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나치 만난 정신과 의사, 악의 실체를 파헤치다

  • 동아일보

나치 전범 22명 정신 진료 맡아
‘악의 본질적 특성’ 분석했지만
평범한 사람과 다른점 못 찾아
◇뉘른베르크, 나치와 정신과 의사/잭 엘하이 지음·채재용 옮김/336쪽·1만8000원·히포크라테스


1945년 8월 4일. 독일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준비가 한창이던 때였다. 미국 정신과 의사인 더글러스 맥글래션 켈리는 이 재판에 파견 명령을 받았다.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재판을 온전히 치를 수 있도록 전범들의 정신상태를 유지시키는 것. 그러나 야심 찬 의사였던 켈리는 한 가지 개인적 목표를 품었다. 역사상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22명의 전범에게서 공통된 정신적 결함을 찾아내 보고자 했다.

이 책은 악의 중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정신과 의사 ‘더글러스 맥글래션 켈리’의 이야기를 다룬다. 켈리의 시선에서 전범들의 면면을 쫓는 이 책은 켈리의 삶과 악에 관한 그의 관점을 교차시키면서 악의 진정한 실체를 고민하게 한다.

우선 켈리의 목표였던 ‘악의 본질적 특성’은 존재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답을 찾지 못했다. 오히려 더 큰 문제에 직면했다. 자신의 첫 검진 대상이었던 ‘헤르만 괴링’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매료돼 버렸다. 홀로코스트를 승인한 나치 독일의 2인자 괴링은 히틀러의 예스맨으로 알려져 있지만, 켈리가 본 그는 그렇지 않았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으나 “최고 수준에 달하는 뛰어난 지능”을 갖췄으며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예상치 못한 딜레마에 혼란스러워하던 켈리는 결국 악의 본성을 두고 이러한 결론을 내린다. “최고위 나치들이 끔찍한 행위를 자행하도록 이끈 자질은 세계 곳곳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안에도 존재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수단이든 이용하는 존재라면 모두가 나치 전범과 다름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는 훗날 해나 아렌트가 제기한 ‘악의 평범성’과는 차이가 있다. ‘악의 평범성’은 상부의 명령에 기계적으로 따르는 인간의 사유 부재와 수동성을 악의 근원으로 봤다. 반면 켈리는 전범들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환경을 만들어냈다”며 “이들은 공격적이고 영리하고 냉혹한, 여느 사업가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켈리의 주장은 그 자신의 삶을 대변하는 문장이 된다. 저자가 추적한 켈리의 일생은 놀랍게도 괴링과 닮아 있다. 켈리가 가진 가혹할 정도로 큰 야망은 집안 대대로 흐르는 기질이었다. 그는 뉘른베르크에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재판 이후 폭주하듯 연구에 매달렸다. 그 과정에서 쌓인 좌절감과 분노는 가족의 몫이었다. 켈리의 아들은 아버지를 “뭐든지 다 빨아들이는 스펀지이면서도 동시에 날뛰는 황소 같았다”고 표현했다.

켈리의 과도한 성취 지향이 난폭한 폭력으로 번지는 과정을 쫓아가다 보면, 타인을 짓밟는 악은 대체 누구인지 되묻게 된다. 켈리는 생전 한 강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여러분은 그런 이들이 여기엔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저는 미국에도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들은 나머지 절반을 지배할 수만 있다면 미국인 절반의 시체를 밟고서라도 기꺼이 그 자리에 오르려는 자들입니다.”

#독일 뉘른베르크#국제군사재판#나치 전범#악의 본질#홀로코스트#악의 평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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