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파병 요청해 놓고 ‘진주만 기습’ 꺼낸 트럼프 [횡설수설/장원재]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3월 20일 23시 18분


2016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히로시마-진주만 상호 방문은 미일 동맹의 역사적 화해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하와이주 진주만에서 일본을 비난하는 대신 아베 총리 등을 두드리며 “가장 치열했던 적이 동맹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이처럼 일본 정상 앞에서 진주만 공습을 직접 거론하길 삼갔고, 동맹의 가치를 부각하는 맥락에서 간접적으로 다루곤 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달랐다.

▷발단은 19일 미 백악관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 말미에 나온 일본 기자의 질문이었다. “이란 공격을 일본 등 동맹국에 왜 안 알렸느냐. 일본인들은 혼란스러웠다”고 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즉각 “기습에 대해 일본보다 잘 아는 나라가 있느냐. 그럼 왜 진주만은 미리 알려주지 않았냐”고 받아쳤다. 1941년 12월 선전포고 없이 이뤄진 일본의 기습을 농담 섞어 꼬집은 것이다. 미국 측에선 웃음이 터졌지만,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굳은 얼굴로 눈을 크게 뜬 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속보로 전했다.

▷미국 내에서도 비판이 많았다. 뉴욕타임스(NYT)는 브루킹스연구소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해 “동맹의 유대를 강조해야 할 자리에서 나온 이례적이고 충격적인 발언”이라고 썼다. 보수 진영에선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이 진주만 공습처럼 부당했다는 말이냐는 지적이 나왔다. 한편 트럼프의 발언이 호르무즈 해협에 더 기여하라는 대일 압박용 메시지였다는 시각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아베 총리를 만났을 때도 “진주만을 기억한다”며 무역 협상에서 양보를 요구한 바 있다.

▷불편한 과거사를 불쑥 꺼내 상대를 압박하는 건 트럼프 대통령의 단골 수법이다. 지난해 6월 미국을 찾은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에게는 “내일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념일인데 당신들에겐 썩 기쁜 날은 아니잖냐”고 물었다. 메르츠 총리는 “아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나치 독재로부터 우리가 해방된 날”이라며 넘어갔다. 올 1월 다보스 포럼에선 “(2차대전 때) 미국이 없었다면 여러분은 독일어와 일본어를 쓰고 있었을 것”이라며 유럽 동맹국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독일과 달리 과거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일본에선 아직도 ‘대동아(大東亞) 전쟁’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진주만 공습과 태평양 전쟁을 정당화하는 시각이 남아 있다. 아베 총리가 진주만까지 가서 헌화를 하고도 미국에 사과를 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외교적 결례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과거사 청산이라는 문제가 아직도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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