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에 사라졌던 동생, 6년 만에 낯선 노인으로…[히어로콘텐츠/증발]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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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히어로콘텐츠 / 증발
<1> 세상을 등지고 증발을 택하다

‘웬 노인이 날 보고 웃나’ 싶었다.

푸석하고 허연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늘어져 있었다. 누가 아무렇게나 가위를 놀렸는지 쥐가 파먹은 듯 듬성듬성했다. 생전 처음 보는 어르신이었다.

그가 희미하게 웃는 순간, 불현듯 동생임을 깨달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검은 틈들이 보였다. 남아 있는 이보다 빠진 이가 더 많았다. 어릴 때부터 단정한 스포츠머리만 고집하던 녀석, 때운 곳 하나 없이 가지런한 이가 곱던 녀석.

“밥은… 먹었니….”

간신히 한마디를 건네고 말을 잇지 못했다. 말보다 울음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주름이 깊게 팬 동생의 손만 매만졌다. 따뜻한 한낮인데 동생은 벌벌 떨고 있었다.

동생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30대 가장이었다. 세 아이를 키우기 위해 작은 중국집을 운영하며 땀을 흘리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영원히 그렇게 잘 살 줄 알았다.

그런 동생의 삶에 균열이 생겼다. 2003년 아내와 성격 차이로 헤어졌다. 동생의 아내는 막내딸을 데리고 떠났다. 동생은 두 아들을 어머니 집에 맡기고 혼자 경기 부천시에 반지하방을 얻었다. 이혼이 흉인 시대가 아닌데도 동생은 사람 만나기를 꺼리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하나둘 멀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가족에게도 연락을 잘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기를 못마땅하게 보는 것 같다고 했다. 하던 식당을 접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공사판으로 뛰어들었다.



이곳저곳 공사장에서 일하며 그럭저럭 지내는 것 같았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온 동생이 공사장에서 손을 다쳤다고 했다. 얼마나 다쳤는지, 치료는 하고 있는 건지 물어도 답이 없었다. 그리고 몇 달 연락이 끊겼다. 답답한 마음에 무턱대고 반지하방을 찾아갔다. 옷가지 몇 벌이 어지러이 널려있을 뿐 근래 사람이 머문 온기가 없었다.

사방을 수소문해도 동생과 연락이 닿는다는 이는 찾을 수 없었다. 동생은 가끔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왔다. 어디냐고 물어도 아이들의 안부만 묻고 끊었다. 처음엔 몇 달, 나중엔 몇 년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그렇게 동생은 증발해버렸다. 남겨진 이들의 가슴은 뭉개졌다.


바람 한 점 없이 무덥던 2013년 9월 어느 날.

인천 청라국제도시의 아찔한 고층 빌딩들 사이, 5층짜리 나지막한 상가 공사 현장이 그날 나의 일터였다. 전날 비가 내려 여기저기 물이 고여 있었지만 일이 하루 밀린 터라 마음이 급했다.


한순간이었다. 여느 때처럼 철근을 나르려 2m 높이 나무 발판에 올라서자 발판이 갑자기 산산조각이 났다. 몸이 기우뚱하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오른손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오고 있었다. 넘어지는 순간 옆에 있는 물건을 붙잡으려던 게 하필 날카로운 철근 단면을 잡은 것이다. 의사는 오른손 엄지의 인대가 끊어졌다고 했다. 당장 수술을 해야 했지만 수술비가 수백만 원이란 얘기에 멈칫했다.

나를 고용한 하청업체 현장 반장에게 사고를 알렸다. 그는 내 잘못이라며 수술비를 줄 이유가 없다고 했다. 원청업체를 수소문해 부탁했지만 이미 하청업체에 안전비용까지 지불했기 때문에 보상 의무가 없다고 했다. 일을 하다 사고를 당했는데 어디서도 보상을 받을 수 없다니…. 통사정을 한 끝에 간신히 하청업체에서 80만 원을 받았다. 그렇게 수술은 멀어졌다.

물컵 하나 들 수 없었다. 공사장에 못 나가니 점점 가난해졌다. 친구들에게 연락이 와도 피했다. 술 한잔은커녕 끼니 챙길 돈도 없는데 누굴 만날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술을 사겠다며 나오라고 했다. 얻어먹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손을 벌리기도 싫었다.

가족과의 연락도 꺼려졌다. 결혼에 실패하고, 아이들을 먹여 살릴 능력도 없는 허울뿐인 가장. 한마디로 ‘루저’가 된 나를 가족들이 어떻게 볼지 생각하면 수치스러웠다. 아…. 어머니를 생각하면 고개도 들 수 없었다. 없는 살림에 자식들을 알뜰살뜰 키워낸 나의 어머니. 노모에게 두 아이를 맡기러 온 못난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던 그 눈빛이 밟혔다. 그럴수록 어머니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졌다. 점점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게 괴롭고, 어머니의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아졌다.


혼자 반지하방에 머무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바닥에 널브러져 TV를 보며 소주를 마시는 게 일상이었다. 취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TV 소리를 뚫고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떠나지 않았다.

“가족들은 널 싫어해.”

“너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송곳으로 머리를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과 함께 찾아온 그 목소리.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때는 들리지 않았다. 오직 혼자 있을 때만 그 목소리가 다가왔다.

그 목소리를 피하려면 어떻게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빈손으로 방을 뛰쳐나와 고물 자전거를 타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서울로 들어서 있었다. 처음 멈춘 곳은 여의도 한강공원이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다. ‘나를 괴롭히는 목소리를 멈추려면 저들과 이야기를 해야 해.’ 절박한 마음과 달리 몸은 머뭇거리기만 했다. 결국 누구에게도 다가서지 못했다. 나 같은 루저와 누가 어울리겠는가….

그때부터였다. 증발자의 삶에 발을 디딘 것은.

‘배달존 2.’ 나의 안식처였다. 여의도 한강공원을 찾은 사람들이 전화로 음식을 시킨 뒤 배달원과 만나는 곳.

사람들이 버리고 간 망가진 텐트를 주워 공원 수영장 뒤편 우거진 수풀에 나의 집을 세웠다. 사람들이 먹다 남긴 치킨과 피자로 나의 상을 차렸다.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돌아다니다 해가 지면 여의도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잠을 청했다. 나의 집에서 고개를 내밀면 KB국민은행 간판이 보였다. 고개를 쳐들면 LG 로고가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은행에 갈 일도, 휴대전화를 살 일도 없었다. 누군가는 요즘 한국에 휴대전화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락해야 할 사람도, 연락하고 싶은 사람도 없던 내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렇게 증발자로 보낸 세월이 6년. 그 사이 많은 것을 잃었다. 영양실조와 각종 자전거 사고 때문에 이가 우수수 빠졌다. 몸은 점점 말라갔다. 스스로 선택했지만, 증발의 대가는 참으로 잔인했다.

힘들었지만 가족에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부끄럽고 미안해서. 언젠가 어머니와 아이들이 사는 집 근처에 간 적이 있었다. 애들 몰래 뒷모습이라도 보고 오려 했지만 그냥 금방 돌아왔다. 내 존재 자체가 아이들에게 해가 될까 두려웠다.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리려고 고민한 적도 두 차례. 죽고 싶었지만, 죽기 싫었다.


2016년 10월 14일을 잊지 못한다. 오전 8시 막 출근을 했는데 휴대전화에 병원 전화번호가 찍혔다. 중환자실에 머물던 어머니가 위급하다고 했다. 정신 없이 달려갔지만 임종을 하지 못했다. 엄마는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동생을 보고 싶다는 소원을 끝내 이루지 못했다.


동생의 두 아이를 키우던 엄마가 남긴 유일한 재산은 조카들과 함께 살던 작은 임대아파트. 당장 조카들이 여기서 계속 살아가야 했다. 명의를 넘겨받아야 할 동생이 사라져버렸으니 애가 탔다.

주변에서 동생을 사망 처리하면 엄마 명의를 조카들에게 넘겨줄 수 있다는 얘기들이 들려왔다. 생때같은 내 동생이 죽다니, 그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불쌍한 우리 조카들은….

눈물을 삼키며 법률구조공단을 찾아갔다. 직원은 법원에 실종선고를 청구하면 된다고 했다. 이름 모를 서류들을 수십 장 발급받고 제출했다.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내 동생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다. 하지만 조카들을 위해서는 참고 계속해야 했다. 죽지 않았다면 언젠가 돌아올 거라는 마음으로 죄책감을 꾹꾹 눌렀다.


2018년 6월 28일, 실종선고 청구를 무료로 도와준 법률구조공단 직원이 조용히 2장짜리 판결문을 내밀었다. ‘사건본인(부재자)은 실종되어 2015.6.1 실종기간이 만료되었으므로 실종을 선고한다.’ 단 한 줄의 무미건조한 문장으로 동생은 영영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동생을 ‘서류상’으로 죽였다. 내 손으로 죽였다. 실종선고 청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동생이 최근 5년간 휴대전화를 만든 적도, 통장 거래를 한 적도, 외국으로 나간 적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렇게 아무런 흔적도 없다니…. 혹여 정말 죽은 건 아닌지 두려워졌다.


2020년 2월. 살을 에는 칼바람 속에 한때 내가 살던 반지하방을 찾았다. 증발자로 살아가는 중에도 일 년에 한 번쯤 이곳에 들렀다. 추위를 견디다 너무 힘들면 급히 옷만 바꿔 입고 유령처럼 사라졌다.


외투를 찾아 걸치고 잠시 머뭇거리는데 또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칠 것 같았다. 방에서 뛰쳐나와 걷다 보니 슈퍼마켓 밖에 서 있는 냉장고가 눈에 들어왔다. 맥주와 소주가 가득 차 빛나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빈털터리였다. 0시 46분. 나도 모르게 냉장고 문을 열어젖혔다. 차가운 소주 4병, 맥주 3병을 끌어안고 뛰었다. 반지하방으로 돌아와 마시고 잠을 자고 또 마시고 잠들었다.

사흘 뒤 새벽 2시. 거리로 나서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항상 나를 괴롭히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실제로 두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좋았다. 그들이 건넨 말은 이랬다.

“저희가 왜 왔는지 아시죠. 술 훔쳤잖아요. CCTV에 다 찍혔습니다. 인정하세요.”

내 절도사건 서류를 보던 검사는 내가 2년 전 실종선고를 받은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됐다. 검사는 실종선고 청구자에게 연락을 했다. 수화기 너머 누나에게 내가 살아있다고 전했다고 한다. 누나는 우느라 대답을 못 했다고 한다.

나는 그들 곁에서 증발해 버렸는데, 그들의 눈물은 증발하지 않았다. 내 마음 어딘가에도 그들을 향한 그리움이 남아있었는지 모른다.

두 달 뒤, 검사실에서 누나를 만났다. 공사장에서 기우뚱한 지 6년 7개월 만이었다. 그 사이 많이 늙은 누나는 내게 “밥은… 먹었니…”라고 했다. 한마디도 못한 채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의 눈물도 증발하지 않았다.


지금도 여의도 한강공원에서는 나와 같은 증발자들이 떠돈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연기 같은 이들. 모든 증발자들이 나 같은 이야기를 하나씩 품고 있다.

증발자 문씨 “기초수급제도 있는지도 몰랐다”

10년이내 실종자 226명 추적해보니

증발자 문모 씨(48)는 동아일보가 대법원 홈페이지에 게시된 실종선고자 6000여 명 중 생사불명이 된 지 10년 이내인 226명을 추려 3개월간 접촉한 이들 중 한 명이다. 동아일보는 문 씨, 문 씨의 누나, 대한법률구조공단 부천출장소, 인천지검 부천지청, 인천지법 부천지원을 통해 문 씨의 증언을 여러 각도에서 확인했다.

문 씨는 자신의 사연을 통해 누군가 왜 증발해버리는지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다만 자신의 신상이 알려지면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며 성 씨와 나이만 밝혀 달라고 했다.

왜 증발하기 전에 가족이나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문 씨는 “못난 나 자신이 부끄러워 마음의 문을 닫았다”고 답했다.

기자가 기초생활수급제도의 도움을 받지 그랬냐고 하자 그는 “그런 게 있는지, 대상이 될 수 있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산업재해를 당했는데 법의 힘을 빌려 돈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느냐고 묻자 “나 같은 사람은 법 같은 거 잘 모른다”고 했다. 이상한 목소리가 들릴 때 왜 병원에 가보지 않았냐고 묻자 “돈이 없으니까…”라고 했다.


문 씨는 이제 새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다. 신분을 되찾으면서 임시로 기초생활수급비로 월 32만 원을 받게 됐다. 하지만 수술비를 마련할 길은 없다. 문 씨를 발견한 이주현 인천지검 부천지청 검사(37·사법연수원 40기)는 “사회에서 방치돼 있었던 사람인 만큼 먼저 신원 복귀와 치료를 한 뒤 책임을 묻는 것이 마땅해 실종선고 취소 소송을 제기해 사회에 복귀시켰다”고 했다. 문 씨를 진료한 의사는 그를 괴롭힌 목소리의 정체가 이혼과 산재로 생긴 우울증에 따른 환청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문 씨는 술을 훔친 행동에 대해 8월 11일 1심에서 검찰 구형과 같은 벌금 70만 원을 선고받았다.

나락으로 내몰려… 스스로를 삭제한 사람들

우발적 가출-범죄 연루와 달라
상처 등 쌓이며 자발적 단절 선택


실직, 파산, 사별, 이혼, 질병…. 인생이란 언제 어떤 시련이 닥쳐올지 모른다.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가족이나 친구 그 누구에게도 손길을 뻗지 못할 수도 있다.

남들은 실패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할지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 나의 존엄성을 해치고 싶지는 않다. 벼랑 끝으로 밀려 추락하기 직전이지만 거리로 나가 구걸하며 살아가고 싶진 않다. 그럴 때 누군가는 생각한다. 사라져버리고 싶다고.

여기, 정말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리는 이들이 있다. 홧김에 집을 나가는 가출이 아니다. 범죄나 사고에 연루돼 숨거나 숨겨진 것도 아니다. 증발은 자발적인 의지로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 이웃, 동료 등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모두 단절하는 것이다. 자신이 존재하던 세상에서 자신을 완전히 삭제하는 일이다.

오늘도 우리 주변 어딘가에선 ‘증발’이 벌어지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해서, 이혼으로 인한 상실감을 채우지 못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받아온 상처가 쌓이고 쌓여서 사라져버리는 이들이 있다. 남겨진 이들의 마음에 생긴 멍은 시간이 갈수록 크고 진해진다. 이들 주위에는 증발하려는 자를 돕는 이가 있는가 하면 증발한 자의 뒤를 쫓는 이들도 있다.

누군가는 스마트폰 보급률이 95%에 달하는 2020년 대한민국에서 완벽히 증발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에 동아일보가 3개월간 추적한 증발자와 그 가족들은 묻는다.

“당신, 정말 벼랑 끝까지 밀려나 본 적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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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히어로콘텐츠 / 증발 <1> 세상을 등지고 증발을 택하다
https://original.donga.com/2020/lost1

동아히어로콘텐츠 / 증발 <2> 증발자들의 공간, 미래고시텔

https://original.donga.com/2020/los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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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기사 취재: 김기윤 이호재 사지원 기자
▽사진·동영상 취재: 송은석 양회성 이원주 기자
▽일러스트: 김충민 기자
▽편집: 홍정수 기자
▽프로젝트 기획: 김성규 이샘물 기자
▽디지털 제작: 윤수미 이현정 김수영 윤태영 김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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