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숨쉴 수가 없다”… 플로이드 사망 2년, 거리 나선 美 흑인들[글로벌 현장을 가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6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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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의 도화선이 된 조지 플로이드 사망 2주기인 지난달 25일 뉴욕 유니언스퀘어 광장에서 추모 
집회가 열렸다(왼쪽 사진). 이날 뉴욕 브루클린 남부 커나시 거리의 대형 플로이드 벽화 앞을 행인들이 무덤덤하게 지나고 있다. 
뉴욕=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미국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의 도화선이 된 조지 플로이드 사망 2주기인 지난달 25일 뉴욕 유니언스퀘어 광장에서 추모 집회가 열렸다(왼쪽 사진). 이날 뉴욕 브루클린 남부 커나시 거리의 대형 플로이드 벽화 앞을 행인들이 무덤덤하게 지나고 있다. 뉴욕=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유재동 뉴욕 특파원
유재동 뉴욕 특파원
《“조지 플로이드! 조지 플로이드!” “정의를 원한다. 지금 당장.”
지난달 25일(현지 시간) 저녁 미국 뉴욕 맨해튼 유니언스퀘어 광장에는 피켓과 확성기, 드럼 같은 시위 도구를 든 시민 수십 명이 모여들었다. 시위대엔 흑인이 많았지만 백인과 아시아계도 눈에 띄었다. 2년 전 백인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숨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를 추모하고 경찰 개혁을 촉구하는 집회다. 일부 흑인 참가자는 ‘날 쏘지 마세요. 나는 흑인이에요’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나왔다.》



현장에서 만난 중년 남성 마커스 곤살베스는 자신을 유럽계 피가 절반 섞인 흑인이라고 소개하면서 “나는 절반만 흑인이지만 내 아이들은 나보다 피부색이 더 검다. 내 아들이 더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 경찰들은 항상 젊은 흑인들만 때려잡는다”며 “얼마 전에도 경찰이 (과잉 단속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내 아들을 다치게 할 뻔했다. 우리 아들은 어릴 때부터 경찰한테 당했다”고 했다.

이날 시위를 주도한 흑인 남성 테럴 하퍼도 “2년 전 경찰이 플로이드를 죽였을 때와 비교해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며 “경찰의 잔인함 때문에 아직도 많은 흑인이 죽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단상에서 차례로 발언을 이어간 시위 참여자들은 플로이드의 동생 테런스 플로이드를 현장에서 화상통화로 연결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시위대 규모는 예상보다 크지 않았다. 취재진이나 구경꾼들을 제외하면 순수 시위대는 많아야 40∼50명에 불과해 보였다. 1주기이던 지난해 5월과 비교해 관심이 크게 시들해졌다. 당시 뉴욕에서는 이곳보다 훨씬 넓은 광장에서 더 많은 시민이 집회를 열었고 도심 행진도 이어졌다. 뉴욕만의 풍경은 아니다. 미국에서 한때 들불처럼 번진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BLM)’ 운동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2년 만에 위기에 봉착했다.

어느새 뇌리서 멀어진 BLM

BLM 운동은 2020년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 데릭 쇼빈이 조지 플로이드(당시 46세)를 과잉 진압해 숨지게 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쇼빈은 담배가게에서 위조지폐를 사용한 혐의로 플로이드를 체포하면서 그의 목을 무릎으로 9분 29초 동안 짓눌렀다. 플로이드는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호소하고 “어머니”를 외치기도 했지만 쇼빈은 계속 목을 눌렀다. 의식을 잃은 플로이드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졌다.

이 과정을 10대 흑인 소녀가 휴대전화 영상으로 고스란히 담았다. 이 영상은 온라인에 퍼졌고 미 전역에서 이에 항의하는 시위와 폭동이 이어졌다. 주요 도시 거리와 건물 벽에는 ‘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와 플로이드의 모습이 일제히 그려졌고, 흑인 싱어송라이터는 플로이드가 외친 ‘숨쉴 수 없다(I Can‘t Breathe)’라는 곡을 불러 그래미상을 받기도 했다.

거대한 사회 현상으로 자리 잡았던 BLM은 이제 사람들 뇌리에서 빠르게 잊혀지는 처지가 됐다. 플로이드 사망 2주기 당일인 지난달 25일 오후 뉴욕 브루클린 남부 커나시에 그려진 대형 플로이드 벽화 앞을 행인들은 별 관심도 보이지 않고 지나가기에만 바빴다. 잠시 멈춰 서서 벽화를 바라보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도 없었다. 같은 시간 맨해튼 5번가 트럼프타워 앞 도로에 그려진 ‘BLM’ 마크 역시 상당 부분 페인트칠이 벗겨진 채 방치돼 있었다. 브루클린 풀턴가에 적힌 거대한 BLM 구호는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시 이 도로를 보행자를 위해 영구 개방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얼마 되지 않아 차량으로 채워졌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이 밖에도 캘리포니아 팰로앨토, 캔자스시티, 샬럿 같은 주요 도시에 ‘새겨진’ BLM 구호는 지금 모두 없어져 버렸다.

BLM 뉴욕지부 공동창립자 호크 뉴섬은 CBS 방송에 “플로이드 사망 1년 뒤 정치인들은 우리를 잊었다”며 “사람들도 거리에 범죄가 증가하자 다시 경찰에 우호적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25일 유니언스퀘어에서 만난 백인 여성 벳시도 “2년 전만 해도 많이 기대했고 여론의 관심도 높았지만 지금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경찰은 흑인에게 여전히 잔인”

미국에서 만난 흑인들은 BLM 운동이 이렇게 허탈하게 끝나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흑인에 대한 경찰의 차별 대우와 과잉 진압이 여전하다는 이유에서다.

최근 미네소타 주정부 인권국 보고서에 따르면 2년 전 사건이 발생한 미니애폴리스에서는 경찰이 여전히 유색인종에게 공권력을 과도하게 행사하고 있으며 당국은 해당 경찰관에게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플로이드 사건 당시 당국은 경찰권 행사를 더 강력히 통제하는 등 개혁 의지를 밝혔지만 지금까지 바뀐 점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경찰이 진압 과정에서 용의자나 관계자를 숨지게 하는 행위는 오히려 더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워싱턴포스트(WP) 집계 결과 미국 경찰은 지난해 총기 등을 사용해 시민 1055명을 숨지게 했다. 이는 플로이드 사건이 터진 2020년의 1021명보다 늘어난 수치다. 흑인이 백인보다 경찰 손에 죽을 확률이 2.9배나 높았고 경찰 살인의 1%만이 기소로 이어졌다는 비영리단체 연구 결과도 있다.

흑인의 불안감도 여전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달 WP와 여론조사기관 입소스 설문조사에서 흑인 4명 중 3명(75%)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물리적 공격을 당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플로이드 사건 이후 (흑인에 대한) 경찰의 대우가 나아졌느냐는 질문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가 41%로 가장 많았고 ‘많이 좋아졌다’는 응답은 약 20%에 그쳤다. 지난달 14일에는 뉴욕주 버펄로 흑인 주거 지역 슈퍼마켓에 들어간 백인 우월주의자 청년이 총기를 난사해 10명이 살해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흑인 인권 변호사 벤 크럼프는 트위터에 “2년이 지났지만 흑인은 ‘아직 숨을 쉴 수가 없다’. 우리는 싸움을 멈출 수 없고 우리 목소리를 계속해서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날 일을 기억해야 한다”


BLM 운동이 힘을 잃고 표류하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로 전문가들은 ‘경찰 예산 삭감’이라는 과격한 구호를 든다. 가뜩이나 범죄가 많은 미국에서 경찰력을 줄이게 되면 치안이 더 불안해질 것이라고 시민들이 더 우려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BLM은 같은 사회적 소수자인 아시아계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한 면이 있다.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범죄에 시달리는 이들은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줄 경찰의 힘을 빼자는 흑인들 주장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BLM 운동이 미국 역사에서 소수자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의미 있는 저항으로 기억돼야 한다는 주장은 여전히 힘을 얻고 있다. 지난달 25일 플로이드가 사망했던 미니애폴리스 현장에서는 ‘조지 플로이드 광장’ 명명식이 열렸다. 현장을 찾은 시민 라리사는 WP에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앞으로 꼭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뉴욕 시민운동가이자 교수인 프랭크 리언 로버츠는 NYT에 “이 운동은 시들해지는 것이 아니다”며 “언젠가 경찰의 또 다른 악랄한 폭력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사람들 가슴에 불을 지펴 똑같은 얘기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재동 뉴욕 특파원 jarrett@donga.com


#조지 플로이드#흑인#시위#b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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