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운을 남기는 5분짜리 단편소설[이호재의 띠지 풀고 책 수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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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소설/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유숙자 옮김/306쪽·1만1000원·문학과지성사


이호재 기자
이호재 기자
한 시골마을 정류장. 어머니와 딸이 빨간색 버스에 몸을 싣는다. 버스 운전사의 별명은 ‘고맙습니다’. 좁다란 산길을 지날 때 버스에 길을 양보하는 마차와 인력거에 예의바르게 고맙다고 인사하기 때문이다. 길을 가는 내내 모녀는 제일 앞자리에 앉아 운전사를 바라본다. 운전사의 착한 마음씨를 보았기 때문일까. 목적지에 도착한 후 어머니는 운전사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 “내 소원일세. 두 손 모아 빌겠네. 어차피 내일부턴 생판 모르는 사람의 노리개가 될 거네.” 가난 탓에 딸을 팔 수밖에 없는 어머니가 딸을 맡아줄 것을 부탁한 것.

‘고맙습니다’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200자 원고자 15장 안팎이다. 일본어로 손바닥만 한 길이라는 의미로 손바닥 소설이라고 불린다. 읽는 데 드는 시간은 길어야 5분 남짓. 하지만 읽고 나면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 저자는 이런 초단편 소설을 100여 편 썼다. 이 소설들에는 사랑, 이별, 꿈, 고독, 죽음, 늙음 등 삶의 단면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저자는 1948년 발표한 소설 ‘설국’으로 유명하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는 설국의 첫 문장은 간결한 언어로 독자를 빨아들이는 미학을 보여준다. 설국은 장편소설이지만 단편적인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다. 이야기의 호흡이 길지 않다. 설국의 문장전개 방식이 손바닥 소설과 빼닮았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손바닥 소설을 언급한 건 요즘 유행하는 웹소설 때문이다. 웹소설은 호흡이 짧다. 스마트폰으로 읽으면 한 화면에 20개 문장이 채 되지 않는다. 한 문장이 한 문단을 구성하기도 한다. 이제 스마트폰을 피해 갈 수 없는 시대다. 웹소설 콘텐츠는 스마트폰이라는 플랫폼에 맞게 창작될 것이다. 더욱 짧아질 가능성이 높다.

기존 문학이라고 다를까. 종이의 질감을 여전히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전자책 시장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 소설을 보는 다른 전자기기가 나오지 않으라는 법도 없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면 플랫폼 변화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한기호 한국출판문화연구소장은 “요즘 어떤 작가들은 스마트폰으로 읽기 편한 글을 쓰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글을 쓴다”고 했다. 만년필로 원고지에 글을 쓰는 시대에서 손가락으로 스마트폰 자판을 두드리는 시대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지하철에 타면 웹소설을 보는 독자들을 보곤 한다. 그들은 빠르게 스크롤을 내린다. 얼굴은 무표정하기 일쑤다. 어쩌면 퇴근길에 아무 생각 없이 활자를 소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걸작 손바닥 소설같이 짧고도 감동을 주는 소설을 스마트폰으로 읽는다면 다르지 않을까. 소설 속에서 어머니가 딸이 팔려갈 몸이라고 말하는 순간, 잠시 스크롤을 멈추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다. 글을 저장하고 싶은 마음에 화면을 캡처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사심을 가득 담아, 짧고도 감동을 주는 소설을 스마트폰으로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단편소설#손바닥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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