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표선고가 쏘아 올린 IB의 가능성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24일 14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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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서귀포시 표선면에 있는 표선고. 학령인구 감소로 표선중과 통합 대상이었던 이 학교가 IB 프로그램 도입으로 이젠 신입생이 몰리는 학교로 바뀌었다. 표선고 제공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의 공립고교인 표선고가 IB(국제 바칼로레아) 프로그램 도입을 통해 K-에듀의 희망을 쏘아올렸다. 표선고는 이석문 전 제주도 교육감이 학령인구가 줄어 표선중과 통합을 검토했을 만큼 존폐 자체를 걱정한 학교였는데 2024학년도 대입에서 ‘대박’을 쳤다.
제주도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오지 학교’가 남부럽지 않은 대입 성과를 낸 비결은 상생 교육을 추구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 대학에 간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현실에서 사교육을 줄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 2021년 전국 최초로 전교생 대상 IB 프로그램 도입
표선고는 2021년 전교생을 대상으로 IB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지역소멸 위기를 교육으로 대응하고, 타인과의 경쟁이 아닌 자신과의 경쟁을 통한 학생의 내적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표선고는 시작부터 ‘어려운 IB 과정을 시골 학생들이 과연 해낼 수 있을까’라는 회의적 시각을 극복해야 했다. IB의 중심인 교사들의 자발적 참여를 끌어내는 것과 ‘사교육 도움 없이 과연 대학에 갈 수 있을까’라는 학생, 학부모의 걱정을 잠재워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었다.
표선고의 전교생 대상 IBDP(IB 고교프로그램) 전면 실시는 국내 공립고교에서는 최초였고, 그것도 오지 학교에서 시도됐기에 교육계에서는 무모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표선고와 같은 시기에 IB를 도입한 대구의 3개 고교는 학생 일부만을 대상으로 했다.

2023년 6월 이주호 교육부 장관이 표선고 학생들의 과학 수업을 참관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수준급 대입 성적에 다양한 진로 개발도 특징
임영구 표선고 교장은 진학의 스펙트럼이 넓은 것에 의미를 뒀다. 세간에서 중시하는 속칭 명문대 진학도 의미가 있지만 “아이들의 다양성을 뒷받침하는 진로 탐색 결과가 대학 진학으로 나타난 게 교육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표선고의 2024학년도 대입 성적은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105명의 졸업생은 수시모집에서 중복합격을 포함하면 202개 대학에 합격했다. 이 가운데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에 각 1명, KENTECH(한국에너지공대) 1명, UNIST(울산과학기술원) 2명, DGIST(대구경북과학기술원) 2명을 비롯해 20명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대학에 합격했다.
거점국립대는 12명이 합격했고, 해외 대학인 도쿄 농업대와 미국 캘리포니아 SOKA 에도 지원해 1월 전형을 앞두고 있다. 국내 전문대학 합격자는 35명. 22일 현재 9명 만이 진로가 정해지지 않았는데 취업 준비 4명, 정시 지원 3명, 재수 및 IB 재수가 1명씩이다. 재수생의 비율이 현저히 적다는 건 자신들이 원하는 진로에 따라 대학에 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 IB 도입 전후의 대입 성적
표선고의 수시 결과는 IB가 어떻게 오지의 아이들을 변화시켰는지 보여준다. IB 도입 전인 2021학년도 대입 성적은 4년제 대학 진학 53명, 전문대 진학 31명에 그쳤다. 이 가운데 7명이 속칭 ‘인서울’ 대학에 들어갔지만, SKY 합격자는 한 명도 없었다.
개교 이래 최고의 성적을 올렸던 2023학년도의 대입 결과도 인서울 5명(서울대, 성대, 이대 각 1명, 한양대 2명) 4년제 대학 46명으로 2021학년도보다 약진했지만 2024학년도 결과에는 미치지 못한다.
제주교육청이 올해 대학에 진학하는 표선고 학생들이 1학년일 때인 2021년 실시한 ‘IB 교육 효과 분석 종단 연구’(연구책임자 이혜정)에서 4년제 대학 이상 진학 희망자는 46%, 전문대 진학 희망자는 10%로 조사됐다. 하지만 이 학생들은 3년간의 IB 교육을 받은 후 4년제 대학 진학 57%, 전문대 진학 34%라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4년제 대학 진학률로만 IB의 효과를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학생들의 기대를 뛰어넘은 결과가 나온 것은 IB가 학생들을 변화시키는 데 많은 영향을 줬다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표선고 오케스트라. 표선고 제공


○ 학생들 역량 전반적으로 향상…사교육 의존 없이 지역 열세도 극복
임 교장은 “학생들의 역량이 전반적으로 올라갔고 특히 중하위권 학생의 향상이 두드러졌다”고 말했다. 중하위권 학생에 대한 대책이 사실상 없는 한국교육에서 드문 일이다. 중하위권은 대부분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학생)’가 많고 사교육 인프라가 도시보다 부족한 농어촌의 경우 성적 향상이 힘들다는 통념을 뒤엎은 결과이다. 표선고 학생들은 2022년 제주도 수학 경시대회에서 연거푸 1등을 해 제주도를 놀라게 한 적도 있다.
표선고 IB 1기 입학생의 지역 분포는 표선면 48%, 제주시 서귀포시 등 다른 지역 52%였다. 이번 입시에서 최상위 결과를 낸 학생들의 중학교 내신성적은 중상위권이었다. 표선고의 조사에 따르면 사교육 의존도는 10%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비해 2023년 전국 초중등 사교육 참여율은 78%이다. 표선고의 성과는 2024학년도 자체 신입생 선발 점수가 10점이 올라가고, 125명 모집에 140명이 지원하는 등 즉각적인 반응으로 나타나고 있다. 덩달아 표선면과 IB 교육에 대한 호감도도 올라가고 있다.

○ IB, 한국교육 변화 동력 가능성
세간의 통념을 뛰어넘는 표선고의 결과는 IB가 한국교육 변화에 마중물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교육 성과는 입학 성적보다 학생, 학부모, 교사의 만족도와 참여도가 중요한데 IB는 이 부분에서 뚜렷한 성과를 냈다. 임 교장은 “학생들의 만족도가 높다”고 했다. 성균관대에 진학한 박가영 학생의 어머니 장민주 씨는 “대학을 안 가도 가영이가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IB를 경험하면서 성장했다”고 했다. IB 학교에 근무하는 대다수 교사는 “학생들의 변화가 교사들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라고 입을 모았다.
임 교장은 “IB가 교육 혁신의 동력이 될 수 있다면서”도 “시범적 실시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축적한 후 우리 특성에 맞는 교육 시스템을 개발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IB 초등프로그램은 확대에 특별한 문제가 없지만, 교사의 주도로 논·서술형 평가를 하고 학생들을 토론으로 유도하는 IB 중등 프로그램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경험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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