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맛과 마음의 위안을 찾아… 울주 천주교 순례길 걸어볼까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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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 피해 정착한 곳 많아
천주교 성지 잇는 둘레길 3개
“경치 감상하며 여유 느껴보세요”

울산 울주군의 천주교 성지를 이은 ‘울주 천주교 순례길’ 2코스를 따라 무논과 들꽃의 경치를 즐기다 보면 나오는 순정 공소 앞길. 산 중턱 작은 마을에 좁은 돌담길이 정겹다. 울주=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울산 울주군의 천주교 성지를 이은 ‘울주 천주교 순례길’ 2코스를 따라 무논과 들꽃의 경치를 즐기다 보면 나오는 순정 공소 앞길. 산 중턱 작은 마을에 좁은 돌담길이 정겹다. 울주=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돌담 위에 핀 꽃들. 모퉁이를 도니 모내기가 한창인 논이 펼쳐졌다. 여기에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 새들의 지저귐은 덤. 한가로운 농촌 마을을 누비며 호젓한 산길을 걷는 맛이 그만이다. 나를 찾는 여행이 인기인 요즘, 24일 기자가 찾은 ‘울주 천주교 순례길’은 걷는 맛과 마음의 위안을 함께 느끼게 했다.

2019년 조성된 ‘울주 천주교 순례길’은 울산 울주군 내 천주교 성지를 잇는 3개의 둘레길이다. 울주군은 신유박해(1801년) 이후 사람들이 박해를 피해 정착한 곳이 많아 영남 천주교 신앙의 발원지로 불린다. 1코스는 이들이 형성한 마을을 중심으로 걷는 길로 인보성당∼하선필 공소(1893년)∼탑곡 공소(1839년)에 이르는 약 8km의 길. 2코스는 언양 시가지를 지나 가지산 산중에 자리 잡은 살티마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약 13km의 순례길이다. 3코스는 상북면 이천리(배내골)에서 국내 유일의 천연 석굴 공소인 죽림굴(상북면 간월산)까지 오르는 약 3.2km의 산길이다. 세 곳 모두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가지산, 간월산 등을 끼고 있어 경치가 그만이다. 공소(公所)는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며 사목하는 장소로, 우리나라 천주교회는 공소에서부터 시작됐다.

‘울주 천주교 순례길’ 중 2코스 출발점인 언양성당. 울주=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울주 천주교 순례길’ 중 2코스 출발점인 언양성당. 울주=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기자가 걸은 길은 가장 긴 2코스. 출발점인 언양성당(언양읍)은 1927년 건립됐으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성 범 라우렌시오 주교 등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다. 순례길 패스포트에 도장을 찍으니 성당 관계자가 “오늘은 더우니 꼭 물을 챙겨가라”라고 당부한다. 언양 시가지를 빠져나오자 물이 가득한 논, 산자락에 핀 들꽃 등 경치가 그만이다.

두 시간쯤 걸려 도착한 순정 공소는 나지막한 산 중턱에 자리한 작은 마을에 숨어 있었다. 한때 선교사들의 휴양지로 사용됐다고 알려졌는데, 흡사 제주도에 온 것처럼 좁은 길 사이로 이어진 돌담길이 무척이나 정겹다. 걸은 지 두 시간이 넘으니 왜 성당 관계자가 물을 챙기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가다 보면 중간에 편의점이 있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오산. 애타게 찾아도 끝내 편의점은 고사하고 구멍가게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2코스 마지막인 살티 공소는 가지산 중턱에 숨어 있다. 과거 이 지역은 나무와 수풀이 울창해 맹수들이 우글거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관헌들이 신도들을 잡으려고 해도 들어오지 못했는데, 살티(살 수 있는 터)란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총 6시간 넘게 걸어 도착하니 살 것 같다. 기자는 발목이 좋지 않은 데다 경치를 감상하며 여유 있게 쉬면서 걸었다.

보통 중간 지점인 순정 공소에서 싸 온 도시락을 먹는 것을 포함해 약 4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1코스는 2∼3시간, 3코스는 거리가 짧아도 산을 오르는 탓에 쉬엄쉬엄 가면 2∼3시간 정도가 보통이다.

막 물들기 시작한 노을을 보며 내려오는 길. 순례길이라 그럴까. 삶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일상에 치여 제쳐놨던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을 돌아볼 시간을 갖고 싶다면 종교를 떠나 한 번쯤 걸어볼 만하다.

울주=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울주#천주교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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