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멈춘 1년… 몸으로 희망 그려보고 싶어”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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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걸 한예종 무용원 교수
중학생때 엄마 손 끌려 발레 입문, 국내 발레리노 최다 ‘최초’ 타이틀
“작년 안식년, 3번 수술대 올라… 32년 발레인생 돌아볼 기회
고난 뒤에는 늘 교훈이 남는 법, 내달 4일 공연 등 벌써부터 바빠”

최근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구실에서 만난 김용걸 교수는 “저는 남을 의식하지 않고 나 자신만을 위해 평생 춤을 췄다. 하지만 요즘 후배들이 저를 보면서 희망을 얻었다고 할 때 힘이 난다”고 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최근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구실에서 만난 김용걸 교수는 “저는 남을 의식하지 않고 나 자신만을 위해 평생 춤을 췄다. 하지만 요즘 후배들이 저를 보면서 희망을 얻었다고 할 때 힘이 난다”고 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30년 넘게 무대를 누빈 발레리노의 몸은 구석구석 성한 데가 없지만 열정만큼은 결코 식지 않았다. 김용걸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무용원 교수(48)는 전성기 때에 비해 키가 3∼4cm 줄었다. 무대에서 격한 동작을 소화하느라 연골과 인대가 심하게 닳아서다. 그는 지난해를 안식년으로 보냈다. 다른 교수들은 여행도 다니고 편히 쉰다지만 그는 고장 난 몸을 돌보느라 한 해를 썼다. 발레리나를 수시로 들어올리던 어깨는 양치질을 하기 힘들 만큼 망가졌다. 지난해에만 세 번이나 수술대에 올랐다.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후배 무용수와 제자들도 공연을 멈춰야 했다. 김 교수는 “의도치 않게 2020년은 32년 발레 인생을 돌아볼 기회였다”고 했다.

국내 발레리노 가운데 ‘최초’라는 수식어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그를 서울 서초구 한예종 캠퍼스에서 만났다. 김 교수는 1998년 김지영과 파리국제무용콩쿠르 클래식발레 커플 부문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했다. 수상 직후 그는 투박한 사투리로 “한국에도 이런 무용수가 있다는 걸 알려 뿌듯하다”며 기뻐했다. 국립발레단 주역으로 활약하던 그는 2000년 과감한 도전에 나섰다. 프랑스에서 봤던 ‘섹시하고 세련된’ 발레를 잊지 못했다. 오디션 끝에 그는 동양인 남성 최초로 파리오페라발레단에 합격했다.

김 교수의 연구실 한쪽 벽면은 각종 상패, 사진으로 가득했다. 그는 “부산 촌놈이 출세했다”며 사진마다 얽힌 일화를 풀어냈다. 프랑스 공연 직후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 부인으로부터 100년산 와인을 받았고,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선 23년 동안 수석무용수(에투알)를 지낸 마뉘엘 르그리(현 이탈리아 스칼라극장 발레단장)와 한 무대에 섰다. 그는 “늦은 나이에 엄마 손에 이끌려 죽도록 싫어하던 발레학원에 가던 ‘중학생 김용걸’에게는 모든 게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했다. 이어 “이때처럼 무대를 마음껏 휘젓고 힘껏 점프하던 때가 좋았다”며 미소 지었다.

‘쫄쫄이 타이츠’가 수줍어 발레에 정을 붙이지 못하던 그는 부산예고에 진학한 뒤 달라졌다. “무대에서 넌 때깔이 난다”는 스승의 칭찬에 힘입어 발레에 빠져들었다. 당시엔 귀했던 해외 무용수들의 영상을 수십 번씩 돌려봤다. 1994년 대학 4학년 땐 동아무용콩쿠르에서 금상을 탔다. “삼수 끝에 얻은 결실이라 부모님과 같이 미친 듯 기뻐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지난해는 정적으로 보냈지만 올해는 벌써부터 지방 공연장을 바쁘게 오가며 예열 중이라고 했다. 다음 달 4일 광주시립발레단의 ‘발레 살롱 콘서트’, 4월 16∼18일 세월호 이야기를 다룬 ‘빛, 침묵 그리고…’ 등 여러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그는 “지난해 어려움이 많았고 지금도 힘들지만 고난 뒤에는 늘 교훈이 남는다”며 “무대의 소중함을 떠올리며 나중에도 이 시기를 잊지 않겠다. 발레만 보며 진심으로 살았던 김용걸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발레리노#최초#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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