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정의롭고 공정한 정치인인가?[조대호 신화의 땅에서 만난 그리스 사상]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입력 2021-06-04 03:00수정 2021-06-04 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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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해 한복판 작은 섬 델로스는 신화 속 아폴론 신의 탄생지로 등장한다. 기원전 478년∼기원전 454년 델로스 동맹의 해군기지 역할을 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고대 아테네 민주정은 기원전 508년부터 100년 이상 안정 상태를 유지했다. 뛰어난 정치가들의 활약이 이어졌다. 이들은 민주정의 기틀을 놓았고 페르시아 제국의 침공을 막아냈으며 작은 도시국가를 문명의 정점으로 끌어올렸다. 그 100년 동안 정치제도뿐 아니라 기술, 예술, 학문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서양 문명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러니 그 시대를 이끈 영웅들의 이야기가 2500년 넘게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정의로운 사람’ 아리스티데스(기원전 약 530년∼기원전 467년)의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아리스티데스를 “아테네인들 중 가장 훌륭하고 가장 정의로운 사람”으로 평가했다. 정치가들의 업적 평가에 매우 인색했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조차 그를 칭찬했을 정도다. 이들은 당대 정치가들이 정의와 절제를 무시한 채 “항구들과 조선소들, 성벽들, 공물들과 같은 하찮은 것들로 나라를 가득 채웠다”고 비판하면서도 아리스티데스는 예외로 여겼다. 권모술수가 가득한 현실정치에서 그는 어떻게 정의를 실천했을까.

추방당한 영웅 아리스티데스

아리스티데스는 마라톤 전투에서 처음 역사의 기록에 등장한다. 기원전 490년, 대제국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했다. 다리우스 대왕은 제국의 영토에 거주하던 그리스인들의 반란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그리스 본토에 군대를 파견했다. 1000개에 이르는 작은 나라에 흩어져 살던 그리스인들은 허겁지겁 연합군을 꾸려 마라톤 평원에서 적군을 맞았다. 아테네군의 지휘는 밀티아데스가 맡았다. 하지만 군대 운영이 쉽지 않았다. “항상 최고가 되고 남보다 뛰어나거라”라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긴 장군들은 협력 아닌 경쟁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리스티데스가 협력을 끌어냈다. 그는 밀티아데스 못지않은 실력자였지만 지휘권을 그에게 넘기면서 “지혜로운 사람들을 믿고 따르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 고귀하고 안전한 길”이라고 동료들을 설득했다. 그러자 나머지 장군들도 아리스티데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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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의 승리 직후 아리스티데스는 최고 통치자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썩 인기 있는 정치가는 아니었다. 남의 힘으로 얻는 권력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았던 그는 항상 사람들을 경계하고 조심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태도는 경쟁자 테미스토클레스의 행보와 달랐다. 정의보다 권력을 추구한 이 영리한 정치가는 각종 특혜를 베풀면서 자기 사람들을 끌어 모았기 때문이다. 누가 경쟁에서 이겼을까?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리스티데스가 민주제도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경쟁자 축출에 성공했다. 아리스티데스는 권력 독점을 막기 위해 도입된 도편추방제도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 제도에 따르면 6000명 이상의 시민들이 지목한 사람은 추방을 당해 10년 동안 고향을 떠나야 했다.

기원전 483년 아리스티데스의 도편추방 때 사용된 도편. ‘아리스티데스 뤼시마코스의(아들)’이라고 적혀 있다. 아테네 아고라 박물관 소장
이에 얽힌 일화가 전해온다. 사람들이 모여 추방자의 이름을 도편에 적고 있을 때,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아리스티데스에게 다가와 ‘아리스티데스’를 써달라고 했다. “그가 무슨 해라도 끼쳤소?” 놀란 아리스티데스의 질문에 상대방이 대꾸했다. “아뇨. 그 사람을 알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어디서나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떠들어대니 듣기 싫군요.” 아리스티데스는 두말없이 자기 이름을 써 주었다.

동맹국의 마음 얻어낸 공정함


만일 페르시아의 제2차 침공이 없었다면 아리스티데스는 10년 동안의 떠돌이 삶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원전 480년, 새로 왕위에 오른 크세르크세스는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 직접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재침공했다. 영화 ‘300’의 배경이 된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의 용사들이 수만 명의 적군에 맞서 옥쇄작전을 펼쳤지만 역부족이었다. 아테네인들도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적군에게 도시를 비워주고 남쪽의 작은 섬 살라미스로 도피했다. 그리고 그곳의 해전에 그리스의 운명을 걸었다. 살라미스 해전은 그리스의 ‘명량해전’이었다.

아테네 해군이 주도하는 300척의 그리스 연합 함대가 900여 척의 페르시아 함선들에 포위되자 연합군의 일부에서 도망가려는 조짐이 보였다. 이를 막은 것도 아리스티데스였다. 포위망을 뚫고 추방길에서 돌아온 그는 곧장 테미스토클레스를 찾아갔다. “우리가 현명한 사람들이라면 쓸데없고 유치한 싸움은 그만두고 나라를 구하는 영예로운 경쟁을 시작합시다.” 아리스티데스는 과거를 따지지 않고, 연합군의 결속에 팔을 걷어붙여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인근 섬으로 도망간 적들을 토벌하는 데도 그가 앞장섰다.

하지만 아리스티데스의 정의가 가장 크게 빛난 것은 델로스 동맹을 체결할 때였다. 살라미스 해전 뒤 시급한 과제는 페르시아 잔류 군대를 완전히 축출하고 재침공에 대비한 방어망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아리스티데스는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에 남겨둔 30만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물론 경쟁국 스파르타도 가세했다. 그 결과 전후의 패권을 놓고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다툼이 임박해 보였다. 하지만 동맹국들의 마음은 쉽게 아테네 쪽으로 기울었다. 그들은 강압적인 태도를 보인 스파르타가 아니라 아리스티데스의 공정함에 신뢰를 두었기 때문이다. 동맹국들에 결정을 위임받은 아리스티데스는 각 나라의 영토와 수입을 조사해 동맹 분담금을 공평하게 나누었다.

현대 정치에 던지는 질문 ‘정의’


미국 보스턴시 비컨힐에 있는 아리스티데스의 동상.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아리스티데스는 기원전 467년 무렵 세상을 떠났다. 그는 경쟁자 테미스토클레스가 추방당하는 광경을 지켜보았지만 페리클레스가 아테네 제국을 건설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에게는 다행이 아니었을까. 제국의 성장 과정에서 눈살을 찌푸릴 만한 일들이 수없이 벌어졌으니까. 권력과 부를 위해 아테네인들은 정의를 ‘강자의 이익’이라고 부르고 절제를 소심함으로 무시하면서 부정의한 나라를 만들어 갔기 때문이다. 탐욕의 씨앗들이 뿌려졌고 결실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정의로운 영웅이 죽었을 때 가족은 장례비용조차 마련할 수 없었다고 한다. 후손들이 국가의 보조금에 의지해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플라톤이 쓴 ‘고르기아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불의를 저지를 수 있는 큰 권세를 가졌는데도 평생 정의롭게 산다는 건 대단히 칭찬받을 만한 일”이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 사람들은 몇 안 되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이곳에서도 나왔고 다른 곳에서도 나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누가 무엇을 맡겨도 그것을 정의롭게 처리해 내는 능력으로서의 덕이 훌륭하고 뛰어난 자들 말이네. 아리스티데스가 바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다른 모든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높았지.”

우리도 앞으로 아리스티데스 같은 정치가를 기대할 수 있을까? 대답은 우리에게 달렸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권력과 부를 앞세우는 정치인가, 정의와 절제를 존중하는 정치인가?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고대 아테네#아리스티데스#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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