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최초(?)의 기사형 의견광고 “부당해고 철회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27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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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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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기사인 줄 알고 놀랐습니다. 얼핏 보기에 영락없이 기사였으니까요. 1단 크기 광고 바로 아래 실려 있으니까 당연히 광고여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1단 광고는 요즘에야 나오는 ‘부양(浮揚)’광고, 즉 기사 가운데 떠있는 광고가 됐겠죠. 동아일보 1925년 10월 27일자 2면 아래쪽의 3단 크기 기사형 광고는 표현이 한 번 더 놀라게 했습니다. 제목부터가 거리낌이 없었고 성명서에는 ‘요마배(妖魔輩‧요괴떼)’ ‘광한(狂漢‧미치광이)’ ‘독사와 같이 악독한’ 등의 구절도 나오거든요. 모두 조선일보 경영진, 특히 상무이사 신석우를 겨냥해 날린 화살 같은 말입니다. 해고된 조선일보 기자와 사원들이 썼죠. 아마도 전직 기자들이 쓴 최초의 기사형 의견광고일 듯합니다.


발단은 이렇습니다. 조선일보 1925년 9월 8일자에 논설반 기자 신일용이 ‘조선과 노국과의 정치적 관계’ 사설을 썼습니다. 내용은 일본과 소련의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조선은) 현상 타개를 위해 정치적 제국주의와 경제적 자본주의를 합리적인 다른 제도로 대체해야 한다. 이는 반드시 소비에트 러시아의 세계 혁신운동과 그 보조를 일치시켜야 한다’로 요약됩니다. 조선에서도 공산혁명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죠. 일제가 그냥 넘어갈 리 없었습니다. 신문을 즉시 압수하고 무기정간을 때렸습니다. 앞서 8월 1일에 잡지 개벽이 무기정간을 당했기 때문에 한글 신문‧잡지업계에 공포의 먹구름이 몰려왔죠.

일제 조선총독부는 1925년 8월 1일 잡지 개벽을 무기정간시키면서 개벽 8월호 광고가 실린 동아일보까지 압수했다. 동아일보는 이날자 신문에서 개벽 8월호 광고 중 문제가 된 부분을 삭제한 뒤 호외 형태로 다시 찍어내야 했다.
일제 조선총독부는 1925년 8월 1일 잡지 개벽을 무기정간시키면서 개벽 8월호 광고가 실린 동아일보까지 압수했다. 동아일보는 이날자 신문에서 개벽 8월호 광고 중 문제가 된 부분을 삭제한 뒤 호외 형태로 다시 찍어내야 했다.

조선일보는 세 번째 무기정간이었습니다. 이번 것은 1924년 신석우가 8만5000원에 조선일보 경영권을 사들인 뒤 처음 겪는 탄압이었죠. 조선일보는 주인이 바뀐 이후로 ‘변장탐방’ 기획과 최초의 연재만화 ‘멍텅구리’ 게재, 최초의 조‧석간제 시행 등 ‘혁신’을 주도했습니다. 논조도 아주 선명해져 ‘사상운동자의 기관지’라는 평을 받을 정도였죠. 만석꾼 집안 장남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총장을 지냈던 민족주의자 신석우와 1924년 동아일보를 제 발로 나와 조선일보로 건너간 이상협 민태원 김형원 유광렬 등 전문가들 그리고 영업국장 홍증식을 중심으로 한 화요회와 북풍회 등 사회주의세력이 손잡은 결과였죠. 돈‧기술‧이념의 ‘3자 동맹’이 이뤄낸 혁신이랄까요? 신일용도 잡지 신생활 기자로 일했던 사회주의자였죠.

①조선일보 무기정간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25년 9월 9일자 기사 ②총독부의 무기정간 남발이 부당하다고 비판한 동아일보 
1925년 9월 10일자 사설 ③일제 경찰이 조선일보 임직원을 소환 조사한다는 동아일보 1925년 9월 13일자 기사 ④일제가 
조선일보 윤전기를 차압했다는 동아일보 1925년 9월 15일자 기사
①조선일보 무기정간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25년 9월 9일자 기사 ②총독부의 무기정간 남발이 부당하다고 비판한 동아일보 1925년 9월 10일자 사설 ③일제 경찰이 조선일보 임직원을 소환 조사한다는 동아일보 1925년 9월 13일자 기사 ④일제가 조선일보 윤전기를 차압했다는 동아일보 1925년 9월 15일자 기사

경영진은 하루빨리 무기정간을 풀려고 뛰어다녔습니다. 고문 이상협이 총독부를 들락거리고 신석우는 부친과 함께 이완용까지 찾아가 정간 해제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 무렵 조선일보는 한 달에 1만 원, 지금의 약 8500만 원씩 적자를 보고 있었다죠. 신문을 내지 못할수록 손실의 늪은 깊어질 뿐이니 경영진은 속이 타들어갔을 겁니다. 총독부는 임직원을 소환 조사하고 윤전기까지 차압하며 목을 더 조여 왔죠. 38일 만인 10월 15일 정간이 풀렸습니다. 그런데 같은 날 20명 대량해고가 동시에 단행됐죠. 그때까진 필화가 일어나면 필자만 해고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난데없이 대량해고 당한 이들은 어처구니가 없었을 겁니다.

①조선일보와 개벽의 무기정간이 해제됐다는 동아일보 1925년 10월 16일자 기사 ②조선일보 정간 해제와 동시에 대량해고 당한 기자와 사원들의 명단과 대책 논의를 소개한 동아일보 1925년 10월 24일자 기사
①조선일보와 개벽의 무기정간이 해제됐다는 동아일보 1925년 10월 16일자 기사 ②조선일보 정간 해제와 동시에 대량해고 당한 기자와 사원들의 명단과 대책 논의를 소개한 동아일보 1925년 10월 24일자 기사

해직자들은 대책위원회를 구성하며 반발했습니다. 알고 보니 총독부가 신석우에게 ‘서범석 김단야가 그저 있느냐’라며 이들을 정리해야 해제가 빨리된다고 했다죠. 사회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 해직자 중에는 이상협 등 전문가들도 있었죠. 친한 사이던 신석우와 홍증식이 의논해 사회주의자들과 갈등 관계였던 이상협 계열을 같이 몰아냈던 겁니다. 홍증식은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등은 내보내고 덜 알려진 사회주의자들을 지방부에 배치해 세력을 보존했죠. 북풍회는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밀려난 이상협 계열에 눈길이 갑니다.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아먹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이 있죠? 이상협 등은 돈이 없어 제작기술만 넘겨주고 초겨울에 거리로 나앉는 신세가 됐습니다. 속사정까진 알 수 없었던 이들은 친정 신문에 신석우를 맹비난하는 의견광고까지 실어 여론에 호소했지만 그뿐이었습니다.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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