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맛[이정향의 오후 3시]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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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그녀(her)

이정향 영화감독
이정향 영화감독
미국 대도시에 사는 30대 후반의 테오도르는 아내와 별거 중이다. 남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일을 하는 그는 회사에서 꽤 유능한 존재다. 타인의 마음을 잘 살펴 심금을 울리는 문장을 써내지만 정작 아내에겐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툴렀다. 그가 속을 드러내지 않아 힘들었다는 아내는 이혼을 요구하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그는 지독한 무력감에 빠져 머뭇댄다. 그러던 중 사만다라는, 실체 없이 목소리만 가진 인공지능을 구입하게 되고, 24시간 접속이 가능한 그녀와 일상을 나눈다. 아내에게 하지 못했던, 그리고 하고 싶었던 말들을 사만다와는 서슴없이 나누며 활기를 되찾는다. 미련 없이 아내와 이혼하고, 사만다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일방통행 같은, 주종관계다. 사만다는 고객의 취향과 습관을 고도의 인공지능으로 파악해서 맞춤 서비스를 할 뿐이다. 사만다 같은 인공지능이 더 진화되고 정교해지면 인간 고객들은 덜 외로워질까? 부대끼고 상처받는 인간관계를 피곤해하며 인공지능에 의지할수록, 결국 더 큰 허전함을 맛보지 않을까?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소유하고 싶지만 사만다는 수많은 고객을 상대해야 하며, 그들과도 사랑의 감정을 나눈다.

젊을수록 인터넷을 통한 익명의 만남을 선호한다. 서로에게 깊이 관여하지 않으니 부담이 없고, 내가 누구인지 모르니 쉽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 그러다가 한마디의 양해 없이 관계를 끊어도 뒤탈이 없다. 스트레스 없는 관계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에게 최소한의 접촉을 선사한다. 전등 스위치도 손끝 터치식으로 바뀌어 짐을 든 채로 어깨를 쓴다거나, 팔 길이가 모자라 효자손으로 누르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주문도 화면 터치로만 가능한 가게가 점점 늘어난다. 특히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비대면이 정답인 세상이 되었다.

얼마 전 일이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탈진한 어머니를 돌보는데, 윗집의 소음이 몇 시간째 계속되었다. 윗집 문 앞까지 갔다가 돌아서길 두어 차례, 결국 초인종을 눌러 지금의 어머니 상태를 설명하며 양해를 구했다. 윗집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서로 미안해하며 헤어졌다. 신기하게도 그 뒤로는 소음이 그다지 거슬리지 않고, 이해하는 마음까지 생겼다. 동생은 층간소음은 경비실을 통해야지, 그렇게 불쑥 찾아가는 건 고소감이라며 펄쩍 뛰었다. 하지만 경비실을 통했다면 나의 주저하며 미안해하는 마음이 윗집에 전달됐을까? 또한 윗집의 미안해하는 마음을 내가 알았을까? 며칠 뒤,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쳤다. 조심하고는 있는데 괜찮으냐고 묻기에, 신경 써주셔서 고맙다고 했다. 그러고는 우리 둘 다 활짝 웃었다.

이정향 영화감독


#테오도르#사만다#인공지능#인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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