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속의 그대[이정향의 오후 3시]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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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네브래스카

이정향 영화감독
이정향 영화감독
미국 북서부 몬태나주. 근근이 살아가는 팔순 노인 우디는 광고전단 문구를 오해하고 네브래스카주에 가면 100만 달러(약 11억 원)의 상금을 탈 수 있다고 믿는다. 늙고 쇠약해서 운전도 못 하는 그가 1300km를 걸어서 가겠다며 가출을 반복하는 탓에 아내도, 두 아들도 지친다. 노망기마저 있는 아버지의 쇠고집을 꺾을 길이 없단 걸 안 둘째는 긴 여정을 함께 한다. 중간에 들른 네브래스카의 고향에서 우디는 100만 달러의 상금을 떠벌려 과한 대접을 받지만 보물처럼 간직한 복권이 광고지일 뿐이란 게 밝혀져 망신을 산다. 그래도 아들은 아버지의 소원대로 끝까지 가본다.

우디는 한국전에 참전한 대가로 연금을 받지만 평생 술통에 빠져 사느라 미장원을 하는 아내에게 얹혀살았다. 아내는 남편의 술버릇이 지긋지긋하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못마땅해 악담만 퍼붓는, 입이 무척 거친 마누라지만 마음이 약해 남의 청을 거절 못 하고 이용만 당하는 남편의 방패를 자처하며 살아온 인생이다. 우디도 그걸 알기에 아내의 폭언을 묵묵히 견딘다. 장남은 이런 환경 덕에 일찍 철들어 현실적이고, 둘째는 그 반대로 정에 약하다. 이들을 보면 가정은 살아있는 생물체 같다. 서로 부대끼며 변한다. 때로는 상극일까 싶다가도 끊임없이 변화시키며 상생을 도모한다. 그러기에 지금의 나는 가족 모두의 합작품이다. 가족끼리는 서로의 단점에도 책임이 있고, 서로의 장점에도 공이 있다. 만약 다른 부모, 형제를 만났다면 지금의 나랑은 달랐을 거다.

지난주에 아버지와 이별했다. 주변에 부고를 알리지 않았기에 아버지를 기억하는 친척들과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를 나와 다르게 기억했다. 혼란스러웠다. 형제들과 닮은 얼굴이면서도 나는 내가 주워 온 자식이 아닐까 종종 의심했다. 그만큼 아버지는 내게만 가혹했다. 이런 아버지와 사사건건 치고받으며 자란 탓인지 형제들은 내가 아버지를 빼닮았다고 입을 모은다. 이건 인정한다. 내가 봐도 그렇다.

영화는 미국 내륙의 건조한 풍광을 흑백으로 담아낸다. 멋없이 펼쳐진 평원과 그 사이로 뻗은 길, 그리고 하늘뿐이지만 눈물나게 아름답다. 흑백이었기에 늙은 아버지의 눈빛과 표정이 잘 보였고, 그의 마음까지 읽혔다. 무채색의 세상은 뺄셈의 미학처럼 제일 중요한 것만 남겨주었다. 컬러로 보면 초라해 보일 우디의 삶이 흑백 속에서는 고고하게 빛났다. 나도 늙은 아버지의 일상을 흑백으로 바라봤다면 어땠을까. 붙박이장처럼 무력하게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그의 외로움이 잘 보였을 텐데…. 영화에서 우디가 100만 달러에 집착한 건 아무것도 가진 게 없기에 그거라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어서였다.

이정향 영화감독


#흑백#그대#네브래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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