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녹색 茶대전, 누가 ‘천년의 차향’ 왕좌 차지할까[수토기행]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7일 11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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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향에 취해 덩실덩실 茶길을 걷다

지리산 남쪽 자락의 경남 하동이 차(茶) 축제로 야단법석이다. ‘2023 하동세계차엑스포’가 한달간(5월4일~6월3일) 열리는 가운데, 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인 최참판댁 일대에서는 ‘천년의 차, 천년의 문학’을 주제로 ‘2023토지문학제’(5~7일)가 개최된다. 차 문화와 인연 깊은 칠불사에서는 성불(成佛)한 가야 7왕자를 비롯해 김수로왕과 허왕후 가족을 묘사한 ‘칠불괘불탱화’ 점안식(5월7일 오후 1시)도 공개된다.

경남 하동군 화개면의 차밭.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하동 야생차밭은 2017년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의해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됐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1년에 단 한 번 열리는 차대전(茶大戰)

섬진강변 화개장터로 유명한 하동군의 지리산 자락은 지금 온통 초록빛깔로 덮여 있다. 화개동천의 깊은 골짜기, 경사진 산등성이를 따라 펼쳐지는 녹색의 야생차밭 때문이다. 뭉텅뭉텅 구름 모양으로 자란 야생 차나무가 목가적이면서도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경사진 산등성이, 거친 돌틈 사이에서 자라는 야생 차나무가 뭉게구름처럼 피어 올랐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하동은 ‘야생차의 본향(本鄕)’이라는 자부심으로 무장한 동네다. 우리 역사 기록도 차 문화가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린다. ‘삼국사기’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김대렴이 차나무 종자를 가져왔는데, 왕이 지리산에 이를 심게 하였다고 기록했다. 이로써 소수 특권층에서만 향유되던 차 문화가 널리 성행하게 됐다는 것이다.

‘삼국사기’가 전했던 하동군 화개면 일대 지리산자락의 차 문화는 이후 대물림으로 이어졌다. 대일항쟁기에 차 개량종이 전국으로 퍼져나갈 때도 ‘하동 차쟁이’들은 토종 야생차만 고집해왔다. 그렇게 잘 보존돼온 야생차는 2017년 유엔식량농업기구(FAO)로부터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4월 말 하동을 찾았을 때, 오랜 차 역사를 가진 고장답게 곳곳에서 진한 다향(茶香)을 느낄 수 있었다. 1년에 단 한 차례 치른 ‘차대전(茶大戰)’의 여운이기도 했다. 개인 야생차밭을 운영하고 있는 하동의 차쟁이들은 매년 곡우(4월20일) 이전에 따는 우전차를 시작으로 세작(細雀; 어린 찻잎으로 만든 차) 품평을 하며 한 해 차 농사를 승부짓는다. 품평회 참여자는 지리산 곳곳 전통 사찰의 스님들을 비롯해 전국에서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다인(茶人)들이다. 물론 공식적인 행사는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감지한 차의 향과 맛은 입소문을 타고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가기 때문에 차 판매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덖음 도사’로 유명한 다우제다의 이승관 대표.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흥미로운 건 하동 차쟁이들 사이에서 올해 햇차가 유달리 뛰어나다고 자평한다는 점이다. 다우제다(다우찻집)의 이승관 대표는 “33년 전 녹차에 매료돼 직장을 때려치우고 하동 화개동에 들어왔을 때 맛본 차맛을 올해 드디어 찾아냈다”며 감격했다. 이 대표는 차의 품질을 결정짓는 데 절대적인 기술인 ‘전통 덖음’의 달인으로 통한다. 350~400도의 가마솥에서 오직 면장갑을 낀 양 손만을 사용해 어린 잎을 덖어내는 방법인데, 자칫 가마솥에 손을 데기가 십상인 고난도 기술이다. 이렇게 손만 사용해서 적절한 시간을 맞추어 찻잎을 덖어내야만 차맛을 제대로 구현해낼 수 있다는 게 30여 년 전 스승으로부터 배운 이 대표의 지론이다.

“올해 우전차에서 야생차 본연의 참맛을 찾았다. 밤나무 냄새 비슷한 율향(栗香), 떡에서 나는 콩고물향, 어린아이의 배냇향 정도만 나와도 상급 차로 치는데, 올해 차에서는 그 윗단계인 청향(淸香)과 난향(蘭香)까지 나왔다.”

‘청향’은 몸과 마음이 맑아지면서 환희심이 생기고 양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차맛이다. ‘난향’ 역시 향이 있는 듯 없는 듯 차원이 다른 경지를 맛보게 하는데, 단전 밑에서 올라오는 기운이 가슴을 뻥 뚫고 머리 위로 뻗어가면서 마치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게 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난향과 청향은 신선급이 마시는 귀한 차로 대접받는다. 지리산자락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이 대표 역시 이런 차향이 지리산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지리산자락 모암마을과 정금마을 등 야생차마을에서는 개인이 운영하는 차농장과 다원 등을 구경할 수 있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차문화와 가야 불교의 산실
지금 하동에서는 지리산 차쟁이들이 우려낸 차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도 진행중이다. ‘2023 하동세계차엑스포’가 바로 그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연기됐다가 올해 열린 국내 최대 규모의 이 차엑스포는 하동스포츠파크와 하동야생차박물관, 하동 야생차마을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하동 차농사꾼들의 솜씨가 담긴 여러 종류의 야생차 제품은 물론, 차 관련 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담은 콘텐츠, 차 문화의 기원과 전승 과정, 차 관련 도구와 공예품 등을 한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한편으로 ‘자연의 향기, 건강한 미래, 차’라는 모토에 맞추어 다양한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하동 햇차를 왕에게 진상하는 ‘왕의 차 진상식’, 차를 활용한 음식인 ‘세계 티푸드 경연대회’, 오랜 차 역사와 문화를 가진 세계 5개국 명차를 마셔보는 ‘찻잔 들고 세계여행’, 야생 차밭에서 차와 함께 캠핑을 즐길 수 있는 ‘티 캠핑’, 다원과 야생차밭을 거닐어보는 ‘천년다향 힐링길’ 등이다.

이중 하동 지리산자락의 비경과 차향을 느낄 수 있는 힐링길 프로그램은 두 코스로 준비돼 있다. 한 코스는 하동 차시배지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쌍계초등학교∼목압마을∼조태연가∼모암마을∼만수제다 전통차밭∼관아다원 전통차밭으로 이어지는 4km 거리이고, 다른 한 코스는 차시배지에서 출발해 남쪽으로 혜림농원∼신촌마을차밭·도심다원∼유로제다∼정금차밭∼차유통센터까지로 이어지는 4km 거리다. 차밭을 걷다가 하동 명품 햇차를 직접 맛보고 싶으면 다원에 들러 다담(茶談, 티토크)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다. 다원 주인이 내주는 햇차를 마시며 차와 관련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다.

우리 차에 대해 더 관심이 당긴다면 야생차마을에서 산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간 곳에 자리한 칠불사를 찾아가볼 일이다. 칠불사는 가락국(금관가야) 시조 김수로왕이 이곳에서 동시 성불(成佛)한 7왕자를 기념하여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하동 차쟁이들은 일곱 왕자가 칠불사에서 수도를 할 때, 그 어머니인 허왕후가 지리산으로 찾아와 차를 공양했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수로왕비인 허씨가 인도에서 차 씨앗을 가져왔다는 얘기(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도 그 근거로 들이댄다.

5월7일 점안식이 거행되는 칠불사 칠불괘불탱화. 가운데 7부처가 가야 7왕자이고, 오른쪽 상단에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모습도 보인다.
굳이 허왕후와 7왕자의 차 얘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칠불사는 차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한국 차문화의 중흥조로 받들어지는 초의선사가 이곳 칠불사 아자방에서 참선하는 동안 다신전(茶神傳)을 초록했기 때문이다. 칠불사는 한국다도사에 있어서 중요한 현장이다.

마침 칠불사에서는 7일 오후 1시 ‘칠불괘불탱화’ 점안식이 열릴 예정이다. ‘일곱 부처님 나투시다’라는 이름의 칠불괘불탱화 점안식은 지리산 7불(가야 7왕자)이 역사상 처음으로 모셔지는 행사다. 3년여에 걸쳐 완성된 탱화에는 가야의 건국 스토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지리산 칠불’이 중앙에 묘사돼 있고, 작품 상단 오른쪽에는 가야 건국주인 김수로왕과 허왕후, 장유선사(허왕후의 오빠)가 있고, 왼쪽에는 가야 제2대 왕인 거등태자 및 허씨 성을 이어받은 2명의 왕자가 묘사돼 있다. 그러니까 수로왕과 허왕후 사이에 난 가족 그림인 셈이다.

칠불괘불탱화 조성 주역인 칠불사 주지 도응 스님은 “지리산에서 득도한 7부처를 기려 지어진 칠불사에서 처음으로 일곱 부처를 모시게 돼 마침내 절 이름값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스님은 또 “그동안 코로나19로 인해 점안식을 미루다가 마침 하동차엑스포가 열리는 때에 점안식을 하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가야 7왕자가 득도해 부처가 된 곳으로 전해지는 칠불사 운상선원. 스님들의 참선 수행처여서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지리산에서 만난 모녀 반달곰
하동엔 ‘박경리 문학관’과 박경리의 대표작 ‘토지’를 드라마로 제작할 때 지어진 ‘최참판댁’도 있다. 차와 문학이 함께 어우러지는 ‘2023토지문학제가 5일에서 7일까지 바로 이곳에서 열린다.

최참판댁은 소설에 등장하는 묘사를 따라 재현해낸 고택이라는 점이 이채롭다. 옛 양반가의 전형적인 가옥 구조를 보여주는 이곳은 한옥 고택 장면 촬영을 위해 방송국과 영화제작사가 자주 이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미스터 션샤인’, ‘구르미 그린 달빛’, ‘육룡이 나르샤’ 등 여러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최참판댁 바로 옆의 박경리문학관 앞에서는 동정호와 악양평야가 굽어다보인다. 소설 속의 그 모습이다. 위대한 작품이 마을의 구조까지 바꾸어놓았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소설 ‘토지’의 무대인 최참판댁.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박경리문학관에 세워진 작가 박경리 동상.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최참판댁에서 굽어다본 악양면 평사리 일대. 넓은 평사리 들판과 생태공원인 동정호가 보인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라면 지리산에 사는 반달곰을 만나볼 일이다. 지리산자락 의신마을에는 야생에서 적응하지 못한 반달곰을 마을주민들이 거두어 키우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의신 베어빌리지라는 생태학습장이다.

관람객들이 간식거리인 배(과일)를 던져주기를 기다리는 반달곰.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의신 베어빌지리의 모년 반달곰. 왼쪽이 엄마인 ‘산이’이고 오른쪽인 딸인 ‘강이’다. 엄마 곰이 딸 곰에게 먹을거리를 많이 양보한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엄마 반달곰인 ‘산이’와 그 딸인 ‘강이’가 살고 있다. 경사진 바위 지대에 지어진 통나무집, 동굴, 연못 등이 자연스럽게 배치돼 있는데, 관람객들은 마을 해설사와 함께 공중 통로에서 간식을 던져주며 반달곰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다. 하루 2회 40분씩 개방하고 예약자에 한해 한 회당 30명으로 제약한다. 이곳을 관리하는 마을주민 최다희씨는 “산에서 반달곰을 만나더라도 절대 먹을 것을 주거나 친근한 모습을 보여주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곰의 야생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의신마을에서는 캠핑과 숙박이 가능하다. 펜션과 민박형 숙소 등 다양한데, 차엑스포와 함께 묶어 여행하기에도 좋다.

안영배 기자·철학박사 ojong@donga.com
#하동#녹차#차향#칠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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