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와 전남 목포를 이어주었던 대형 여객선 S호의 김모 선장은 세월호 참사 이듬해인 2015년 한 언론과 인터뷰했다. 주제는 선장으로서 그가 얼마나 안전에 신경 쓰고 있는지였다. 세월호를 수차례 언급한 그는 “문제가 있는 곳이 바로 선장이 있어야 할 곳”이라면서 “(S호가 취항한 이후) 위험했던 순간은 없었다”고 했다. S호는 세월호와 다르다고 강조한 것이다.
참사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때였다. 더구나 S호는 최대 승선 인원이 921명으로 세월호의 2배 수준이었다. 김 선장은 선사를 찾아가 승객과 선원의 안전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고도 했다. 대형 여객선의 선장으로서 응당 가져야 할 책임감이었다. 실제 S호는 잔고장은 있었지만 인명피해 사고는 없었다. “문제 있는 곳에 있어야”라던 선장의 부재
김 선장이 당시 인터뷰까지 나선 까닭은 세월호 선장인 이준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준석은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을 때 승객에게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희생자가 탈출을 주저하게 만든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도 그때 나왔다. 그뿐만 아니다. 세월호가 바다에 침몰하던 순간 이준석은 세월호를 빠져나갔다. 수화물 과적(過積), 안전 불감증, 승무원들의 구조 외면이 겹친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 304명의 죽음이었다.
시간은 기억을 희미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기억을 놓지 않아야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은 더욱 그렇다. 그런데 세월호를 거론하며 인터뷰까지 했던 김 선장의 뇌리엔 세월호 참사의 기억이 적어도 19일 밤엔 없었던 듯하다. 그는 그때 전남 신안군 족도에 267명의 승객을 싣고 좌초된 퀸제누비아2호의 선장이었다.
사고가 난 협수로에서는 안전을 위해 자동 조종장치를 사용하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퀸제누비아2호는 수동 운항을 하지 않았고, 결국 좌초됐다. 경찰은 김 선장이 사고 당시 조타실이 아닌 선장실에서 휴식을 취했다고 보고 사전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는 “위장 장애로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라고 했지만 선원들은 그가 1000여 차례 항해 동안 조타실에 나오지 않았다고 진술한 상태다. 김 선장만 그랬던 게 아니다. 일등 항해사는 “배를 자동으로 설정해 두고 뉴스를 보고 있었다”고 했다. 홀로 키를 잡고 있었던 조타수는 배가 족도를 향해 가던 순간에 방향을 돌리지 않았다.
수사로 사실관계가 확인돼야겠지만 사고가 난 뒤 안내방송이 뒤늦게 나왔다는 복수의 증언까지 나온다. 적지 않은 승무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정황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안전 불감증은 세월호를 겪고도 별반 바뀌지 않았다.
세월호 교훈 망각, 김 선장뿐일까
퀸제누비아2호 승무원이 잊었던 세월호의 교훈은 역설적으로 19일 밤 많은 이들에게 세월호를 떠올리게 했다. 퀸제누비아2호에 탔던 승객뿐만 아니라 뉴스 속보를 접한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이 2014년 4월 16일 오전의 기억을 되새김질했다. 다행히도 참사는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들 일부가 세월호를 잊었다는 점은 분명해졌다.
혹 ‘나는 참사의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해 그 교훈을 잊지 않았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이들에겐 김 선장의 인터뷰 한 대목을 얘기해줬으면 한다. 그도 이듬해 인터뷰에서 참사 당시 상황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선장이 탔던 배가 세월호가 침몰하던 순간 함께 바다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세월호와 거리는) 멀지만, 승객 등을 구하러 가야겠다는 생각에 무전 내용에 귀를 기울였는데 먼저 도착한 주변 선박들로부터 ‘(구할) 사람이 없다’는 내용을 들었다”며 참담해했다. 11년의 시간은 세월호 승객을 구하려 했던 이들까지 망각에 젖어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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