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역사]<1>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 본관

  • 입력 2009년 7월 8일 03시 04분


《광장이었던 서울 여의도공원은 언제 어떻게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됐을까. 서울 강남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와 코엑스몰은 생활방식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세운상가 철거를 놓고 찬반 논란이 뜨거웠던 이유는 무얼까. 당대를 상징하는 한국 건축의 랜드마크에는 역사와 삶이 오롯이 담겨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물에 담긴 이야기를 김광수 이화여대 교수, 김광현 서울대 교수, 김성홍 서울시립대 교수, 이영범 경기대 교수, 이종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장윤규 운생동건축 대표가 전한다.》

시대 아픔 - 욕망의 교차점에 선 근대문화 상징

1930년 설립 당시 지상 4층에 엘리베이터까지
이상의 ‘날개’ 박완서의 ‘나목’ 배경무대 되기도

이상의 소설 ‘날개’에서 주인공이 아내에게 수모를 당한 뒤 ‘주저앉아 지난 세월을 해부하던’ 자리. 박수근 화백을 모델로 한 박완서의 소설 ‘나목(裸木)’에서 화가 옥희도가 생계를 위해 미군 초상화를 그리던 곳.

서울 중구 충무로1가 신세계백화점 본점 본관 건물은 1930년에 지어졌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수많은 ‘모던 보이’와 ‘모던 걸’, 룸펜, 문인, 예술가들이 방황과 훼절, 모멸을 겪은 공간이다. 지금은 거대한 빌딩들에 에워싸여 비교적 만만해 보이는 건물이 됐지만 일제강점기 경성 사람들에게는 충격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당시 ‘혼마치(本町)’로 불렸던 충무로와 명동에 몰려든 일본 상인들은 조선시대 500여 년 동안 이어져 온 상업 중심가 종로를 빠르게 무너뜨렸다. 이들이 혼마치의 조선은행(한국은행) 맞은편 자리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지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백화점 미쓰코시(三越) 경성지점이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관이다.

설계는 미쓰코시 건축사무소의 하야시 고헤이(林幸平)가 했다. 건축면적 100m² 미만인 단층건물이 대부분이었던 당시에 건축면적 1400m²인 이 초대형 건물은 서울 한복판의 명물이 됐다. 서양인이 지은 커다란 건축물이 이외에도 몇 채 더 있었지만 아무나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이 백화점과 철도역사 정도였다.

정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매장이 좌우로 펼쳐지고 그 뒤로 새하얀 대리석 계단이 4층까지 이어졌다. 엘리베이터는 경성을 찾은 시골사람들이 반드시 찾아가 보는 구경거리였다. 모던 걸들은 옥상 정원에서 차를 마시며 저마다 맵시를 뽐냈다. 힘겹게 달구지를 끌고 가는 일꾼 뒤로 높다랗게 버티고 선 백화점 건물의 모습은 흐릿한 흑백사진 속에서 얼핏 초현실적 세계처럼 보인다.

일본은 서양식 백화점을 통해 소비문화에 눈떴다. 1914년 도쿄 니혼바시(日本橋)에 들어선 미쓰코시백화점 본점은 영국 런던의 해러즈, 미국 뉴욕의 워너메이커, 프랑스 파리의 봉마르셰를 모델로 삼은 건물이다.

에밀 졸라의 소설 ‘여자의 행복’ 첫 장면. 일자리를 찾아 프랑스 시골에서 파리로 올라온 주인공은 봉마르셰 백화점 앞에 서서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이 장면처럼 백화점은 산업화, 도시화, 대량생산, 소비문화를 대변하는 건축물이었다. 하지만 경제적 문화적으로 자발적 성취가 부족했던 1930년대 경성의 미쓰코시백화점은 민간 상업자본을 앞세워 일제가 세운 전략적 ‘식민 건축’의 성격이 강했다.

일본은 1910년대 조선에 식민지 경영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6개 은행부터 세웠다. 1920년대에는 경성전기회사(한국전력)를 포함한 10여 개 업무용 건축물을 지었다. 1930년대에는 미쓰코시백화점과 조지야(丁字屋)백화점(미도파) 같은 상업건축물이 들어섰다. 혼마치에 대항해 조선인 박흥식이 자본을 대고 최초의 조선인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화신백화점도 이때 세워졌다.

백화점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 품격 있는 건축물로 남기 어렵다. 목적 없는 군중의 배회가 허용되는 세속적 공간 정도로 여겨진다. 1930년 미쓰코시백화점은 한반도의 전통적 공간이 해체되는 과도기의 중심에 있었다. 이 땅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은 전통적으로 하층민의 공간이었다. 500년 고도(古都) 한복판에 갑자기 솟아 오른 미쓰코시백화점을 선조들이 어떻게 느꼈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암울한 모멸감과 문화적 동경이 교차하는 근대도시 건축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광복 후 동화백화점으로 이름이 바뀐 미쓰코시백화점은 6·25전쟁의 포화에도 살아남아 박완서의 첫 작품에 배경 공간으로 등장했다. 조선 상인들의 자존심이었던 화신백화점을 1987년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우리 손으로 헐어 버린 것은 이와 비교해 볼 때 참으로 아쉬운 아이러니다.

김성홍·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 2회는 이영범 경기대 교수의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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