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이오” 민주 정부 첫발 내딛다

상하이=김지영 기자 입력 2020-02-08 03:00수정 2020-02-08 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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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91화> 중국 上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인 1920년 1월 1일 정부 요인 58명이 한자리에 모여 신년축하회를 가진 뒤 태극기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 모습이다. 김구(두 번째 줄 왼쪽), 신규식(두 번째 줄 왼쪽에서 여덟 번째), 이동녕(두 번째 줄 왼쪽에서 아홉 번째), 안창호(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아홉 번째) 등이 보인다. 동아일보DB
“만천하 동지 여러분 앞에 선포, 제의하노니… 해외 각지에 현존한 단체의 대소은현을 막론하고 규합 통일하여 유일무이의 최고 기관을 조직할 것. 대헌을 제정하여 민정에 합한 법치를 실행할 것.”

1917년 2월 중국 상하이에서 발표된 ‘대동단결선언’에는 민주공화 정부의 정신이 담겨 있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한국 역사의 정통성을 가질 수 없으며, 독립을 추구하고 민족의 양심을 지키는 세력이 그 정통성을 가진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김병기, ‘대한민국임시정부사’) 또 나라를 빼앗긴 뒤 상하이로 망명해 국권회복 운동을 전개해온 애국지사들이 한국 역사 최초로 근대 국가 수립 의지를 다지고 정부 조직체를 출범시키겠다는 의지를 담은 출사표였다. 신규식을 필두로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 한국독립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이 선언은 1년 반 뒤 상하이 임시정부가 세워지는 근간이 된다.


○ “이제부터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

최근 방문한 상하이시 황푸구 신톈디 지역은 쇼핑몰과 노천카페가 줄지어 있는 가운데 화려한 옷차림의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곳곳의 세련된 유럽식 건물들은 1900년대 초반 이곳이 프랑스인 거주지였음을 알려준다. 어지럽게 붙은 중국어 표지판 사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한글 표지판이 눈에 띈다.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다. 번화가를 맞은편에 두고 길게 늘어선 주거지 초입에 자리한 청사 옆에는 지역주민들이 걸어놓은 빨래들이 널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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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 앞에는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이제복 보훈담당 영사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 주말에는 평균 5000명이 넘는 방문객이 다녀갔다”고 말했다. 손님들을 위한 의자와 탁자가 놓인 공간과 작은 주방이 있는 1층을 지나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니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의 집무실 및 숙소가 복원돼 있었다. 한 국가의 임시정부 거처라기엔 작고 초라한 공간. 하지만 이곳에서 임시정부의 구성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면서 독립이라는 거대한 열망을 키워갔다. 기관지 ‘독립신문’과 미국에 보낸 독립승인요청서 등이 전시된 3층에선 자료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읽는 관람객이 적지 않았다.

1926년 이곳에 자리 잡기까지 임시정부는 10여 차례 개인 집과 한인단체 사무실을 전전해야 했다. 푸칭리 건물 직전에 자리했던 청사와 관련해선 건물 수위와 실랑이를 벌인 한 노인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온다. 회색 중국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이 청사에 들어서자 수위가 “뉘신데 말도 없이 함부로 들어오시오”라며 막아섰다. “내 임정 청사인데 왜 못 들어가는가.” “누굴 만나시려고요.” “나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오.”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며 건물 입구가 떠들썩해지자 김구 등이 뛰쳐나왔다가 깜짝 놀란다. 노인은 다름 아닌 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 박은식(1859∼1925)이었다. 김구 등은 “이봐, 우리 정부의 제2대 대통령이신 분이야. 조심해! 어서 잘 모셔!”라고 소리 지른다.(우승규 ‘나절로 만필’) 박은식의 털털하고 검소한 성격에서 비롯된 해프닝이었다. 3·1운동을 실증적인 시각에서 정리한 역사책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저자로 더 알려져 정치 지도자보다는 학자의 면모가 부각됐지만 박은식은 이념 대립으로 휘청거리던 임시정부 정상화에 크게 기여했다.

임시정부 청사에서 10여 분 거리에 서금이로(路)가 있다. 고가 패션매장과 레스토랑이 밀집된 이곳의 옛 이름은 김신부로. 임시정부가 처음 자리 잡았던 곳이다. 지금은 흔적도 찾기 어렵지만 1919년 4월 이곳에 있던 주택에서 이동녕 의정원(국회에 해당하는 조직) 의장은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한다. “이제부터 우리는 대한제국의 신민(臣民)이 아니고 대한민국의 국민(國民)입니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엄숙한 순간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기다린 일입니까….”(이현희, ‘석오 이동녕 평전’) 이동녕은 당초 의장직을 맡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지지했지만 투표자들의 만장일치로 의장에 추대된다. 그는 떠밀리다시피 맡은 일이었는데도 “능력도 없고 재간도 변변치 않아 송구스럽소이다. 허나 누구든 이 자리를 채워야 빼앗긴 나라를 빨리 다시 찾아가지고 돌아가지 않겠소”라며 사명감 어린 목소리로 의장직을 수락했다. 1954년에서 1966년까지 동아일보에 재직했던 우승규는 1978년 펴낸 회고록 ‘나절로 만필’에서 “(이동녕 의장은) 아침저녁 중국인의 간이음식점에서 월 7원짜리 싸구려 바오판(매달 일정액의 식대를 주고 먹는 식사)을 숙소로 날라다 드시면서 목이 메어 오직 조국의 광복만을 기원하셨다”고 소개했다.

○ 민주정-공화정이 핵심


서이금로에서 다시 10여 분 떨어진 남창로로 이동했다. 좁은 골목길을 들어서자 중국어로 사적지임을 알리는 지정패가 붙은 건물이 보인다. 중국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천두슈가 이곳에서 잡지 ‘신청년’을 냈다. 같은 시기 이곳 2층에 신규식(1879∼1922)이 살고 있었다. 신규식의 외손자 민영백 씨(78)는 “그때 이범석 장군도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곤 했는데 이 장군이 나폴레옹 영화를 보고 와선 감동을 받아 크게 울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독립운동가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헤아려 볼 수 있는 일화다.

임시정부가 세워지는 기초를 마련한 신규식(왼쪽)과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마지막으로 지낸 청사. 동아일보DB·상하이=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신규식이 상하이에 도착한 것은 1911년이었다. 그는 일찍이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음독자살을 시도했을 만큼 나라 사랑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다행히 식구들에게 발견돼 생명을 구했지만 후유증으로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하지만 이에 위축되지 않고 ‘나라가 망했는데 세상을 어찌 바로 볼 수 있겠느냐’며 자신의 호를 ‘흘겨본다’는 뜻의 ‘예관(예觀)’으로 지을 정도로 호기를 잃지 않았다. 그는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던 터전을 만들어낸 공은 거의 신규식의 몫이었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많은 기여를 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신규식이 특히 주목받는 것은 그가 앞장섰던 대동단결선언 때문이다. 김희곤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대동단결선언은 국민이 주인이자 주체가 되는 민주정, 의회를 갖춘 공화정이 핵심으로 대한민국의 건국 방향을 체계적으로 담아냈다”고 말했다. 당시 국내 동포의 참혹한 생활상과 국제 환경, 대동단결의 필요성 등이 적힌 B6판 12개 면과 발기인들의 서명이 적힌 B5배판의 답지 1개 면으로 구성된 이 문서는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민족대회의의 소집을 제안하고 있다. 1919년 일어나는 3·1운동을 기점으로 국내외에서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펼쳐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민주권론에 근거해 공화정을 표방한 대동단결선언이 있었다는 게 학계의 평가다. 대동단결선언을 주도한 신규식을 두고, 민족대표 33인 중 1명인 오세창이 “3·1운동은 예관으로 인해 점화됐다”고 언급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출간된 ‘백년편지’에서 민영백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할아버지는 상하이로 찾아오는 수많은 애국 청년들에게 정신적이고 실질적인 멘토 역할을 하셨다 들었습니다. 상하이의 할아버지 댁에서 하숙하던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 영국 유학을 권하고, 이범석 김홍일 장군을 비롯한 수많은 분들을 군관학교로 보내 공부하도록 하셨습니다. 선진 기술과 영어를 배워야 한다며 저희 아버지 민필호를 중국체신학교에 보내,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IT(정보기술) 인재로 키우셨습니다.” 신규식이 임시정부의 이성적인 근간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인재를 육성하는 데도 앞장섰음을 보여준다.

신규식을 통해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전신(電信)을 배운 민필호는 신규식의 유일한 혈육인 딸 명호와 부부의 연을 맺는다. 한국 근대사에서 주목할 독립운동가 가문이 탄생한 것이다. 민필호는 이후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을 도맡았고 김구 주석의 판공실장을 역임하는 등 독립운동가로서도 큰 활약을 펼쳤다. 그의 독립에 대한 열정은 자녀들에게도 이어졌다. 장녀 영주는 광복군 제2지대 이범석의 비서로 일했으며, 학병에서 탈출해 임시정부를 찾아온 김준엽과 만나 결혼한다. 김준엽은 광복군으로 활동했고 훗날 고려대 총장을 지냈다.

민필호의 장남 영수와 차녀 영애, 둘째 사위 이윤철도 광복군에서 큰 활약을 한다. 이들의 외증조부이자 구한말 정2품 의금부도사였던 신용우 공도 나라가 망한 뒤 의병장 활동에 적극 나선다. 이를 감안하면 4대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셈이다.

상하이=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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