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연-지연 깨고 데이터-실력… ‘공정의 힘’ 보여준 제2 히딩크들[인사이드&인사이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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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스포츠 외국인 감독 효과

백발의 외국인 감독은 반바지 차림으로 코트 위를 돌아다닌다. 선수들의 플레이가 만족스러우면 함박웃음을 짓는다. 선수에게 직접 공을 올려주고, 훈련 장비도 손수 옮기는 그는 프로배구 남자부 대한항공 로베르토 산틸리 감독(55·이탈리아)이다. 올해 5월 프로배구 남자부 첫 외국인 사령탑으로 부임한 그는 특유의 쇼맨십과 친화력, 탈권위주의로 코트에 신선한 바람을 넣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로배구 남자부 현대캐피탈 최태웅 감독은 “첫 외국인 감독이 가세하면서 국내 지도자에게는 유럽의 선진 배구 전술과 훈련 방법을 배울 좋은 기회도 된다”고 말했다.

국내 프로스포츠 외국인 감독 시대가 막을 올린 지 어느덧 30년을 맞았다. 1990년 1월 프로축구 대우 로얄스가 프랑크 엥겔 감독(독일)에게 지휘봉을 맡긴 게 그 출발이었다. 산틸리 감독은 4대 프로스포츠(야구 축구 농구 배구)를 통틀어 36번째(감독대행 포함)로 한국 땅을 밟은 외국인 사령탑이다. 프로축구 전북의 조제 모라이스 감독(포르투갈), 프로야구 KIA의 맷 윌리엄스 감독(미국)까지 현재 3명의 외국인 감독이 국내 프로 무대에서 활동 중이다. 종목별 국가대표팀에는 남자 축구(파울루 벤투·포르투갈)와 여자 축구(콜린 벨·영국), 여자 배구(스테파노 라바리니·이탈리아) 등이 외국인 사령탑의 지도를 받고 있다.

프로 구단들이 외국인 감독을 선임하는 주된 이유는 새로운 시각을 통한 변화와 전력 향상이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정규리그 2위를 했음에도 사령탑을 교체하며 강한 우승 의지를 내비쳤다. 다음 달 정규리그 데뷔를 앞둔 산틸리 감독은 “(대한항공이라는) 훌륭한 수프에 기술이라는 소스를 추가해 우승이라는 단어를 두려워하지 않는 팀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 학연·지연에서 자유로운 외국인 사령탑

현재 프로야구 꼴찌(10위)인 한화는 다음 시즌 외국인 감독 선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연고지인 대전, 충남의 특정 학교 출신 중심의 문화를 타파하기 위해 외국인 감독이 전권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학연에 따라 이합집산하면서 팀워크를 해친다는 지적도 있다.

외국인 감독은 한국 스포츠에 뿌리 깊은 연고주의에서 자유롭기에 소신껏 팀 체질을 개선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한 프로축구 구단 관계자는 외국인 감독의 선임 효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전임 감독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선수나 눈 밖에 나 벤치를 달구던 선수나 모두 같은 출발점에 서게 됩니다.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외국인에게 잘 보이려면 공을 잘 차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외국인 감독의 눈에는 모든 선수가 동등하다. 출신, 간판 등을 따지지 않다 보니 선수 기용에 객관성이 생긴다. 외국인 감독 선임은 여러 인연을 빌미 삼아 서로 밀고 끌어주는 선수와 감독 간의 파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카드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롯데를 이끈 제리 로이스터 감독(미국)은 선수들에게 실수와 패배를 두려워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 ‘노 피어(No fear)’ 정신으로 성공을 거뒀다. 이름값과 팀 내 파벌 갈등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철학에 맞는 선수들을 중용한 그는 하위권을 맴돌았던 롯데의 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끌었다. 한 야구계 관계자는 “로이스터는 악성 비난과 압력 등 외풍에 흔들리지 않았다. 한국말을 잘 못 알아들어 자신이 눈으로 본 것만 믿은 것도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2008년에 프로축구 K리그 준우승을 차지한 FC서울의 셰놀 귀네슈 감독(터키)은 10대 후반으로 2군 팀에 있었던 ‘쌍용’ 이청용과 기성용을 과감히 주전으로 기용해 성공을 거뒀다. 서울에서의 성장을 토대로 유럽 무대를 누볐던 이청용은 “귀네슈 감독은 내 재능을 찾아준 분이다. 내가 감독이라면 어린 선수를 과감히 기용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귀네슈 감독은 “기술이나 실력은 뛰어나지만 아직 나이가 어려 자신감이 부족한 선수들이 있다. 프로 팀은 이들에게 기회를 열어주고, 선수들은 1∼3년 안에 국가대표가 되겠다는 목표로 발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로서는 국내 구단에 일반적이지 않았던 스포츠 심리학자를 고용해 전력 강화에 효과를 봤다.

불같은 카리스마 대신 자상함으로 구성원들의 능력을 끌어낸 외국인 감독들도 있다. 2018년에 프로야구 SK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트레이 힐만 감독(미국)은 직접 배팅 볼 투수로 나서는 등 감독과 선수 간의 수직 관계를 벗어난 리더십으로 팀을 변화시켰다.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그의 지도 아래 과거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한동민은 2018년에 41개의 홈런을 터뜨린 거포로 거듭났다. 그해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에 오른 한동민은 “슬럼프에 빠져 숨고 싶었던 나를 끝까지 믿고 경기에 출전시켜 주셨다”라고 말했다.

○ 보이지 않는 장벽들

외국인 감독은 성공하면 신화로 남는다. 하지만 쓸쓸하게 짐을 싼 이방인은 금세 잊혀진다. 역대 외국인 감독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약 14개월. 1년이 조금 넘는 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면 조용히 출국해야 했다. 프로축구 포항에서 K리그와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한 세르지우 파리아스 감독(브라질)은 4년 11개월간 팀을 이끌었다. 하지만 파리아스에 이어 포항 지휘봉을 잡은 발데마르 레무스 올리베이라 감독(브라질)은 극심한 성적 부진으로 4개월 만에 경질됐다.

성적 부진의 원인 중에 대표적인 것은 선수들과의 ‘엇박자’다. 프로농구 전자랜드에서 6개월 만에 지휘봉을 내려놓은 제이 험프리스 감독(미국)은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 접전이 벌어지던 경기 막판에 감독의 맨투맨 수비 지시에 일부 선수가 지역방어를 쓰다가 3점슛을 얻어맞고 패한 적도 있다. 여기에 출전 시간문제로 고참 선수들이 불만을 드러내면서 선수단 장악에 실패했다. 당시 험프리스 감독을 보좌했던 스태프는 “한국 감독이면 밖에서 선수와 밥을 먹거나, 하다못해 문자메시지로라도 마음속에 담아 뒀던 말을 전할 텐데…. (험프리스는) 항상 통역이 필요하다 보니 선수들과 진솔한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고 말했다.

소통 강화를 위해 요즘 프로 구단들은 코치진에 선수들과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젊은 국내 코치를 두고 있다. 남자 축구대표팀은 벤투 감독이 한국에 입국했을 때 한국 문화와 한국에서 축구대표팀이 가지는 의미 등을 설명하는 자리를 별도로 마련하기도 했다.

선수들과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외국인 감독 스스로도 애를 쓴다. 지난해 K리그1 우승을 차지한 전북의 모라이스 감독은 이동국 등 팀 내 고참 선수들과 식사 자리를 가지거나 클럽하우스 뒤뜰에서 바비큐 파티를 벌이기도 했다. 전북 관계자는 “(지난해) 선수단 회식 때 감독님이 노래방 기기를 요청해 다 함께 춤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전했다.

○ 새로운 성공 신화를 위해

외국인 사령탑들은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나라에서 남다른 생존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데이터 야구와 포지션별 전문성 강화로 프로야구 KIA를 이끌고 있는 윌리엄스 감독. 그는 매일 치열한 순위 경쟁을 벌이는 와중에도 한국 야구에 새로운 문화를 이식해 화제를 모았다. 상대팀 감독을 만날 때마다 감독 이름을 새긴 특별한 와인을 주문해 선물하고 있는 것이다. 야구팬들은 이를 ‘와인 투어’로 부른다. 모라이스 감독은 유럽 축구 강국인 포르투갈의 전술 훈련 방법을 이식해 전북의 강력한 공격 축구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다. 모라이스 감독은 23일 열린 축구협회(FA)컵 4강전에서 팀을 7년 만에 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프로와 대표팀을 통틀어 역대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외국인 감독은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뤄낸 거스 히딩크 감독(네덜란드)이다. 그는 평가전에서 대패를 당해 비난에 시달리면서도 뚝심 있게 자신의 전술을 밀어붙였고 선수들에게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스타 선수들과의 ‘밀당(밀고 당기기)’을 통해 선수단을 완벽히 장악한 그는 한국 특유의 위계질서를 타파해 팀워크가 살아나게 만들었다. 히딩크 감독이 남긴 말은 낯선 땅에서의 성공을 꿈꾸는 사령탑들에게 참고가 될 만하다. “새로운 환경에서 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과제다. 하지만 내가 정직하고 유능하면 모두가 재미있게 일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한 번의 실패보다 한 번의 성공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도를 했느냐가 중요하다.”

정윤철 trigger@donga.com·강홍구 기자
#프로스포츠#외국인#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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