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이란이 미국을 2-1로 물리치고 승리하자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몰려 나와 환호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이원홍 콘텐츠기획본부 기자1998년 6월 21일 수도 테헤란 등 이란 전국의 거리에는 수백만 명의 인파가 쏟아져 나와 환호했다. 이날은 이란이 프랑스 월드컵에서 미국을 상대로 2-1 승리를 거둔 날이었다. 미국 언론이 표현한 대로 이란 입장에서는 ‘역사적 승리’였다. 우선 이 승리는 이란이 전체 월드컵에서 거둔 첫 번째 승리였다. 또한 오랫동안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미국을 상대로 한 승리였기에 그 승리감이 배가됐다. 당시 이란의 최고 지도자였던 알리 하메네이는 ‘거대한 사탄’으로 표현했던 미국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선수들을 격려했다.
이란과 미국은 1979년 이란이 미국인 수십 명을 인질로 잡고 444일간 풀어주지 않았던 ‘이란 인질 사태’ 이후 관계가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태에서 월드컵 무대에서 처음 만났다. 월드컵 역사상 가장 정치적으로 민감한 경기로 꼽혔던 이 경기는 테러 우려 속에 삼엄한 경비가 펼쳐진 가운데 열렸다. 그러나 정작 경기는 평화적으로 치러졌다. 경기 시작 전 이란 선수들은 미국 선수들에게 평화의 상징인 흰 장미를 전했고 미국 선수들은 미국 축구연맹 깃발을 건넸다. 두 팀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 경기의 덕을 크게 본 것은 이란이었다. 국제무대에서 자신들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표출할 기회를 얻었고, 미국전 승리를 체제선전에 대대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국내외 이란인들이 대규모 응원을 통해 굳게 결속하고 단합하는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이란은 이때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이후 20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상태였는데,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됐을 때도 이란은 전국적인 열기에 휩싸여 대규모 축하 행사를 열었었다. 국기를 달고 몸과 몸이 부딪치는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격렬한 집단 대결을 펼치는 축구는 가장 내셔널리즘적인 요소를 지닌 스포츠다. 이란의 승리는 이러한 축구 대결의 특성이 자국 내 민족주의적 분위기와 결부되며 가장 큰 정치적 효과를 낸 사례 중 하나다. 이란과 미국은 모두 조별리그를 통과하지 못했지만 이란으로서는 이 승리 하나로 충분했다.
그랬던 이란은 6월 열리는 2026 북중미 월드컵 불참을 선언했다. 이란의 체육부 장관이 11일 국영TV에서 최고지도자가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사망한 점을 거론하면서 이란 선수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에 미국 및 멕시코 캐나다가 공동 개최하는 이번 월드컵에 참가할 수 없다고 밝혔다. 1998년 월드컵에서 이란의 미국전 승리를 격려했던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는 지난달 사망했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일단 이란의 불참을 확정하지 않고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이란이 불참한다면 이라크나 아랍에미리트(UAE)가 대체 출전할 가능성이 크다. 이라크는 대륙 간 플레이오프를 통해 아시아에 주어지는 8.5장의 월드컵 티켓 중 마지막을 노리고 있다. UAE는 대륙 간 플레이오프 출전 자격을 놓고 마지막까지 이라크와 대결했으나 패했다. 이란이 빠진 자리에는 월드컵 본선 진출에 가장 근접했던 이 나라들을 출전시키는 것이 합당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FIFA가 재량권을 발휘해 축구시장이 큰 중국을 출전시킬 수도 있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중국은 예선에서 3승 7패로 최하위권의 성적을 냈다. 그보다 성적이 좋은 팀들을 놔두고 FIFA가 중국을 임의로 출전시킨다면 전 세계적인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이란의 입장 변경 여부다. 전쟁 종결 시점과 종결 형식에 따라 이란이 불참 선언을 번복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이전부터 내부 분열 조짐을 보인 데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란 국민들을 결속하고 정서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월드컵보다 좋은 무대나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이란이 “미국 아닌 멕시코에서 경기를 치를 수 있다면 출전을 고려하겠다”는 등 다시 조건부 출전론을 들고 나오고 있는 것이 단순한 제스처만은 아닐 것이다. 전쟁이 일찍, 그리고 이란의 체면을 어느 정도라도 세워 주는 식으로 마무리된다면 이란이 월드컵에 복귀할 수 있다.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고도 불참하면 FIFA의 제재를 받는다. 이란이 끝까지 불참해 징계를 받게 된다면 막대한 벌금보다도 다음 월드컵 출전 제한을 받는 것이 가장 뼈아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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