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 버린 조선 문장가, 억만년 이어갈 나라 꿈꾸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0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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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주의 ‘숙수념’ 첫 완역본
‘누가 이 생각을 이루어…’ 발간

배산임수의 풍수명당에 자리 잡은 이상향 ‘숙수념’을 묘사한 삽화. 저택을 중심으로 절벽과 폭포, 민가 등이 조화롭게 배치돼 있다. 태학사 제공
배산임수의 풍수명당에 자리 잡은 이상향 ‘숙수념’을 묘사한 삽화. 저택을 중심으로 절벽과 폭포, 민가 등이 조화롭게 배치돼 있다. 태학사 제공
금 간 방 안 벽에 손가락 하나 끼워 넣기 힘든 작은 틈이 있다. 틈새로 손가락을 들이밀자 갑자기 몸 전체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정신을 차려보니 넓은 들판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한 시간여를 걸었을까, 앞에 큰 시냇가가 나타난다. 작은 거룻배에 올라타 사공이 이끄는 데로 가자 대저택이 나온다. 저택 뒤로는 깎아지른 절벽과 폭포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앞에 늘어선 1000여 호의 민가 사이로 강이 흐른다. 저택 서쪽에 호수와 누각이 있고 동쪽에는 시냇물을 따라 꽃과 버들이 심어져 있다. 풍수명당에 자리 잡은 별세계다.

조선 후기 문장가 홍길주(1786∼1841)가 1829년에 쓴 ‘숙수념(孰遂念)’의 한 장면이다. 박무영 연세대 국문과 교수는 신간 ‘누가 이 생각을 이루어주랴’(태학사)에서 중국 사마천과 겨룰 만하다는 당대 평가를 받은 홍길주의 숙수념을 한글로 처음 완역했다.

홍길주는 명문가 풍산 홍씨 후손으로 22세에 과거에 합격했다. 하지만 순조 때 외척으로 득세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회의를 느껴 벼슬을 버렸다. 그는 숙수념에서 자신이 꿈꾼 이상적 마을 공동체를 그렸다. 시장이 돼 가상의 도시를 짓는 ‘심시티’ 게임의 조선판인 셈이다. 그는 자신의 호를 딴 주인공 ‘항해자’를 저택 주인으로 등장시켜 자신의 이상향을 설명하고 있다.

홍길주는 이상향을 세세하게 설계했다. 저택 안 사당을 시작으로 안채와 바깥채, 서재를 차례로 묘사한다. 건물을 지은 내력을 적은 상량문(上樑文)에 ‘성인이 나라를 다스릴 땐 집안 다스림부터 시작하셨고, 군자가 집을 지을 때는 반드시 내외분별을 먼저 하네’라는 문구를 넣었다. 집안이 바로 서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통해 외척세력이 국정을 좌우하는 현실을 은유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저택 밖에는 주민을 위한 병원과 구휼소가 있다. 병원 건물기(建物記)에는 의사를 많이 뽑고 질병을 연구하는 환경을 만들어 모든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고 돼 있다. 이어 “이런 방법으로 천하와 국가를 운영한다면 어찌 억만 년만 지속되겠는가”라고 써 병든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조정을 비판한다.

홍길주는 자신의 이상향에서 능력에 따라 인재를 쓰는 관직제도를 구상했다. 그는 ‘문벌에 상관없이 능력과 인품이 탁월한 자가 있으면 특채한다’ ‘선대의 음덕만으로 관직에 보임된 경우 9품에 제수하고 중상 이상의 고과를 기록하지 못하면 더 이상 승진하지 못한다’는 규칙을 제정했다. 세도가 자제가 요직을 차지해 과거제가 유명무실해진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또 ‘제사음식은 반드시 간단하게 해야 한다’ ‘갓은 불편하니 복건으로 사당에 들어가도 된다’ 등의 규율을 통해 당대의 허례허식을 경계했다.

하지만 조선판 심시티는 결국 가상의 세계에 불과했다. 홍길주는 책에서 “숙수념은 내 생각일 뿐 실제가 없다”고 한탄했다. 박 교수는 “홍길주의 포부가 담긴 숙수념은 조선 후기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지식인의 슬픔과 자의식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홍길주#숙수념#벼슬 버린 조선 문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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