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의 ‘현실주의 외교’가 남긴 것들[김상운의 빽투더퓨처]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2월 11일 1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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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키신저와 국제정치 上

최근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부 장관의 죽음을 계기로 ‘현실주의 외교’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미중갈등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지정학의 시대가 다시 도래한 요즘 국제정치 환경도 이런 움직임에 힘을 보태고 있죠. 도덕이나 가치보다는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을 통한 질서 구축을 중시하는 키신저식 현실주의 외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국제정치 분야 석학이자 고위 관료였던 키신저는 자신의 이론을 현실정치에 적용하며 미국 외교의 핵심 원칙을 세운, 희귀한 경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중동과 유럽뿐 아니라 미중 데탕트, 북미관계 등 한반도 문제에까지 폭넓게 개입했죠.

그래서 키신저의 사상과 삶을 이해하는 건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여러 부고 기사들을 통해 관료로서 그의 삶이 잘 알려진 만큼, 이번 글에선 ‘Diplomacy’ 등 키신저의 대표 저작을 비롯한 국내외 문헌을 통해 그의 학문과 사상이 현실정치에 끼친 영향을 집중적으로 다뤄보겠습니다.

키신저 외교관(外交觀)의 뿌리, ‘빈 체제’
국무장관 재임 시절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대화하는 헨리 키신저. 두 사람은 역사적인 미중 데탕트를 이끌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을 계기로 애증의 관계가 됐다.  동아일보DB
국무장관 재임 시절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대화하는 헨리 키신저. 두 사람은 역사적인 미중 데탕트를 이끌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을 계기로 애증의 관계가 됐다. 동아일보DB
키신저의 현실주의 외교관은 그의 1954년 하버드대 박사학위 논문(Peace, Legitimacy, and the Equilibrium: A Study of the Statesmanship of Castlereagh and Metternich) 주제인 19세기 유럽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논문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수상과 영국의 캐슬레이 외무장관이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의 질서를 회복한 과정을 분석했는데 나중에 ‘회복된 세계’라는 책으로 발간됐습니다.

키신저는 탈냉전 이후 세계질서가 양극체제에서 벗어나 다수의 강대국들이 각축전을 벌이며 세력균형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19세기 유럽의 ‘빈(Wien) 체제’와 유사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죠.

나폴레옹 전쟁으로 초토화된 직후인 19세기 초반 유럽에서는 무너진 평화를 복원하는 동시에 공화정이라는 전염병을 차단하고 군주정으로 회귀하는 게 지상과제였습니다. 이것이 유럽 주요 강대국들이 1814년 오스트리아에 빈에 모여 새로운 국제질서를 논의한 목적이었죠(‘빈 회의’)

당시 빈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은 동상이몽을 품고 있었는데요. 나폴레옹을 굴복시킨 최강국 러시아의 차르(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 이목이 쏠립니다. 독실한 러시아 정교도였던 그는 1812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치세를 앞당기는 대의를 위해 세속의 모든 영광을 바칠 것”이라고 쓸 정도였죠.

그는 빈 회의에서 형제애라는 기독교 원리에 따라 상호 적대적인 세력균형을 포기하고 공동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신성 동맹(Holy Allance)’을 주창합니다. 이에 대해 키신저는 “원칙에선 월슨 미국 대통령의 구상과 정반대이지만 이것은 월슨이 구상한 세계질서의 전신(前身)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알렉산드르 1세의 구상이 공동의 대의와 도덕 원칙에 입각한 윌슨주의(자유주의 외교)와 흡사하다고 본 거죠.

이에 비해 키신저가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꼽았던 오스트리아 수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1773-1859)는 도덕 원칙이 아닌 상호이익 관점으로 접근합니다. 나폴레옹 전쟁을 일으킨 프랑스에 맞서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 프로이센의 ‘4국 동맹’을 주도하면서 세력균형의 회복을 시도한 겁니다.

빈 회의 결과로 확정된 1815년 유럽 각국의 국경선. 프러시아의 영토가 확대되는 등 오랜 세월 분열됐던 독일의 통합이 이뤄지는 계기가 마련됐다. 그것은 유럽에서 또 하나의 비극을 잉태한 것이었다.  위키피디아
빈 회의 결과로 확정된 1815년 유럽 각국의 국경선. 프러시아의 영토가 확대되는 등 오랜 세월 분열됐던 독일의 통합이 이뤄지는 계기가 마련됐다. 그것은 유럽에서 또 하나의 비극을 잉태한 것이었다. 위키피디아
키신저는 메테르니히가 ‘군주정 회복’이라는 공통의 보수적 가치 아래 각국의 이해관계를 적절히 조율해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약 100년에 걸친 장기 평화를 이뤘다고 봤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아무리 불완전한 동맹이라고 해도 협력을 통해 ‘힘의 균형’을 유지하며 세계질서를 지키는 것이 혼돈과 혁명보다 낫다는 키신저의 ‘현실정치(Realpolitik)’는 메테르니히에서 출발했다”는 분석을 최근 내놓았죠.

빈 체제가 비교적 장기 평화를 가져온 데에는 세력균형을 위해 패전국 프랑스까지 동맹으로 끌어들인 실리 외교도 한몫했습니다. 빈 회의에서 4국 동맹은 나폴레옹이 해외 원정을 시작하기 직전의 프랑스 국경선을 인정해줬을 뿐 아니라, 빈 체제가 성립된 지 불과 3년 만인 1818년에는 프랑스를 포함한 ‘5국 동맹’을 출범시키죠.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베르사유 조약에서 패전국 독일의 국경선을 대폭 축소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려 2차 대전의 불씨를 남긴 것과 비교됩니다.

이에 대해 키신저는 “메테르니히가 생각한 질서는 자국의 이익을 다른 국가들의 이익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며 “빈 체제의 5국 동맹이 2차 대전 종전 후 독일이 ‘대서양 동맹’에 가입한 사건의 선례(先例)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미국은 2차 대전 최대 피해국 중 하나인 프랑스의 반발에도 독일 재무장과 나토 가입을 추진하죠. 종전 후 미소 냉전이 본격화됨에 따라 소련의 안보 위협에 대한 대처가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태평양전쟁 피해 당사국인 미국이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해 면죄부를 준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당시에도 한국 등 일본 식민지배 피해국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미국은 일본의 신속한 전후 복구와 경제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전후 배상 책임을 면제해주죠. 동아시아에서 미국을 대신해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할 국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강력한 미일동맹을 형성해 동아시아 평화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36년에 걸쳐 식민지배를 겪은 한국으로서는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일본의 과거사 반성이 미진한 건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영향도 있다는 분석도 있죠.

키신저는 다양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냉엄한 국제정치 현실에서 빈 체제의 효용성은 크다는 입장입니다. 특히 19세기 유럽처럼 5, 6개의 강대국들과 많은 약소국들로 이뤄진 탈냉전 이후 국제체제에서는 세력균형을 통해 상호 경쟁하는 국익을 조정하는 과정이 필수라는 겁니다.

현실주의 거부한 미국의 외교 전통
1943년 테헤란회담 당시 스탈린과 루스벨트, 처칠. 키신저는 루스벨트의 2차대전 전후 처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동아일보DB
1943년 테헤란회담 당시 스탈린과 루스벨트, 처칠. 키신저는 루스벨트의 2차대전 전후 처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동아일보DB
키신저는 빈 체제의 절묘한 세력균형을 예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은 전통적으로 현실주의 외교와 거리를 뒀습니다. 이는 미국 특유의 지정학적 이점에서 연유하는데요. 오랜 세월 국경을 맞댄 여러 나라들이 전쟁을 벌인 유럽 대륙과 대양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데다, 주변에 대적할 만한 경쟁국이 없던 덕분에 미국은 세력균형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유럽 입장에선 천혜의 요새를 갖춘 신생국의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도 있는 대목이죠.

여기에 종교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세계로 떠난 청교도 정신이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로 발현되면서 도덕주의 외교를 추구하게 됩니다. 종교의 자유 등 미국식 민주주의 가치를 외교 원칙으로 관철해야 한다는 정서가 엘리트뿐 아니라 평범한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보편화된 겁니다(이는 윌슨 대통령이 “세계 민주주의를 위해 나서야 한다”며 미국 국민의 여론을 1차 대전 참전으로 이끄는 데 성공한 배경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키신저는 “미국 같은 이상주의 전통을 가진 나라는 세력균형을 자국 정책의 핵심 기반으로 삼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면서 “미국이 자국 이익에 대해 사용 가능한 정의를 내릴 수 있도록 현실에 대한 사려 깊은 평가를 이상주의와 결합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죠. 미국의 이상주의 전통을 상수(常數)로 보고, 여기로 경도됐을 때의 폐해를 막기 위해 자신이 주장한 현실주의 외교를 절충해야 한다고 본 겁니다.

키신저는 미국이 이상주의로만 기울었을 때의 폐해로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 처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가 독일, 체코 등 중부 유럽을 점령한 미군을 철수시킨 사례를 듭니다. 당시 처칠은 얄타 회담 이후 노골화된 스탈린의 팽창주의에 맞서려면 미군의 유럽 철수를 최대한 늦춰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루스벨트는 소련과의 갈등을 피하고 국민들의 철군 여론을 충족시키기 위해 철수를 단행합니다

▶시리즈 5회 참고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903/120996577/1

이에 대해 키신저는 루스벨트가 전후 승전국 간 경쟁 가능성을 대비하지 않은 건 세력균형의 복원을 피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세력균형을 혐오한 루스벨트가 전시 동맹국들이 함께 참여하는 ‘집단안보’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는 키신저가 보기에 나이브한 구상에 불과했습니다. 군주정 회귀라는 공동의 보수적 가치로 엮인 빈 체제와 달리 2차 대전 직후 승전국들은 사회주의,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 갈등을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팽창주의에 젖어있던 스탈린이 독일이라는 최대 위협이 제거되자, 연합국에 협조할 의사가 거의 없었던 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스탈린은 종전 직후 연합국 반대에도 동유럽 국가들을 잇달아 점령합니다) 키신저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기 전에 영국의 캐슬레이가 약소국의 자유에 대한 동맹국들의 약속을 받아냈던 것처럼, 스탈린이 연합국의 도움을 필요로 했을 때 전후 처리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어야 했다”고 본 이유입니다.

키신저 외교에 대한 다양한 비판들
1968년 베트남전쟁 당시 폐허가 된 사이공. 키신저식 현실주의 외교는 철저히 강대국 중심이라는 비판도 있다.   위키피디아
1968년 베트남전쟁 당시 폐허가 된 사이공. 키신저식 현실주의 외교는 철저히 강대국 중심이라는 비판도 있다. 위키피디아
미중 데탕트와 중동 셔틀외교 성공 등 키신저식 현실주의 외교의 성과가 컸지만 반대로 그 한계도 존재합니다. 특히 그가 강조한 세력균형이 강대국 중심의 시각에 치우쳐 약소국들의 이익을 무시했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실제로 키신저가 미중수교 통로였던 파키스탄의 무자비한 반란 진압(방글라데시 독립 반란)을 지원하고, 1969년 캄보디아 침공에 관여해 크메르루주 살인 정권이 들어서는 데 일조하는 등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위해 약소국들을 희생시켰다는 거죠.

키신저의 현실주의 외교가 전략적 이익에 집중한 나머지 비윤리적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예컨대 키신저가 1969년 닉슨 행정부에 참여하기 전부터 베트남전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미국의 대외 위신 때문에 3년 뒤에야 미군 철수 협상에 나서 희생을 키웠다는 비판이 대표적입니다(2년 전 미군의 아프간 철수가 미국 패권 약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 걸 떠올리면 이해하기가 쉬울 겁니다).

결국 1973년 파리 평화협정으로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완전히 손을 뗀 뒤 1975년 남베트남 패망에 이르기까지 약 2년의 간격을 확보해 최소한의 체면을 세울 수 있게 됐죠. 키신저는 국내외 비판에 직면하자, 파리 평화협정 덕에 받은 노벨평화상을 자진 반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1975년에는 러시아 작가로 소련 체제를 비판하며 망명한 솔제니친과 포드 대통령의 면담 당시 백악관에서 만나면 안 된다고 주장해 레이건 등 공화당 강경론자들의 비판을 샀습니다. 솔제니친이 소련 체제의 폭압에 용기 있게 저항한 자유주의의 상징이지만, 소련과의 데탕트 정책에 부정적 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철저한 국익 중심의 현실주의 외교는 키신저 자신의 태생적 뿌리를 외면하는 결과도 초래합니다. 소련 정부가 유대인의 해외 이민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미국이 소련과 정상 무역관계를 맺도록 규정한 1974년 ‘잭슨-바닉 법안’에 키신저가 반대한 겁니다. 본인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이었음에도 키신저는 “소련과의 데탕트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며 자유를 찾아 이주하기를 원하던 유대인들을 외면합니다.

키신저의 이 같은 외교 전략에 대해 같은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인 한스 모겐소조차 “도덕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며 비판에 가세했죠. 사실 모겐소는 미국 외교가 도덕주의에 너무 경도돼 성전(聖戰)을 벌이려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 장본인이었습니다(도덕외교의 한계를 지적한 키신저의 입장과 일치합니다).

키신저 전기를 쓴 저명 저널리스트 월터 아이작슨도 “키신저는 미국 민주주의 체제의 개방성에서 파생되는 힘이나, 미국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의 원천인 ‘도덕적 가치’에 대해서는 무신경했다”고 평가합니다.

그가 금과옥조로 여긴 세력균형에 대해서도 이견이 존재합니다. 학계 일각에선 과도한 세력균형의 집착이 적대적 동맹을 형성해 1차 대전을 일으켰다고 지적합니다. 이에 대해 키신저는 1차 대전을 초래한 건 오히려 세력균형의 포기였다고 반박합니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동맹관계를 조정한 빈 체제의 교훈을 1차 대전 당시 유럽 지도자들이 망각했다는 겁니다(키신저의 미중 데탕트와 한반도에 끼친 영향은 다음 회에 다룹니다)

[참고 문헌]
-Henry Kissinger 〈Diplomacy〉 (1994, Simon & Schuster)
-Thomas W. Lippman 〈Henry Kissinger who shaped world affairs under two presidents, dies at 100> (Washingtonpost, 11/ 29)
-헨리 키신저, 이현주 역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2016년, 민음사)
-마상윤 〈1970년대 초 한국외교와 국가이익: 모겐소의 국익론을 통한 평가〉 (2012년, 국제·지역연구 21권 2호)

“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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