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고래 한 마리[정덕현의 그 영화 이 대사]〈90〉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1월 13일 23시 06분


“넌 춘자의 마음속에 예쁜 고래로 남아 있을 거야.”

―배창호 ‘고래사냥’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소설가 최인호가 가사를 쓰고 송창식이 부른 ‘고래사냥’은 1975년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 배경음악으로 쓰였다. 영화 끝에 영철(하재영 분)이 고래를 잡으러 간다며 자전거를 타고 바다로 뛰어들 때 흘러나온다. 이 영화는 당시 독재정권에 무자비한 칼질을 당했고, 노래 또한 금지곡이 됐다. 하지만 1983년 최인호는 ‘고래사냥’이라는 소설을 출간했고, 배창호 감독은 이를 영화로 만들었다.

짝사랑에 실패한 소심한 대학생 병태(김수철 분)가 고래를 잡겠다며 가출했다가 우연히 만난 민우(안성기 분)라는 거지와 함께 사창가에 잡혀온 벙어리 춘자(이미숙 분)를 고향까지 데려다주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사실 대단한 스토리는 아니지만, 당대에는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청춘들의 답답한 정서를 고래사냥이라는 은유로 풀어낸 로드무비였다. 그런데 이들이 잡겠다던 고래는 도대체 뭘 의미했던 걸까. 벙어리인 줄 알았지만 폭력 앞에 말을 빼앗겼던 것뿐인 춘자처럼, 입이 있어도 마음껏 말하고 노래할 수 없었던 시대의 억압 속에서도 끝내 버리지 않던 꿈이 아니었을까.

5일 ‘국민 배우’ 안성기가 별세했다. 무수한 명작들에 출연했지만 내게 떠오르는 한 작품은 ‘고래사냥’이다.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며 하고픈 이야기들을 마음껏 쏟아내던 민우라는 왕초의 모습에 안성기가 살아온 배우의 삶이 겹쳐져서다. 영화 끝에 민우는 병태에게 말한다. “춘자는 고향에 와서야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거야. 하지만 꿈은 곧 잊혀지지. 그리고 병태 넌 춘자의 마음속에 예쁜 고래로 남아 있을 거야.” 안성기 역시 우리들 가슴에 예쁜 고래 한 마리로 남게 될 것이다.

#고래사냥#배창호#안성기#최인호#자유#억압#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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