 조사에 따르면 귀환 국군포로 10명 중 7명은 정착금 문제 때문에 한국의 형제나 친척과 사이가 멀어진다고 답했다. 이 때문에 정부는 정착금을 연금 형태로 매달 나눠 지급하거나 주거지원금 대신 임대주택을 마련해 주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인천=차준호 기자 run-juno@donga.com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 공무원이 등산하다 다쳐도 유공자? ▼범위 모호… 존경아닌 특혜대상자 인식“선진국처럼 적용 엄격하게 해야” 지적67점(2005년), 65점(2006년), 63점(2007년), 61점(2008년)…. 보훈교육연구원에서 2009년 12월 펴낸 국가보훈 미래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국민보훈의식지수는 해마다 뚜렷이 낮아지고 있다. 이 보고서는 “공헌성이 뚜렷한 독립유공자, 6·25 사상자 등은 감소하는 데 비해 일반 복무 중 경상을 입은 국가유공자가 증가하면서 사람들이 국가유공자를 존경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특혜로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분석했다. 보고서에서 지난 3년간 보훈대상으로 신규 등록한 이들 중 상이등급 6급 이하 경상자는 92%에 달했다. 한국법제연구원은 지난해 3월 펴낸 보고서에서 ‘한국의 보훈대상 범위가 확대되면서 사회보장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을 보훈 개념으로 흡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경우 ‘제대군인부’가 있어 보훈 대상을 군인으로 한정했다. 영국은 사회보장급여청에서 전쟁연금 업무를 국방부로 이관해 제대군인청으로 별도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나라에서 보훈대상을 군인으로 한정하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민주화와 공무수행 영역 등 다양한 영역으로 보훈대상을 확대해 특수성과 상징성이 약화됐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보훈대상 범위는 2009년 기준으로 7개 법률에 29개 유형에 이른다. 독립유공자와 6·25참전유공자, 전몰·상 군경과 순직·공상 군경,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고엽제후유증 환자, 장기복무제대군인 등이다. 이 때문에 법제연구원은 보훈대상을 국가유공자와 제대군인, 지원대상으로 재분류해 개편할 것을 제안했다. 국가수호와 직접적 관련성이 적은 사망·부상 군인과 순직·공상 공무원은 지원대상자로, 중장기복무 군인과 보국수훈자는 제대군인 영역으로 분류하고 보상 내용을 차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훈처는 보훈대상을 국가유공자와 보훈보상대상자(지원대상)로 분류하는 내용의 ‘보훈보상대상자 지원에 관한 법안’을 지난해 12월 제출했고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경기대 유영옥 교수(국가보훈학)는 “국가를 위한 전투나 훈련 과정에서 손실을 입으면 국가가 마땅히 보답해야 하지만 군인이 전역 축하 구타로 다치거나 공무원이 등산하다 허리를 다쳐도 국가유공자로 등록된다면 국민의 보훈인식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강은지 기자 kej09@donga.com}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 수많은 재사(才士) 지사(志士)들의 집결지이자 배출구였다. 펜으로 뜻을 펼쳐낼 분출구가 많지 않았던 식민지 조선에서 동아일보는 뜻과 재능을 갖춘 지식인들의 둥지 역할을 했다. ‘조선 3대 천재’로 불린 춘원 이광수, 벽초 홍명희, 육당 최남선은 모두 동아일보의 주요 필진으로 활약했다. 최초의 현대 장편소설 ‘무정’을 집필한 춘원은 1923년 5월 16일 촉탁기자(객원기자)로 발령받은 뒤 중간에 사직했던 1년 3개월을 빼고 1933년 8월 29일까지 9년간 재직하며 사설과 횡설수설, 소설(13편), 시, 시조, 동화, 수필, 평론, 서평, 기행문, 번역물 등 하루 원고지 70장 이상을 지면에 쏟아냈다.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지낸 김동인은 1935년 잡지 ‘삼천리’에 쓴 ‘춘원연구’에서 춘원에 대해 “가장 세력 있는 신문 지상에 가장 많이 쓰기 때문에 가장 넓게 알려졌다”고 평했다. 최초의 대하역사소설로 꼽히는 ‘임꺽정’을 지은 벽초는 1924년 춘원이 ‘민족적 경륜’이란 사설로 필화를 겪으며 동아일보를 떠나 있을 때 주필이자 편집국장으로 동아일보에 입성했다. 1년이 못 되는 재직기간에도 벽초는 동아일보 지면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해 10월 ‘지식은 권력’이라는 모토 아래 학예란이란 칼럼을 신설했다. 1925년 1월부터 ‘학창산화(學窓散話)’라는 제목을 갖게 된 이 코너는 접순(接脣·키스)의 유래, 호열자균의 번식력, 탱고의 역사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박학다식함을 여실히 보여줬다. 1924년 12월엔 춘향전 소설 개작에 2000원이란 당시 최대 액수를 건 현상공모를 실시했고 1925년 1월엔 신춘문예작품 공모를 민간언론 최초로 도입했다.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쓴 육당은 1925년 8월∼1928년 10월 동아일보 촉탁기자로서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수많은 기사와 칼럼, 탐방기를 집필했다. 동아, 조선과 함께 3대 민간지로 꼽히던 시대일보 사장을 그만둔 뒤였다. 1926년 3∼7월 77회를 연재한 ‘단군론’, 그해 7월∼1927년 1월 89회를 연재한 ‘백두산 근참기’, 1928년 6월 10회에 걸쳐 연재한 ‘조선유람가’ 등이 대표적이다. 육당은 당시 동아일보가 주최한 수많은 민족사 강연회에서 인기 강사로 활약했으며 동아일보를 사직한 뒤에도 역사교양기사를 장기 연재했다. 1928년 8∼12월 72회 연재한 ‘단군과 상황오제’와 1930년 1∼3월 52회 연재한 ‘조선역사강설’이 대표적이다. 이들 외에도 수많은 문인이 동아일보를 거쳐 갔다.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를 지은 송아 주요한은 기자를 거쳐 학예부장과 편집국장을 지냈고 소설 ‘운수 좋은 날’로 유명한 빙허 현진건은 사회부장과 학예부장을 거쳤다.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유명한 횡보 염상섭은 동아일보 창간기자였다.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를 발표한 시인 안서 김억, 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 ‘국경의 밤’의 시인 파인 김동환, ‘레디메이드 인생’의 백릉 채만식도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다. 최초의 서양화가로 꼽히는 춘곡 고희동과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청전 이상범은 동아일보 미술기자였다. 창간기자였던 춘곡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사신도에서 영감을 얻어 동아일보 창간호 1면의 웅비하는 용틀임 도안을 그린 주인공이다. 청전은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역이었다. 미술사가이자 복식사연구가였던 이여성도 1930년대 기자와 조사부장으로 근무하다 ‘일장기 말소사건’에 연루돼 사직했다. 한국 언론 사상 최초의 순직기자인 추송 장덕준은 동아일보 창간 주역이었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민간신문 허용 소식을 입수해 동아일보 창간의 산파 역할을 했던 추송은 1920년 11월 중국특파원으로 만주 일대의 조선족 학살 현장을 취재 중 의문사했다. 동아-조선을 옮겨가며 손대는 신문을 최고 부수에 올려놔 근대 신문업계 최대 풍운아로 꼽힌 하몽 이상협은 동아일보 초대 편집국장으로 1923년 9월 간토(關東)대지진이 일어나자 직접 현지로 달려가 르포기사를 연재했다. 소학교도 못 나왔지만 숱한 특종으로 이름을 날리며 3대 민간지에서 네 차례나 사회부장을 지낸 종석 유광렬, 신극운동에 불을 붙인 ‘토월회’의 창단멤버이자 ‘홍도야 우지마라’로 유명한 악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극작가인 고범 이서구도 동아일보 창간기자였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도 동아일보에서 활동했다. 창간 당시 논설반 소속이었던 송산 김명식과 박일병은 당시 명망 있는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웅변가였다. 송산이 1921년 6월 3일∼8월 31일 61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는 조선에 처음 공개적으로 소개된 레닌 일대기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가하고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활동한 박헌영도 1924년 동아일보에서 판매부 서기와 지방부 기자로 활동했다.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조선 첫 女의사 허영숙, 東亞 학예부장 활약 ▼춘원의 부인… ‘남녀평등’ 설파 “지금까지 남자는 여자에게 대하여 일종의 우월감을 가지고 왓다.…그러면 남자는 여자에 대한 우월감을 그대로 가지고 갈 것인가 단연히 내어버릴 것인가.” 동아일보 1926년 1월 1일자 기사 ‘부인문제(婦人問題)의 일면(一面), 남자할 일 여자할 일’ 제1회의 한 구절이다. 기사는 “남자나 여자나 지아비나 안해나 딸이나 누이나 오래비나 누구를 불문하고 사람으로 꼭 평등이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왜? 그것이 진리이기 때믄에”라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남녀는 유별하다’는 유교 관습이 여전히 남아있던 조선사회에 ‘여성과 남성을 포함한 모든 이는 평등하다’는 주장을 직접 제기한 것이다. 기사를 쓴 기자의 이름은 허영숙(사진). 조선 최초의 여자 의사였던 그는 1925년 동아일보 학예부장으로 임명된, 조선 최초의 신문사 여성 부장이기도 했다. 허영숙은 춘원 이광수의 부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장안의 화제였다. 이광수는 부인 백혜선과 이혼한 뒤 허영숙과 중국 베이징으로 사랑의 도피를 했고, 두 사람은 이광수가 3·1운동으로 감옥에 갇혔다 풀려난 뒤인 1921년 5월 결혼했다. 그러나 허영숙은 일찌감치 ‘신여성’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진명소학교, 경기여중을 거쳐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던 허영숙은 1918년 10월 조선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의사시험에 합격했다. 베이징 도피생활 중에도 의사로서 생계를 유지했던 허영숙은 1920년 5월 서울 서대문 인근에서 ‘영혜의원’을 개업했다. 그해 동아일보 5월 10일자에 허영숙은 ‘화류병자(花柳病者)의 혼인(婚姻)을 금(禁)할 일’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화류병, 즉 성병에 걸린 사람은 국가가 법으로 정해 혼인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혼인을 각 집안의 사적인 일로 보고 성(性) 문제 거론을 금기시하던 당시 조선사회에 보기 드문 일이었다. 사회적 반향을 반영하듯 약 2주 뒤인 26일에는 허영숙의 의견을 비판하는 긴 기고문이 동아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1927년까지 학예부장으로 재직하면서 허영숙은 자신의 전문분야를 살려 의학에 관한 기사를 주로 썼다. 1926년 3월 1∼6일 6회에 걸쳐 연재한 ‘가정위생’에서는 ‘어린아이 울 때 어머니의 주의’부터 ‘월경긔에 잇는 따님을 둔 어머니의 주의하실 몃가지’ ‘해산과 위험’ 등 가정에서 필요한 건강상식 전반을 다뤘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 90년된 고정란 ‘횡설수설’ ‘휴지통’ 첫 회부터 일제탄압-세태 맹공격 ▼ ‘한국 신문사상 최고(最古)의 칼럼난’. 만 90세의 나이로 동아일보 오피니언면을 지키고 있는 ‘횡설수설(橫說竪說)’이다. 창간 100호를 기념해 1920년 7월 25일 첫선을 보인 횡설수설은 첫 회부터 일제의 언론탄압에 대한 가시 돋친 도전으로 시작했다. “정리(正理) 직론(直論)이라고 자신해도 신문지를 경찰서로 실어가 언론자유가 잔해도 없이 참혹하게 유린되는 판인데 (…) 횡설수설이 도리어 이러한 곳에 그 가치가 없으라는 법도 없지.” 1926년 가수 윤심덕과 젊은 문사 김우진이 연락선에서 투신자살하자 횡설수설은 ‘그들의 심경도 동정할 점이 없지 않다’고 한 뒤 ‘하지만 삶의 의의와 가치가 결코 연애만이 아니거늘, 중대한 책임을 지닌 조선 청년으로서!’라고 나무랐다. 1940년 8월 11일 폐간호에서는 사뭇 감상적인 문구로 고별사를 대신했다. “벌여놓은 것 거둬들이고, 시작한 것 끝맺는 때라 수심 중에 희망도 오락가락.” 당대의 해학적 사회상이나 서민들의 애환을 전해온 ‘휴지통’은 창간 직후인 1920년 4월 10일 탄생했다. 첫 회에서는 총독부 정무총감이 조선어를 배우고 있다며 “요보(여보)라는 개소리는 행여나 배우지 말았으면…. 만세라는 말이 어떠한 말인지 궁리하는 것이 제일 긴급한 일이 아닐른지”라고 꼬집었다. 일제 관리들이 조선인들을 안하무인격으로 대하는 현실을 질타한 것이다. 휴지통은 탄생 17일 만에 발매금지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1920년 4월 27일자 휴지통은 조선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수작을 할 때 ‘긴(金)상’이니 ‘사이(崔)상’이니 할 때가 있다며 “우리 고유한 국어, 즉 조선말을 사용치 아니하고 구차히 외국말을 혼용하려 함은 내 집에 육미봉탕 팔진미를 두고 남의 우거지국이 좋다고 빌어먹으려 하는 것과 일반이다”라고 썼다. 일본어를 ‘남의 우거지국’으로 표현하고 조선어를 ‘국어’로 못 박은 데 대해 일제 당국이 발끈해 발매금지 조치를 내린 것이다. 휴지통은 1940년 8월 동아일보 강제폐간과 함께 독자와 작별한 뒤 1945년 12월 1일 복간호와 함께 부활했지만 횡설수설은 1955년 1월 1일에야 다시 등장했다. 부활을 알리는 첫 칼럼부터 예전의 기개는 여전했다. 금력 권력이 판치는 세태에 격분해 한 청년이 손가락을 자른 사건을 언급하며 횡설수설은 “옛날 중국에서 사어(司魚)라는 이가 혼미한 임금을 깨우치기 위해 제 시체까지 내세워 간(諫)했다고 해서 시간(屍諫)이라는 말이 나왔다. 우리 혼탁세태와 사악한 현실이 통골(痛骨)할 노릇”이라고 질타했다.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듯이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인류에게 핵에너지의 실체를 전해주었다. 1945년 8월 6일, 그가 총지휘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물로서 역사상 첫 원자폭탄이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오펜하이머의 비극은 자신이 주도한 계획에 스스로가 깊이 회의를 느꼈다는 데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 앞에서 그는 “내 손에 피가 묻어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매카시즘의 표적이 돼 의회 청문회장에서 수모를 당하기도 했던 그의 인생 궤적과 고뇌를 꼼꼼히 정리했다.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나무에 글씨나 그림을 새기는 서각(書刻)작가 석촌 김상철 씨(사진)의 서각전이 11∼17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경인미술관에서 열린다. 첫 개인전을 연 지 20년 만의 전시회다. 다양한 기법을 사용해 서화 작품을 서각으로 재창조한 ‘십이지(十二支) 시계’ ‘부자되세요’ 등 작품 57점을 전시한다. 김 작가는 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 보유자인 철재 오옥진을 사사했으며 ‘알기 쉬운 서각기법’이란 책을 내기도 했다. 02-733-4448}

방학을 맞아 쏟아지는 수많은 청소년음악회. 선택의 포인트는 무엇일까.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해설자가 등장하는가, 수준 높은 악단과 연주자들이 출연하는가, 영화음악 같은 말랑말랑한 레퍼토리로만 프로그램을 구성하지 않고 초보 감상자들도 공감할 수 있는 명곡 레퍼토리를 폭넓게 다루고 있는가 등이 특히 눈여겨볼 점이다. 19, 20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동아일보 청소년음악회는 이런 요건을 골고루 갖춰 청소년음악회의 ‘명품’으로 꼽혀왔다. 20년째를 맞는 올해는 국내 정상급 오케스트라인 코리안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여성 지휘자 여자경 씨(프라임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전임지휘자·사진)가 지휘하고 직접 해설도 맡는다. 협연자는 플루티스트 조성현, 클라리네티스트 박재우, 소프라노 황수미, 바리톤 나건용, 피아니스트 원재연, 바수니스트 장현성 씨 등 동아음악콩쿠르의 2009년도 부문별 1위 입상자들. 연주 실력이 탄탄한 20대 초반의 젊은 연주가들인 만큼 청소년 관객들에게는 더욱 친근하게 느껴질 듯하다. 여러 시대의 협주곡과 성악곡을 소개해 시대별 음악 특징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고 악기와 목소리의 특징을 비교할 수 있는 재미도 보탰다. 19일은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과 라이네케 플루트 협주곡,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가곡 ‘체칠리에’ 등을, 20일은 모차르트 바순협주곡과 리스트 피아노협주곡 2번, 비제 ‘카르멘’ 중 ‘투우사의 노래’ 등을 소개한다. 현장체험 학습효과를 극대화하는 ‘체험학습보고서’도 제공한다. 1만1000∼1만6000원. 02-361-1413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3·1운동을 이끌었던 민족진영이 뜻을 모아 설립한 동아일보는 3·1운동의 성과가 제한적이었던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을 이어갔다. 조선 민중의 ‘독립 성취’ 목소리를 해외에 널리 알리고 세계 열강에 조선인의 요구를 전할 수단이 부족했던 대목이 특히 아쉬웠다. 이에 동아일보는 창간 직후부터 독립의 열망을 세계와 공감하기 위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보도 및 논평과 독자적인 독립 외교를 추구했다. 1920년 8월, 미국 상하 양원 의원단이 중국을 거쳐 조선을 찾았다. 민족진영은 이를 일제의 폭압을 고발해 미국 정계와 사회 전반에 조선의 독립에 대한 지지 여론을 조성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동아일보는 8월 10일 장덕준 김동성 두 기자를 베이징으로 특파했다. 두 기자는 존 스몰 단장과 스티븐 포터 하원 외교위원장을 인터뷰하고 한민족의 독립 운동을 후원해달라고 요청하는 문서를 전달했다. 의원단이 도착한 24일 전국의 분위기는 삼엄했다. 일제는 의주 안주 개성으로 이어지는 철로에 몰려든 환영 인파에 대대적인 검거로 대응했고 이틀간 서울의 전 상가를 강제 철시했다. 이날 동아일보는 1면 전면을 환영 논설과 광고로 채웠다. ‘미국의원단을 환영하노라’라는 조선어 사설과 ‘Welcome to the Congressional Party’라는 영문 번역 논설을 나란히 싣고 여러 사회단체와 개인, 기업 명의의 영문과 한문 환영 광고를 함께 실었다. 환영 논설은 “제군(諸君)은 조선에 입(入)하야 무엇을 관찰하얏는고, 협소한 가옥과 불미한 시가와 험악한 도로와 황폐한 산천을 보았는가. 이로써 제군은 조선민중이 과거에 얼마나 학대를 수(受)하얏스며 현재에 얼마나 생명을 위축하는지를 관측하얏스리라”며 조선인들이 처한 참혹상을 고발했다. 이어 “이는 오즉 외부의 조선이라”며 외형적인 참상보다 조선 민중의 마음에 깃든 민주주의를 오히려 주목할 것을 당부했다. “이제 우리 조선 이천만 민중은 데모크래시(Democracy)를 주장하여 극동에 재(在)하야 그를 실현하고자 희생을 앗기지 아니하노니 (…) 원컨대 형제는 이 조선인의 희망 곳 내적 생명을 본국형제의게(에게) 전하야 우리와 갓치 깃버하며 또한 동일한 이상을 위하야 한가지 힘쓰기를 바라노니”라며 인류적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한민족의 민주주의 실현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동아일보는 창간 직후 영문 논설 및 해외 지식인 기고 게재, 만국기자대회 대표 파견 등으로 세계와 접촉한 데 이어 1923년 12월 1일 대대적 지면 혁신을 실시하면서 국내외 외국인들에게 민족의 의사를 전하기 위해 ‘영문란’을 신설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1면 머리기사 ‘본보의 지면 혁신에 대하야’에 이어 ‘세계에게 일언’이라는 제목으로 첫 영문란 번역기사를 게재해 이 난이 지닌 의미를 뚜렷이 드러냈다. 칼럼은 “세계는 조선 인민에게서 오는 소리를 기다렷슬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이 고립한 일민족의 진정에 접촉할 아모 기관도 업섯섯다. 우리 편으로 보더라도 세계에 말하고 십흔 수업는 우리 자신의 생활이 잇섯고 또 인류의 양심과 동정의 법정에 제출할 수업는 비통한 사건이 잇섯다”며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신문 동아일보에 영문란을 두게 한 까닭”이라고 밝혔다. 영문란은 조선의 독립 의지를 천명하는 칼럼과 조선의 독립 투쟁을 대외에 알리는 기사로 채워졌다. 1924년 8월 14일에는 ‘우리의 민족주의 활동-금광 습격(Our Nationalist Activities-A Gold Mine Attacked)’이라는 제목으로 국경지역에서 시작돼 평안남도와 함경남도로 확대되고 있는 무장독립투쟁 소식을 전했다. 기사는 ‘9일 우리의 민족주의 군대(Nationalist Army)가 평안북도 자성의 일본 경찰서(Jap Police Station)로 쇄도했다’는 등의 무장항일투쟁 소식을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는 일본을 비하하는 영어인 ‘Jap’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같은 해 9월 18일자 ‘국민적 정신생활(National Spirit Lives)’ 제목의 칼럼에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3분됐던 폴란드가 독립과 자유를 되찾은 사실을 적시한 뒤 “수많은 다른 나라들도 국민정신이 꺾이지 않은 가운데 존재를 위해 분투하고 있다. 조선도 예외가 아니다. 조선의 국가존재에 대한 감정도 예와 다름없이 강력하다. 일본 정부는 세계에 대해 조선이 일본 통치에 만족한다며 평화적 통치를 실시한다고 하나 이는 친일주의자의 잘못된 선전이다”라고 전했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학)는 동아일보의 영문란에 대해 “1920년대 총독부는 영문기관지 ‘서울프레스’를 통해 외국인들에게 조선 통치의 정당성을 홍보했으나 민족진영이 외국어로 국내의 사정을 알릴 창구는 없었다. 이에 일찍이 눈뜬 동아일보가 조선 민족을 대표해 창간 직후부터 영문 보도나 해외 지식인들의 기고를 통해 외국 민족주의자들과 교류를 꾀하고 세계인 속에 조선 독립 여론을 형성하려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 中 쑨원 ‘일제 침략주의 비판’ 기고… 인도 간디 ‘조선 독립지지’ 메시지 ▼각국 지도자 글 잇따라 게재“…조선 문제는 매우 곤란한 문제이니 나는 평소의 생각대로 지금 논하면 일본은 조선의 요구를 받아들여 독립을 승인해야 한다. 일한합병(日韓合倂)이 조선인의 원한을 맺히게 했음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글은 중국 정부를 이끌던 쑨원(孫文)이 1920년 8월 11일 동아일보에 보낸 특별기고 중 일부다. 그는 기고를 통해 일제의 침략주의를 비판하고 동양평화를 위해 조선독립을 승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동아일보는 1920년 창간 이후 조선독립을 지지하는 외국인들의 글을 잇달아 소개하며 민족의 독립의지를 일깨웠다. 1925년 8월 12일 2면에는 ‘대중의 유혈과 위대한 흔적-각국 명사(名士)의 조선에 대한 의견’이라는 제목으로 미국 ‘프레스노 리퍼블리칸’지(誌) 노웰 사장의 인터뷰를 실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조선인들이 행복을 얻으려면 민족적으로 단결하여 투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의 식민지로 우리 민족과 같은 처지였던 인도로부터는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는 글을 여러 차례 받아 게재했다.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시대에/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조선/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1929년 4월 2일에는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기고한 ‘빗나든 아세아 등촉(燈燭)’이란 시를 게재했다. 당시 동아일보 주요한 편집국장(1900∼1979)의 번역으로 지면에 실린 타고르의 영문 시는 식민 지배로 움츠렸던 조선 민족의 자긍심을 되살렸다. 인도 독립운동 지도자 간디가 보내온 조선 독립 지지 메시지도 이에 앞서 1927년 1월 5일자에 실렸다. 1930년 4월 16일 1면에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외국 명사의 축사-조선의 현상(現狀) 밑에 귀보(貴報)의 사명 중대’란 제목의 미국 네이션지 주필 빌 라즈의 기고문을 게재했다. 기고문에서 라즈 주필은 “네이션지는 1865년 창간 이래로 소수민족의 자유, 각 인민의 생활양식의 자유와 군국주의에 대한 항의로 일관했다”며 “동아일보는 조선 민족을 위해 가장 힘있게 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초지를 관철하라”고 강조했다.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 美 만국기자대회 東亞만 초청받아 ▼1921년 파견된 김동성 기자 “대표석 ‘코리아’ 이름 보고 감격”1921년 10월 미국 하와이에서 제2차 만국기자대회가 열리기에 앞서 동아일보에 초청장이 왔다. 이 초청장에는 이 대회의 회장이자 미국 미주리대 신문학과장이던 월터 윌리엄스 박사의 명의로 대표 기자를 파견해 달라고 적혀 있었다. 조선의 대표 기자를 초청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동아일보는 중역회의를 열어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신문학을 전공하고 영어도 유창한 김동성 기자(1890∼1969)를 대표로 선정하고 출장비 2000원을 책정했다. 동아일보 창간 때 합류한 그는 한국 기자 최초의 ‘특파원’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베이징(北京)에 가 저명인사 20여 명의 창간 축하 메시지를 본보에 게재한 바 있다. 동아일보 사사는 김 기자의 만국기자대회 참석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 대회에 의욕적인 움직임을 보이게 된 것은 첫째로 만국기자대회라는 국제회의가 본보를 초청했다는 것이 다만 본보의 명예일 뿐만 아니라 우리 언론계의 광영이 아닐 수 없었고, 둘째로 나라를 잃은 민족에게 국가대표로 초청되었다는 감격, 이런 것이 본보를 흥분시키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김 기자는 9월 27일 서울을 출발해 10월 2일 일본 요코하마(橫濱)에서 ‘코리아호’를 타고 10월 11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만국기자대회는 이날 개막해 열흘간 계속됐으며 세계에서 200여 명의 기자가 참석했다. 김 기자는 이 대회 부회장으로 뽑혔다. 김 기자는 동아일보 사보인 ‘동우’ 1963년 6월호에서 “회의장 각국 대표석 가운데 ‘코리아’라는 이름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봤을 때 격했던 심정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김 기자는 만국기자대회가 끝난 뒤 본사에 알리지 않고 워싱턴으로 떠났다. 11월 11일부터 워싱턴 대륙기념회관에서 열리는 태평양군축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당시 사정으로 보아 워싱턴행이 일제 당국에 알려질 때는 호놀룰루 대회 참가 자체도 어려울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동우’ 1963년 6월호에 밝혔다. 당시 김 기자의 활약은 한국 기자의 첫 국제무대 등장인 동시에 국권 상실기 세계무대에 ‘코리아’의 당당한 이름을 내걸었던 귀중한 기록이었다.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성악 강국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LG와 함께하는 서울국제음악콩쿠르’ 우승자와 결선 입상자가 잇따라 여름 무대에 오른다. 8월 6일 오후 8시 서울 강남구 일원동 세라믹팔레스홀에서 초청 독창회를 여는 바리톤 공병우 씨는 성악 부문에서 처음 열린 2007 서울국제음악콩쿠르에서 우승한 주인공. 당시 미국 소프라노 셰릴 스튜더 씨를 비롯한 심사위원으로부터 “뛰어난 목소리와 음악성을 함께 갖춘, 보기 드물게 뛰어난 가수”라는 찬사를 받았다. 현재 메츠 오페라극장, 몽펠리에 극장, 낭트 극장 등 프랑스의 대표적인 오페라극장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며 마르세유 극장에서 포레 ‘레퀴엠’ 솔리스트로 출연하는 등 콘서트 활동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이번 독창회에서는 베르디의 ‘팔스타프’ 중 ‘꿈인가 생시인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중 ‘창가로 오라 그대여’ 등 오페라 아리아와 베를리오즈의 ‘여름밤’, 라벨의 ‘돈키호테의 노래’ 등 가곡을 피아니스트 안 파제스 부아세 씨의 반주로 노래한다. 2만 원. 1588-7890, 02-3411-4668 부천문화재단이 8월 14일 오후 4시 부천 오정동 오정아트홀에서 공연하는 ‘오페라 인 러브’는 국내외 콩쿠르 입상경력이 있는 신예 성악가들이 오페라 아리아를 노래하고 상세한 해설을 곁들이는 콘서트다. 2010 서울국제음악콩쿠르 3위에 입상한 소프라노 한지혜 씨가 푸치니의 ‘나비부인’ 중 ‘어떤 갠 날’, 베르디의 ‘운명의 힘’ 중 ‘주여 평화를 주소서’ 등을 노래하고 같은 대회 6위 입상자인 베이스 이승원 씨는 푸치니의 ‘라보엠’ 중 ‘안녕 낡은 외투여’ 등을 선보인다. 피아니스트 양기훈 씨(목원대 교수)가 반주를, 음악칼럼니스트 유형종 씨(음악공동체 무지크바움 대표)가 해설을 맡는다. 1만∼1만5000원. 032-320-6337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전 세계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인기 오페라지만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대 이후 특히 ‘여름 가족오페라의 대명사’로 자리를 굳혔다. 올해도 수도권 4개 극장이 개성 있는 ‘마술피리’ 무대를 선보인다. 시작은 29일∼8월 1일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하는 ‘바퀴 달린 마술피리’가 장식한다. 공연 제목처럼 무대에 전차, 오토바이, 자동차 등 여러 가지 탈것의 ‘바퀴’가 등장하고 각종 마임과 마술사도 등장해 흥미를 더한다. 이상균 연출자는 “시간과 공간, 꿈과 현실, 문화와 문화를 연결한다는 의미에서 ‘바퀴’를 무대의 주요 상징물로 등장시켰다”고 설명했다. 남주인공 타미노 역에 테너 박현재 엄성화 씨가, 밤의 여왕 역에 소프라노 오미선 씨가 출연한다. 2만∼6만 원. 평일 오후 7시 반, 일요일 오후 4시. 070-7768-0358 경기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은 8월 12∼15일 ‘마술피리’를 공연한다. 지휘를 맡은 이병욱 씨는 10대 시절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에 유학해 20여 년 동안 유럽 최고의 ‘마술피리’ 공연들을 섭렵했다. 연극 ‘레인맨’으로 주목받은 변정주 씨가 연출을 맡는다. 1만∼5만 원. 평일 오후 8시, 토요일 오후 7시, 일요일 오후 4시. 1577-7766 성남시민회관 대극장에서는 8월 21일 오후 5시 음악해설가 오유리 씨가 해설을 곁들인 콘서트 형식으로 ‘마술피리’가 공연된다. 1만5000∼2만 원. 031-783-8000 서울 구로구 구로동 구로아트밸리는 8월 12, 13일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무대감독을 지낸 홍석임 씨가 연출하는 ‘마술피리’를 공연한다. 7000원∼1만 원. 02-2029-1700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중국 철학사는 3만 년이다.” 중국 정협(政協)위원인 한 학자가 최근 이같이 주장했다. 베이징(北京) 교외의 저우커우뎬(周口店)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에 새 3마리와 태양 무늬가 있는 걸로 보아 당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철학적 사고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부호에 가까운 그림 네 개로 ‘3만 년 철학사’라…. 중국인의 과감한 스케일이 나타나는 듯하지만 이는 이미 중국 내에서 제동이 걸렸다. 베이징대의 한 교수가 ‘(원시종교를) 확대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한 것이다. 저우커우뎬이라면 가본 일은 없지만 낯이 익다. 지난해 영국 체재 중 시청한 BBC 다큐멘터리 ‘인류의 놀라운 여정’에서 인류학자 앨리스 로버츠 박사가 저우커우뎬을 찾았다. 50만 년 전의 호모에렉투스 화석과 3만 년 전의 호모사피엔스(현생인류) 화석이 공존하는 이곳을 찾아온 이유에 대해 로버츠 박사는 “중국에서 학생들은 중국인이 다른 인류와 다른 독자(獨自)의 기원을 갖고 있다고 배운다. 그 주장을 알아보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그를 맞은 중국과학원 우신즈(吳新智) 원사는 이곳에서 나온 호모에렉투스 화석과 호모사피엔스 화석을 들어 보이며 “두개골의 정면이 넓고 형태가 닮았으니 중국의 현생인류는 저우커우뎬 호모에렉투스의 후손”이라고 설명했다. 로버츠 박사는 이런 주장을 간단히 거부했다. “두 화석의 차이는 너무 크고, 중국과 다른 지역의 현생인류 두개골 차이는 미미하다”는 것이다. 한쪽의 주장이 옳음을 단언할 식견은 없다. 그러나 세계 학계 분위기가 현생인류의 ‘아프리카 단일 기원설’을 지지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음은 명백하다. DNA 분석으로 진화적 특징의 분지(分枝) 연대까지 대략 계산이 가능해진 점도 이 같은 경향에 한몫한다. 진화학자 리처드 도킨스도 최근 저서 ‘지상 최대의 쇼’에서 인류의 다(多)지역 기원론을 ‘설득력을 잃고 있는 학설’로 꼽았다. 그러나 BBC 다큐멘터리에서 자극을 받은 것일까. 지난해 10월 중국은 베이징에서 ‘베이징원인 발견 80년 학술대회’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기조연설부터 중국은 로버츠 박사를 안내했던 우 원사 등 다지역 기원론을 주장하는 학자 3명을 내세웠다. 대회를 취재한 동아일보 기자는 “기조연설 이후 영국 학자가 아프리카 단일 기원론을 옹호하는 연구 성과를 발표하자 중국 학자들이 일제히 반박 공세를 펼쳤다”고 전했다. 영국 학자의 재반론 중에도 중국 학자들은 반박성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박희현 한국고고학회 회장은 “중국이 세계 고고학계의 흐름을 자국 중심으로 바꾸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과학적 논쟁은 학자들이 증거와 논박을 통해 풀어갈 일이다. 그럼에도 염려를 갖는 데는 이유가 있다.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영토에서 나온 화석을 통해 ‘독자적 진화 역사’를 주장한다면 서구인의 관점에서 그들과 명백히 닮은 한국 일본 몽골인 등은 ‘화이(華夷)론’이 말해온 대로 변방의 존재에 불과한 것인가. 만에 하나 객관성이 생명인 과학에서 ‘대국의 권위로 강력히 주장하면 힘이 실린다’는 자세를 가진다면 사관(史觀)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역사 문제에서야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이미 중국은 올해 에너지 소비량에서 미국을 추월한 대국이다. 다른 분야에서도 자신의 몫을 정당하게 주장할 날이 머지않다. 힘만큼 존경받는 대국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자부심만큼이나 겸허함이 중요하다는 점을, ‘주장’만큼이나 이웃과의 소통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류 역사상 숱한 사상과 지식의 원천이었던 중국은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유윤종 문화부 차장 gustav@donga.com}

방학을 맞아 청소년과 어린이를 위한 음악회가 열린다. 상세한 설명을 곁들이고 다양한 악기의 매력을 두루 맛보여주는 콘서트라면 금상첨화다. 31일 오후 2시 반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JK앙상블과 함께하는 청소년을 위한 해설음악회’는 바로크에서 현대에 이르는 실내악단의 음색과 바로크시대 대표 목관악기인 리코더의 매력을 맛볼 수 있는 공연이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의명 씨가 이끄는 JK앙상블이 비발디 ‘사계절’ 중 ‘여름’, 비발디 리코더 협주곡 c단조 (리코더 권민석), 브리튼 ‘간단 교향곡(심플 심포니)’ 등을 연주한다. 바이올리니스트 겸 음악해설가로 활동 중인 정유진 씨가 해설을 맡는다. 1만∼2만 원. 02-785-6843, 1544-1555 박태영 씨가 지휘하는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는 30일 오후 7시 반, 31일 오후 3시, 7시 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청소년음악회 ‘서머 클래식스’를 연다. 피아니스트 피경선 씨가 김연아 밴쿠버 겨울올림픽 금메달의 배경음악으로 잘 알려진 거슈윈의 피아노협주곡 F장조를 협연하고, 소프라노 신승아 씨와 테너 허동권 씨가 이탈리아 오페라 아리아와 가곡을 노래한다. 02-399-1114∼7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공동체적 문화를 형성해오는 가운데 인류는 다름 아닌 축제 행위와 양식을 통해 자신의 문화적 의식을 표출해 왔다. 축제는 삶과 현실의 반영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소망과 기원이 담긴 문화 양식인 셈이다. 문화가 매 순간 특정한 양식을 생산하면서도 동시에 시간을 초월하는 특성을 지니듯이, 축제 또한 그러한 문화의 양면성을 지닌다.”》대형마트 사은행사에 담긴 축제 축제는 인류의 문화사가 켜켜이 쌓인 다층적 텍스트다. 축제가 가진 총체상(總體像)은 다양한 측면의 조명으로 한층 정밀히 드러낼 수 있다. 이 책은 6편의 논문을 통해 동서양의 축제가 가진 이념과 양상을 철학적 문학적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1장 ‘축제로서의 삶’은 그리스 신화의 주신(酒神) 디오니소스와 서양 문화 속에 깊게 뿌리박힌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속성을 추적한다. 고대 디오니소스 축제는 서구 축제의 중요한 연원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니체는 ‘비극의 창조’에서 디오니소스 축제가 현실의 단절과 망각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며, 축제에서 깨어나는 순간에 마주치는 일상의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 구원과 치료의 수단으로 비극이 등장했다고 본다. ‘축제, 그 현대적 의미와 표상’을 분석한 2장은 불평등적 모순과 억압의 허상을 거둬내기 위해 존재해온 축제가 현대에 적응하는 모습에 돋보기를 들이댄다.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에서 열리는 ‘성인 엘로아 축제’와 ‘마들렌 축제’는 각각 보수주의자와 좌파를 결집한다. 현대에도 이 같은 상징성과 사회적 통합의 기능은 유효하다. 프랑스 아비뇽 축제는 1960년대 교황청 앞 광장을 중심으로 장외 축제가 생기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축제로 성장했다. 3장 ‘또 다른 세계를 비추는 거울’은 미하일 바흐친의 ‘라블레와 그의 세계’를 중심으로 그가 정의한 축제의 의미와 기능을 설명한다. 바흐친에게 있어서 축제에서 이뤄지는 풍자는 공연의 주체와 관객 사이의 내면적 소통이 본질적인 목적이다. 전복(顚覆)을 추구하는 공연자와 구경꾼 사이 역동적인 대화를 실현하는 것이 축제의 진정한 의미가 된다. 한국의 축제가 가진 특수성과 보편성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4장 ‘한국 축제의 구조와 본질’에 나타난다. 마을굿의 기본 구성인 ‘열두거리’는 한국 연희전승체계의 기본 구조를 이루며 이 구조는 지역에 따라 7, 8거리로 축소되거나 20여 과정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열두 거리 중 축제적 놀이적 성격이 큰 ‘가무오신’과 여흥으로 사이사이 도입되는 ‘무감’ 부분이 신화적 카오스인 흥과 신명을 창출한다고 설명한다. 5장은 축제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접근을 시도한 ‘축제의 일상화와 일상의 축제화’다. 포스트모더니티의 중요 특성 중 하나로 ‘일상의 심미화 또는 삶의 디자인화’를 꼽을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사회가 지닌 일상적 축제성과 연결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카드사의 각종 이벤트, 대형 판매시설의 ‘사은 대축제’…. 시공간적 제한 속에서 행해져온 축제가 이제는 일상 속으로 편입돼 일상과 축제의 경계를 해체한다는 것이다. ‘축제의 이념과 한계’를 다룬 6장은 독일 문학사를 통해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축제의 이념을 설명한다. 이상주의 시대인 1775년 발표된 괴테의 ‘오월의 축제’는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완전한 합일과 거기서 생겨나는 행복을 표현한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리얼리즘 시대에 이르면 문학 속의 축제는 사회의 반목과 갈등을 보여주는 수단이 된다. 20세기 초반 슈테판 게오르게의 시 ‘축제’에서 조화와 절제의 축제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으며 축제가 일상으로 회귀할 때의 ‘눈물’과 ‘탄식’이 주요 표현 대상이 된다.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