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 방어-부채 상환 등에 이용
주식가치 떨어져 투자자들 반발
금감원, 지난해 8곳 유증 제동
“이사회, 대주주 견제기능 높여야”
개인투자자 이모 씨(41)는 5년 넘게 보유해 온 고려아연 주식 300여 주를 지난해 11월 모두 처분했다. 고려아연이 2조50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통해 공개매수 때문에 발생한 차입금을 갚겠다고 밝힌 것에 따른 선택이었다. 이 씨는 “내가 갖고 있는 주식 가치가 희석되는 것도 속상한데, 증자 대금이 신규 투자가 아닌 경영권 분쟁에 따른 차입금의 상환에 투입된다는 점을 납득하기 힘들었다”고 성토했다. 당시 고려아연이 추진했던 대규모 유상증자는 결국 금융감독원의 제동으로 인해 무산됐다.
기업이 주식을 발행해 자금을 마련하는 ‘유상증자(유증)’가 최근 2년 사이 2배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기업의 근본적인 경쟁력을 위해서가 아닌 부채 상환, 본업과 무관한 회사 인수 등을 위한 유증이 잇따르면서 주주들의 볼멘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2일 금감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총 324개 기업이 실시한 유증은 495건이었다. 건수를 기준으로 봤을 때 2023년(347건) 대비 42.6%, 2022년(283건)에 비해서는 74.9% 늘어났다. 유증은 새로운 주식(신주)을 발행해 자본금을 늘리는 것으로 기업의 자금조달 방식 중 하나다. 투자은행(IB) 업계 고위 관계자는 “기업들의 실적이 전반적으로 저조한데 고금리 장기화로 대출 및 회사채 이자 부담까지 커진 상황”이라며 “이렇다 보니 유증을 통해 운영 자금을 마련하는 기업이 늘어났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단기적으로 유증은 기존 주주에게 악재로 여겨지는 편이다. 신주가 발행되면 회사의 총 주식 수가 늘어나 기존 주주의 지분가치가 줄어든다. 기업이 조달 자금을 시설 확충, 인수합병 등에 활용해 경쟁력이라도 높이면 다행인데, 문제는 최근 들어 주주뿐 아니라 금융당국도 수용하기 힘든 유증 추진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감원은 지난해 유증 목적의 신고서를 제출한 금양, 고려아연, 이수페타시스 등 8곳에 “정정해서 다시 내라”고 요구했다. 고려아연은 영풍-MBK파트너스와의 경영권 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자사주 공개매수 직후 유증을 추진해 논란이 됐다. 반도체 기판 업체 이수페타시스는 2차 전지 회사를 인수하기 위해 유증을 시도했으나, 여의도 증권가로부터 본업과의 시너지 창출 계획이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두 회사 주가는 유증 계획을 밝힌 직후 모두 하한가(―29.94%)를 기록하기도 했다.
결국 금감원이 증권신고서를 잇달아 반려하면서 고려아연의 유증은 사실상 무산됐다. 이수페타시스는 경영권 인수 계약을 해지하고 유증 규모를 크게 줄였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상식적으로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유증이 지난 한 해 동안 너무 많았다”며 “유증이 필요한 이유를 주주와 투자자에게 납득시켜야 할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사회가 기업 대주주의 의사결정을 견제하지 못하다 보니 이처럼 기존 주주들에게 피해가 가는 무분별한 증자가 빈번하다고 지적한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결국 기업의 유상증자도 이사회 결의를 거쳐야 가능한 사안인데, 이사회가 (대주주를) 전혀 견제하지 못하다 보니 이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라며 “이사회의 충실 의무를 주주로 확대하는 동시에, 이사회에 대한 책임 부과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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