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 죽겠구나” 슈퍼맨도 겁났던 그날 기억 [따만사]

  • 동아닷컴
  • 입력 2023년 1월 19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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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운전자 구하고 사라진 대전 의인 이성호 씨
복덕방 하는 현실판 ‘동네 홍반장’

(대전소방본부 제공)
(대전소방본부 제공)
(대전소방본부 제공)
(대전소방본부 제공)

대전 안영동의 한 공원. 한적한 오후 별안간 ‘콰광!’하는 굉음이 울렸다. 산책을 나왔다가 깜짝 놀란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승용차가 공원 난간을 부수고 하천으로 떨어져 있었다.

물에 빠진 차는 바퀴가 계속 돌고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저만치 멀어져 갔다. 차는 엔진이 있는 앞쪽부터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 지난해 9월 22일 있었던 일이다.

하천은 수심이 2.5m 이상으로 깊고 흐르지 않는 물이라 아주 혼탁했다. 오염 물질이 둥둥 떠 있었다. 난간에는 위험을 알리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산책로에서 차까지의 거리는 약 30m. 웬만한 용기로는 선뜻 뛰어들기 힘든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차에서 빨리 나오라”고 소리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때 60대 남성이 달려와 거침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남성은 본인도 물을 먹어가면서 힘겹게 운전자를 물 밖으로 끌어낸 뒤 홀연히 사라졌다. 이 남자는 ‘대전 슈퍼맨’ 등으로 불렸다.
순간 튜브 놓쳐 ‘어푸’…“정신이 혼미”


수소문 끝에 지난 10일 대전 중구 산성동의 한 부동산에서 주인공을 만났다. 공인중개사인 이성호 씨(62)는 평범한 ‘동네 아저씨’였다. 기자가 찾아가자 이 씨는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찾아오셨냐”며 연신 민망해했다.

이 씨는 사건 당일 손님을 만나기 위해 안영동 뿌리 공원에 있었다. 오후 1시 45분경 공원 주차장 한쪽에서는 40대로 보이는 여성이 운전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 씨가 손님과 대화하고 있는 사이 굉음이 들려 돌아보니 사고가 벌어져 있었다.



이 씨는 우선 119에 신고부터 했다. 그는 전문적으로 수영을 배운 적이 없을뿐더러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해본 일은 더더욱 없었다. 어릴 적 시골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실력이 전부다. 하지만 한시가 급했다. 구조대가 도착하기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살려달라”는 여성의 비명이 들렸다. 차는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멀리서 구명튜브를 찾아와 던지고 무작정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정신없이 30m를 헤엄쳐 차에 다다랐다. 운전자는 간신히 차에서 빠져 나와 이 씨에게 매달렸다. 순간 이 씨가 튜브를 놓치면서 두 사람 모두 물속으로 잠겼다. 썩은 물이 코와 입으로 확 들어왔다.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TJB 방송화면 캡처)
(TJB 방송화면 캡처)

“이러다 죽겠구나” 덜컥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는 사력을 다해 떠내려간 튜브를 찾아 붙들었다. 여성은 머리까지 물에 잠겨있었다. 이 씨는 여성의 목덜미를 붙잡아 끌어올렸다. 그리고 튜브에 태워 바깥으로 안전하게 구조해내는 데 성공했다.

물 밖으로 나왔을 때 이 씨는 기진맥진해 있었다. 119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여성의 안정을 돕는 사이 이 씨는 조용히 짐을 챙겨 자리를 벗어났다. 이때 누군가 달려와 “이름과 연락처를 좀 알려달라”고 물었다. 이 씨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며 홀연히 현장을 떠났다.
가족도 뉴스 보고 알아…뒤늦게 이실직고
이 씨는 아내와 자식들이 걱정할까 봐 가족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 길로 집에 온 이 씨는 옷을 갈아입은 후 다시 일터로 향했다.

그날 퇴근 후 30대 딸이 캐물었다 “아빠 젖은 옷을 벗어 놨던데, 무슨 일이야? 어디서 수영하고 왔어?”라며 의아해했다. 이 씨는 “응 별거 아냐”라며 얼버무렸다.

가족과 저녁을 먹고 있는데 딸이 뉴스를 보고 깜짝 놀라며 “저 사람 아빠 아냐?”라고 소리쳤다. 그제야 이 씨는 가족에게 이실직고했다. 딸은 “아빠는 또!”라고 한마디 했고, 아내는 “당신 먼저 죽으면 우리는 어쩌라고 그러냐”며 걱정했다.

이 씨는 오염된 물 탓인지 피부가 가려워 연고를 발라야 했다. 그는 가족의 염려를 알지만 “어떻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있냐”고 말한다.

어릴 때부터 이 씨는 그런 성격이었다. 그의 왼손 검지 손가락에는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무슨 흉터인지 묻자 초등학교 2학년 때 기억을 떠올렸다. 충북 보은의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이 씨는 어려움에 처한 친구들을 모른 척하지 못했다.

당시 나무 마루로 된 교실 바닥과 복도는 ‘초칠’이 정기적으로 필요했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집에서 초를 한 자루씩 가져오게 해 초칠을 시켰다. 초를 준비해오지 못한 학생은 꾸중을 들었다. 가난했던 그땐 준비물을 구해오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런 친구들을 위해 자기 초를 토막 내 나눠 주다가 입은 상처였다. 경찰관이 꿈이었던 이 씨는 청소년 시절 유도를 배웠고,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들이 이 씨에게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고.

또 대학교 1학년이던 1981년 겨울, 완행버스를 타고 가던 중에 버스정류장 근처 눈밭에 누군가 쓰러져 있는 것을 목격했다. 버스에 탄 승객들이 모두 바라보고만 있을 때 이 씨가 홀로 성큼 내렸다.

버스는 떠났고 이 씨는 어머니 연배의 여성을 흔들어 깨웠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여성이 버스를 타려고 나왔다가 정류장 앞에서 쓰러지고 만 것이다. 다행히 곧 의식을 차렸다. 이 씨는 체중이 많이 나갔던 그 여성을 1km가량 떨어진 집까지 데려다주느라 1시간 이상을 걸어야 했다.
복덕방 하는 ‘홍반장’…“난 사소한 도움 줄 뿐”
이 씨에게 기억나는 선행을 묻자 “내가 하는 일은 대단한 게 하나도 없다. 일부러 봉사활동을 다니거나 기부활동을 한 게 없다. 그냥 살면서 주변 이웃들이 겪는 사소한 문제를 발견하면 가서 도와줄 뿐”이라고 답했다.

인근 주민들은 이 씨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 점심을 먹기 위해 부동산 근처의 오래된 식당에 들러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이 씨는 ‘홍반장’이었다. 영화 ‘홍반장’(2004)에서 주인공 홍두식은 동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어디든 달려가 해결해 주는 ‘만능 재주꾼’이다.

식당 일을 돕고 있던 80대 할머니는 양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그 양반에게 고마운 건 말로 다 못 한다”고 했다. 혼자 사는 이 할머니는 현재 식당 일을 돕고 있지만, 주변에서 모은 깡통이나 빈 병을 팔아 용돈벌이도 한다고.

이성호 씨의 선행을 설명하며 눈시울을 붉히는 이웃 주민
이성호 씨의 선행을 설명하며 눈시울을 붉히는 이웃 주민

할머니는 “그 양반이 재활용품까지 다 챙겨 모았다가 우리 집 앞에다 갖다 놔주곤 한다. 한번은 배에 수술을 받은 몸으로 시골에서 쌀을 짊어지고 우리 집까지 왔더라. 그걸 받고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라며 눈물을 훔쳤다.

이 씨는 동네 하수구, 옥상 누수, 수도 교체, 보일러 수리, 은행 동행 업무 등 별걸 다 한다고 했다. 공병 출신인 이 씨는 웬만한 건 손수 고치는 재주가 있다. 부동산 중개라는 직업상 동네 구석구석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측면도 있다.

정부 지원 제도를 모르는 어르신을 발견하면 도움을 받도록 해준다. 주민센터에서 월세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내던 독거노인에게 한 달 17만 원 정도의 월세 부담을 덜게 해준 적도 있다.

이성호 씨가 부동산 인근에 홀로 사는 어르신 집을 찾아가 안부를 확인하고 있다.
이성호 씨가 부동산 인근에 홀로 사는 어르신 집을 찾아가 안부를 확인하고 있다.

인근 빌라에 사는 93세 할아버지는 주차장 구조물 때문에 전동 휠체어를 처마로 들여놓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도움을 청할 곳은 이 씨였다. 할아버지는 “그 양반에게 부탁했더니 와서 고쳐 주다가 손에 피를 흘렸다”고 설명했다.

심지어 어르신들 ‘담배 심부름’까지 해준다고. 이날 취재 중에 이 씨를 만난 한 어르신은 “담배 좀 많이 사다 줘”라고 농담을 건넸고, 이 씨는 “오래 사셔야 하니까 많이는 안 돼요. 딱 한 갑만 사드릴게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무슨 농담인지 묻자 이 씨는 “겨울에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은 마트 가는 것조차 힘들다. 그럴 땐 담배 같은 것도 사다 드린다”고 설명했다.

부동산 맞은편 길 건너에도 이 씨의 손길이 남아있었다. 건물 입구 대리석이 파손돼 주민이 다칠 것 같다고 생각한 이 씨는 직접 시멘트와 재료를 사다가 보수했다.


이 씨는 “전문적인 것은 나도 못 한다. 내가 하는 것들은 조금만 손 보면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다. 사소한 것이지만 혼자 사는 어르신들은 스스로 할 수가 없다. 전문업체를 부르면 또 비용이 10여만 원 나간다. 그런 것은 내가 철물점에서 1만 원 남짓 하는 재료 사다가 교체해서 드리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할머니는 “거기는 복덕방이유~복덕방”이라고 했다. 할머니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공인중개사무소의 옛 명칭인 복덕방(福德房). 복과 덕을 준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이날도 인터뷰를 시작하는데 어르신 한 분이 불쑥 들어왔다. 이 씨가 “별일 없으시죠?”라고 안부를 묻자 어르신은 “커피 한 잔만”이라며 본인 집인 듯 자연스럽게 앉았다. 이 씨는 인터뷰를 잠시 멈추고 기다려줬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어르신이 커피를 챙겨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어떤 손님인지 묻자 이 씨는 “늘 출근하시는 형님”이라고 답했다.

구조받은 여성 연락은 못 받아…“사정 있을 듯, 이해”
이 씨는 지난해 11월 9일 ‘소방의 날’에 대전시장 표창을 받았다. 사건 이틀 후 대전소방본부가 신고 때 남은 전화번호로 이 씨에게 연락을 취해 신원을 파악했다. LG의인상과 한국공인중개사협회 표창도 받았다.

구조받은 여성과 연락을 주고받는지 묻자 이 씨는 “그 뒤로 연락은 없었다. 아마도 사정이 있지 않을까 한다. 이해한다”며 “대신 다른 분들이 선물을 들고 찾아오실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씨는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친다. “꼭 착한 일을 억지로 하려고 할 필요 없다. 그저 살면서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고 눈에 보이는 일부터 실천하라”고 한다.

이 씨는 “나도 어릴 때 그런 선생님이 계셨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시골 마을에 오셔서 집집마다 어려운 학생에게 도움을 많이 주신 선생님이셨다. 그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면서 “새해에는 모두가 그런 마음을 갖고 사는 해가 됐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밝혔다.

■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따만사)은 기부와 봉사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위기에 빠진 타인을 도운 의인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등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숨겨진 ‘따만사’가 있으면 메일(ddamansa@donga.com) 주세요.

박태근 동아닷컴 기자 pt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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