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계좌추적권 무장한 부동산감독기구, 도 넘는 사생활 침해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3일 0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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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시장의 불법행위를 적발, 처벌하기 위해 ‘부동산거래분석원’(가칭)을 연내에 설치하겠다고 어제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밝혔다. 지난달 10일 문재인 대통령이 ‘부동산 시장 감독기구 설치 검토’를 지시한 데 따른 후속 조치다. 홍 부총리는 지난달 20일 “너무 성급하게 결정할 사안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라고 했으나 180도 말을 뒤집었다.

정부는 국토부 산하 ‘부동산시장 불법행위 대응반’을 확대 개편하는 방식으로 상시 기구를 설치하겠다고 설명했다. 당초 ‘부동산 감독원’ 등의 기구명이 거론됐지만 시장을 통제하는 곳이라는 색깔을 빼려고 ‘부동산 거래 분석원’으로 이름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개인의 금융, 과세 정보를 뒤져볼 수 있는 계좌추적권 등 수사권을 가진 강력한 부동산 시장 상설 통제기구를 만든다는 점에선 달라진 게 없다. 정부는 곧 이를 위한 입법 절차에 착수할 방침이다.

국토부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부동산국과 영국 경쟁시장국(CMA)을 신설 기구의 유사 사례로 소개했다. 하지만 국회 입법조사처는 “캘리포니아주 부동산국은 부동산중개인 면허관리 등 업무를, 영국 CMA는 주택소비자를 위한 가격 책정의 공정성 감독 업무를 하고 있을 뿐 부동산 시장 감독기구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권 시절 만들어진 ‘공정가격감독원’ 외에 정상적인 국가에서 개인 간 부동산 거래를 통제하는 감독기구를 찾지 못하자 일반인은 확인하기 어려운 외국 사례를 적당히 끌어대 눈속임하려다 들통 난 것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정책 실패의 책임을 실체가 불분명한 투기·교란세력 탓으로 돌리는 데 집착하다 결국은 모든 부동산 거래를 감시하는 ‘부동산 경찰국가’의 길로 들어서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제기한다. 이미 정부의 시장 개입이 도를 넘은 상태에서 사인 간의 모든 부동산 거래에서 오가는 자금 흐름 등을 낱낱이 권력이 들여다보게 되면 개인의 재산권과 사생활 침해 논란은 피할 수 없다. 이 기구가 객관성, 중립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심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국의 부동산 시장은 이미 정상 궤도를 이탈했다. 징벌적 증세, 대출억제, 분양가상한제, 임대차보호법 등 온갖 누적된 규제로 주택 공급이 줄고 거래가 위축된 가운데 가격은 더욱 치솟고 있다. 무소불위의 감독기구는 이렇게 왜곡된 시장을 바로잡기는커녕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부동산감독기구#부동산거래분석원#계좌추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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