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유종]노사정 함께 산재 줄이는 한국판 로벤스委 운영을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3월 9일 23시 09분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1966년 10월 21일 영국 웨일스 에버판 탄광지역에 폭우가 내렸다. 쌓아둔 석탄 폐기물이 무너지며 초등학교와 주택을 덮쳤고 144명이 숨졌다. 참사는 영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당시 영국의 근로자 10만 명당 산업재해 사망자는 서너 명으로 현재 한국과 비슷했다. 사고 60년이 지난 현재 영국은 산업재해 사망자가 10분의 1 수준(0.37명)으로 줄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했을까.

영국 정부는 석탄공사 대표를 맡고 있던 앨프리드 로벤스 경(1910∼1999년)에게 ‘왕립 일터보건안전위원회(로벤스위원회)’를 맡기고 해법을 주문했다. 로벤스 경은 15세에 사환으로 시작해 노동조합 간부, 시의원, 국회의원, 노동부 장관 등을 지낸 관록의 인물이었다. 그는 10여 명의 위원과 함께 기업인, 노조, 근로감독관을 만나 현장 의견을 들었고 개인과 기관에서 183건의 의견서를 받았다. 미국, 스웨덴, 서독 등을 찾아 해외 사례를 수집하기도 했다.

위원회는 2년간 활동한 뒤 1972년 200여 쪽짜리 ‘로벤스 보고서’를 내놓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산재 방지 시스템은 크게 정부 규제와 산업계 노력으로 작동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규제마저 허술했다. 19세기에 만들어진 9개의 법령과 500여 개의 시행령 규정이 여러 기관에서 집행되면서 행정 비효율이 매우 컸다. 많은 규정이 파편적이라 담당 공무원도 내용을 잘 모를 정도였다.

게다가 정부는 규제에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으며 기업과 근로자의 자율적 노력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보고서는 산업재해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이유로 ‘무관심’을 지목했다. 규정과 지침을 새로 만들기보다는 근로자에게 피해가 발생하는 원인을 찾아 위험을 방지할 수 있는 노사 공동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선 현장 의견이 최고 경영진까지 수시로 오갈 수 있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국내 산업안전보건 시스템은 사업주를 산업재해 예방의 최종 책임자로 두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선 서류 제출, 규정 보완, 온라인 안전교육 등 형식적인 의무 이행에만 그치는 사례가 많다. 현장 상황을 잘 모르는 사업주가 현실적으로 위험 요인을 파악하고 제거하기엔 역부족이다. 소통 시스템이 없는 것도 아니다. 임직원이 100명을 넘는 기업에는 노사가 절반씩 참여하는 산업안전보건위원회가 설치돼 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뿐이다.

어쩌면 반세기 전 영국의 보고서는 현재 한국의 상황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노사가 함께 자율 규제로 산재를 줄일 수 있다는 기본 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싱가포르도 로벤슨 보고서를 참고한 뒤 20여 년 동안 근로자 10만 명당 사망자를 약 5명에서 1명 이하로 줄였다.

정부는 산업안전 감독 사업장을 지난해 2만4000곳에서 올해 5만 곳으로 늘리고 감독관도 895명에서 올해 말 2095명까지 증원하겠다고 밝혔다. 여전히 규제와 감독에 무게를 둔 방식이다. 로벤스 보고서의 힘은 노사와 여야가 협업하고 합의한 ‘정치 과정’에도 있다. 이제 우리도 노사정이 함께 한국판 로벤스위원회를 꾸려 산재 감축 해법을 찾고 현장 의견이 최고 경영진까지 수시로 오가는 실질적인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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