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길목 8곳 콕 집어 단속… 피해건수-금액 확 줄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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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보이스피싱 ‘예방적 수사’ 효과
대포통장-환전 등 8개 집중단속… 올해 10월까지 피해액 4743억
작년 전체 7744억보다 크게 줄어… 070→010 발신번호 바꿔주는 기기
개집에 숨기고 사람이 들고 움직여… 경찰, 탐지장비 들고 숨바꼭질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범죄가 날로 진화하면서 연간 피해액이 7000억 원을 넘긴 가운데 경찰의 ‘8대 범행수단’ 단속이 최근 효과를 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건당 피해액은 늘고 있어 이에 맞는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보이스피싱 길목을 막아라”

“개가 개집에도 안 들어가고 멀뚱멀뚱 밖에 서 있더라고요.”

최근 한 야산에서 보이스피싱에 악용되는 번호변작 중계기(중계기)를 적발한 경찰관의 말이다. 당시 중계기 관련 신호가 잡히는 지점엔 개집과 개 한 마리만 있었다고 한다. 경찰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개집 안을 들여다보니 중계기가 숨겨져 있었다. 개는 중계기 탓에 집에도 못 들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경찰 조사결과 보이스피싱 일당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인적이 드문 야산에 개와 개집을 가져다 놓은 뒤 출입구 방향을 산 쪽으로 돌려 중계기 설치를 감췄던 것으로 드러났다. 전력을 끌어 오기 어려웠던 탓에 밤마다 중계기를 떼서 충전한 뒤 낮에 재설치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나 중계기 신호를 추적한 경찰에 마침내 덜미를 잡혔다.

경찰이 중계기 등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범죄에 악용되는 범행수단을 적극 단속하면서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와 피해액이 다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 ‘8대 범행수단’ 단속으로 피해 줄어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따르면 올 1∼10월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액은 4743억 원으로 집계됐다. 연간 피해액은 지난해(7744억 원)나 2020년(7000억 원)에 비해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9월 한 달 피해액(316억 원)은 2018년 6월(286억 원) 이후 4년 3개월 만에 가장 적었다.

발생 건수 역시 2018년(3만4132건)부터 지난해(3만982건)까지 계속 3만 건을 넘었지만 올해는 1∼10월 동안 1만8783건에 그쳤다.

경찰은 보이스피싱 범행의 첫 단계인 미끼 문자 전송부터 마지막 단계인 현금 전달까지 ‘8대 범행수단’을 집중 단속한 것이 효과를 낸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이 집중하는 8대 범행수단은 △대포통장 △대포폰 △중계기 △불법 환전 △악성 애플리케이션(앱) △개인정보 불법유통 △미끼문자 발송 △거짓 구인광고다. 보이스피싱 범죄 수법 분석에 참여했던 한 경찰관은 “범죄 수법이 비교적 단순했던 과거와 달리 최근 보이스피싱 범죄는 각종 범행수단의 공급 전담 인력이 따로 있을 정도로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 중계기 등 단속이 효과 내
경찰이 전국 곳곳에서 적발한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의 ‘번호변작 중계기’ 설치 장소. 중계기는 ‘070’으로 시작하는 인터넷 전화 번호를 ‘010’으로 바꿔 피해자들이 의심하지 않고 전화를 받도록 한다. 과거에는 원룸 등에 설치했지만 최근에는 단속을 피하기 위해 야산에 개집을 가져다 놓고 안에 설치하거나(왼쪽 사진). 환기구 안에 두는가 하면(가운데 사진), 차량에 싣고 다니는 경우(오른쪽 사진)도 있다.
경찰이 전국 곳곳에서 적발한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의 ‘번호변작 중계기’ 설치 장소. 중계기는 ‘070’으로 시작하는 인터넷 전화 번호를 ‘010’으로 바꿔 피해자들이 의심하지 않고 전화를 받도록 한다. 과거에는 원룸 등에 설치했지만 최근에는 단속을 피하기 위해 야산에 개집을 가져다 놓고 안에 설치하거나(왼쪽 사진). 환기구 안에 두는가 하면(가운데 사진), 차량에 싣고 다니는 경우(오른쪽 사진)도 있다.
경찰은 특히 중계기 단속이 범죄 감소에 적잖은 효과를 냈다고 보고 있다. 중계기는 ‘070’으로 시작하는 인터넷 전화 발신 번호를 ‘010’으로 시작하게 만들어 주는 장비다. 070으로 시작하는 번호는 스팸 전화로 의심해 잘 받지 않지만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는 일단 받는 이들이 많다는 점을 노린 수법이다.

수사관들은 번호 변작 및 중계 기술 자체는 오래된 범행 수단이지만 기기와 은닉 방식이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과거에 주로 사용됐던 중계기는 불법 개통한 유심칩 등을 여러 개 꽂는 ‘심박스’ 형태였으나 최근엔 휴대가 편한 스마트폰 등이 중계기로 악용되고 있다.

은닉 장소도 과거에는 원룸이나 모텔 등 폐쇄된 실내 공간이 주를 이뤘지만 최근엔 야산이나 공사장 외벽, 다리 밑, 모래사장 등 행인이 뜸한 야외가 많이 활용되고 있다. 세탁기나 보일러, 환기구 등에 숨겼다가 적발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장소에 고정 설치한 중계기가 경찰에 적발되는 경우가 늘자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중계기를 가지고 계속 이동하면서 추적을 피하기도 한다. 속칭 ‘인간 중계기’다. 경찰 관계자는 “오토바이, 차량에 중계기를 싣고 다니거나 가방에 중계기를 넣고 지하철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인간 중계기’도 추적이 가능하다. 경찰은 통신사로부터 중계기 의심 신호 정보를 넘겨받으면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수사관에게 출동을 지시한다. 경찰은 신호 이동 패턴을 분석해 차량, 지하철 등 이동수단을 찾아낸 뒤 탐지 장비를 들고 근접거리에 있는 중계기 신호를 찾는다. 경찰은 올 4∼6월 보이스피싱 특별단속을 통해 중계기 불법 사용 168건을 적발해 197명을 붙잡았다고 밝혔다.

보이스피싱에 쓰이는 대포폰은 특히 ‘선불 대포폰’을 줄이면서 성과를 냈다. 올해 상반기(1∼6월) 경찰에 적발된 선불 대포폰은 2699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2만1616건) 대비 87.5% 감소했다. 경찰 관계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이동통신사 등과 함께 선불폰 개통 절차를 까다롭게 만든 것이 효과를 냈다”고 했다.

이 밖에도 경찰은 올 4∼6월 대포통장 범죄 1689건을 적발해 1838명을 붙잡았고, 범죄 수익 환전 등에 가담한 불법 환전상 53명을 검거해 5명을 구속했다. 개인정보를 유출하고 판매한 17명과 대출 미끼문자를 발송한 19명도 체포했다. 경찰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범행수단은 다른 범죄에도 이용되는 경우가 많아 대포통장 등을 단속하면 전반적인 범죄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 건당 피해액은 오히려 증가

피해 건수 감소와는 대조적으로 건당 평균 피해액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8년 1180만 원이던 건당 피해액은 2020년 2210만 원, 올 1∼10월 2525만 원으로 늘었다. 경찰 단속이 강화되면서 범죄 수행에 필요한 ‘비용’이 늘자 범인들이 최대한 돈을 많이 뜯어낼 수 있는 피해자를 골라 노리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5년째 보이스피싱 수사를 담당하고 있는 일선 경찰관은 “3년 전까지만 해도 대포통장 가격이 200만∼300만 원이었는데, 단속이 심해지자 요즘은 500만 원 이상에 거래된 사례도 적발됐다”며 “비용이 늘어나니 범인들이 한 번에 큰돈을 노리고 사기를 치는 경향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범행 수법이 지능화된 것도 건당 피해액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8대 범행 수단 중 특히 ‘악성 앱’이 고액 피해를 낳는 경우가 많다.

악성 앱은 카카오톡 등 메신저, 문자메시지를 통해 URL 링크나 압축파일 형태로 피해자에게 전달된다. 이를 무심코 설치하는 순간 피해자의 휴대전화는 관리 권한이 통째로 범죄조직에 넘어가게 된다. 피해자가 거는 전화는 보이스피싱 일당이 모두 가로채 받을 수 있고, 일당이 거는 전화는 금융감독원, 은행 등 기관 전화번호로 표시된다. 앱을 통해 피해자의 주식이나 가상화폐 계좌 등에 접속해 돈을 빼돌리기도 한다. 경찰 관계자는 “악성 앱을 설치하는 순간 휴대전화는 ‘좀비 폰’이 된다”며 “모르는 사람이 보내는 링크, 파일은 절대로 열어선 안 된다”고 했다.

경찰에 따르면 5억 원 이상 피해가 발생한 경우 거의 전부가 피해자 휴대전화에 악성 앱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단일 보이스피싱 사건 기준으로 최대 피해액인 41억 원을 뜯긴 올 7월 사건에서도 피해자 휴대전화에 악성 앱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경찰이 앱 판매자나 제작자를 검거한 사례는 아직 없다. 경찰 관계자는 “앱이 해외에서 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보니 수사에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 ‘나도 모르게’ 수거책 가담해도 처벌
보이스피싱 조직은 수거·송금책을 모집하기 위해 구인·구직 사이트에 ‘고액 알바 모집’ 등의 유인 광고를 올리는 경우가 많다. 경찰은 주로 사이트 운영진에게 모니터링을 통해 범죄와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는 광고를 걸러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광고만으로는 처벌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거짓 광고를 처벌하려면 실제 광고를 통해 채용된 사람이 보이스피싱 등에 가담했는지를 입증해야 한다.

보이스피싱 수거·송금책 중에는 ‘부동산 매매 관련 업무다’ ‘배달만 하면 된다’는 등의 말에 속아 자신이 하는 일이 범죄인지 모르고 가담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경찰에 따르면 검거된 후 ‘정상적인 일인 줄 알았다’고 주장해도 처벌을 피하긴 쉽지 않다. 한 보이스피싱 사건 전문 변호사는 “‘좋은 조건으로 대출을 해 주겠다’면서 수거·송금책 일을 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처음에는 속았다고 해도 불법이 의심된다면 즉시 자수하고 신고해야 선처를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또 계좌만 빌려준 경우에도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대검찰청은 18일 “최근 대법원은 탈법적인 일에 이용될 수 있도록 계좌만 제공한 경우에 대해서도 유죄를 선고했다”며 “계좌 소유자가 보이스피싱 범죄임을 몰랐다고 해도 형사처벌될 수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차명계좌를 빌려줘선 안 된다”고 밝혔다.

보이스피싱 징후땐 경찰 출동 앱 내년 나와… 범죄조직 추적 시스템도 추진


보이스피싱 범죄 지능화에… 경찰 단속기술도 진화


나날이 지능화되는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범죄에 대처하기 위해 경찰은 단속 관련 기술 개발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보이스피싱 위험 징후가 감지되면 인근 경찰이 바로 출동하는 연동 애플리케이션, 통화 내역을 분석해 범죄조직을 추적하는 수사 시스템 등도 개발 중이다.

18일 경찰청 등에 따르면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는 시민 보급용으로 올 9월 내놓은 악성 애플리케이션(앱) 탐지 앱 ‘시티즌 코난’에 이어 이와 연동된 경찰관용 앱 ‘폴리스 코난’을 내년에 내놓을 예정이다. 시티즌 코난은 보이스피싱 범죄자들이 설치를 유도하는 악성 앱과 파일을 탐지해 삭제하는 일종의 ‘백신’ 기능을 갖추고 있다. 지역별 보이스피싱 관련 신고가 급증하면 화면에 경고 메시지를 띄우는 기능도 있다.

향후 폴리스 코난이 개발되면 시티즌 코난에 ‘신고’ 기능이 추가된다. 시민들이 시티즌 코난을 통해 보이스피싱 범행 현장이나 의심 사례를 신고하면 폴리스 코난을 사용 중인 경찰에게 위치가 즉각 표시되는 방식이다. 앱에는 현금자동인출기, 공중전화박스 등 보이스피싱 빈발 장소의 정확한 위치 정보도 담기게 된다. 근처 경찰이 신속히 현장에 도착해 범행을 막고 피의자를 검거하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아울러 휴대전화에 악성 앱 설치 또는 작동이 탐지되면 해당 정보를 경찰에게 신속하게 공유하는 기능도 추가된다. 이르면 내년 초 시험 사용 기간을 거쳐 일선 부서 경찰관들에게 보급할 방침이다.

경찰은 또 보이스피싱 범인 및 조직의 연락처와 통화기록을 분석해 조직 윗선의 정보를 추적하는 프로그램도 개발 중이다. 경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보이스피싱 조직원과 콜센터 상담원 등의 통화, 문자메시지 수신 및 발신 내역을 자동으로 분석해 통화 빈도, 통화 시간 등 기준에 따라 분류한 뒤 조직 간부 등을 추적한다는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피의자의 통화 내역 등을 수사해도 한두 단계 윗선이나 연락이 잦은 동료 1, 2명을 추가 추적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며 “새 프로그램을 통해 범죄 총책이나 거대 조직 간 연계를 밝혀내는 게 목표”라고 했다. 이 프로그램 역시 내년 시범 사용에 들어간다.

경찰청은 금융사기 및 사이버 사기 범죄 신고만 통합적으로 관리, 분석하는 영국의 ‘사기정보분석국(NFIB)’ 모델을 벤치마킹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NFIB는 범행에 쓰인 것으로 의심되는 계좌번호와 전화번호 등의 사용을 선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전혜진 기자 sunrise@donga.com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보이스피싱#피해건수#예방적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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