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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증발’[횡설수설/구자룡]

입력 2020-10-12 03:00업데이트 2020-10-1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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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경제가 꺼진 1990년대의 ‘잃어버린 10년’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매년 10만 명가량이 ‘실종’됐다. 이 중 8만5000명가량은 ‘스스로 증발’한 것이었다. 프랑스 저널리스트 레나 모제는 이들을 추적한 책 ‘인간 증발’에서 “‘약한 불 위에 올려놓은 압력솥’으로 비유되던 일본 사회에서 한계에 내몰린 사람들이 수증기처럼 증발했다”고 분석했다.

▷동아일보가 3개월간 추적해 최근 5회에 걸쳐 기획 보도한 ‘증발’ 시리즈는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이들이 증발하고 있는 실태를 생생히 전했다. 증발됐다가 6년 만에 돌아온 남동생이 “푸석한 노인이 되어 돌아왔다”고 말하는 문모 씨 누나의 사연 등을 접한 독자들은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는 일인지 가슴 먹먹하다”고 했다. 코로나19까지 겹쳐 더 많은 이들이 사회적 낭떠러지로 밀려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진하게 배어 있는 독자 의견도 쏟아졌다.

▷실직 파산 사별 이혼 질병, 혹은 사고 배신 무지, 바보 같은 순진함…. 두 손 손가락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한 가닥 희망의 끈마저 끝내 붙잡지 못하고 먼 길 낭떠러지 같은 ‘증발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갔던 사람들의 사연은 다양하고 절절하다. 지금도 사회 어디에선가 하얀 밤을 새우는 ‘예비 증발자’들이 있다. 독자들은 이들이 어떻게 다시 돌아오는지, 돌아올 수 있는지를 추적해 달라고 했다. 개인 사회 국가가 각각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 보자는 주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다. 수년 전 대구에서는 38세 남성이 배가 고파 포장마차에서 생닭 2마리를 훔치다가 붙잡혔는데 주민등록도, 호적도 없는 ‘무적자(無籍者)’였다. 갓난아기 때 보육원에 맡겨졌다가 뛰쳐나온 뒤 노숙하며 전전한 것이다. 거주지 신고를 하지 않고 떠도는 ‘거주 불명자’도 40여만 명에 달한다. 사회의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극단적인 증발인 ‘자살’이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사회제도의 영향에 의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의 융합으로 극소수의 사람들은 신적인 능력을 갖는 ‘호모 데우스’가 될 수도 있지만 수십억 명의 사람들을 고용시장에서 밀어내 사회와의 관련성을 잃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한 ‘무관한’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경쟁이 치열하고 서로를 비교하기 좋아하는 폐쇄적인 집단문화일수록 ‘패배자’들은 증발을 택한다. ‘사회적 자살자’인 증발자들이 개인적으로만 해법을 찾기에는 너무 버거운 시대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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