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신 황제’의 꿈은 이루어진다[글로벌 이슈/하정민]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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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위대한 러시아’의 향수를 자극하는 전략으로 정적 탄압, 코로나19 부실 대처 등의 논란에도 종신 집권 발판을 마련했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위대한 러시아’의 향수를 자극하는 전략으로 정적 탄압, 코로나19 부실 대처 등의 논란에도 종신 집권 발판을 마련했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하정민 국제부 차장
하정민 국제부 차장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꿈에 나타나 두 가지 조언을 했다. “적을 모두 죽이고 크렘린궁을 파랗게 칠하라.” 푸틴이 물었다. “왜 푸른색이죠?” 스탈린의 답이 걸작이다. “첫째 조언은 반대하지 않을 줄 알았어.”

푸틴의 권위주의 통치 방식에 대한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신랄하고 섬뜩한 비평이다. 블랙 유머로 치부하기엔 집권 20년간 사라진 그의 반대파가 너무 많다. 총격, 탈륨 및 폴로늄 중독, 폭발, 의문사 등 죽음에 이른 방식도 제각각이다. 민주주의 전통이 서구보다 약하다지만 러시아 역시 대통령을 직접선거로 뽑는 21세기 문명국이다. 전제군주 시절이라 해도 군왕의 정적이 이 정도로 무더기 공개 암살을 당했다면 민란이 일어났어도 이상하지 않다.

현실은 어떨까. 되레 지지율이 오른다. 여론조사회사 레바다센터가 지난달 27일 발표한 푸틴의 8월 지지율은 66%로 올 들어 가장 낮았던 4월(59%)보다 높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100만 명을 넘고, 메르스 백신을 살짝 바꿔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했다 우겨대고, 8월 한 달에만 알렉세이 나발니와 예고르 주코프 등 2명의 반체제 활동가가 테러를 당해도 최소 60%의 콘크리트 지지층이 있다는 의미다. 대체 왜?

가디언 등은 서방에 뒤처졌다는 ‘열등감’과 대국의 ‘자존심’을 동시에 지닌 러시아의 특성을 교묘히 이용한 결과라고 분석한다. 포르투갈 등이 신대륙 탐험에 나서던 15세기 러시아는 제국(帝國)에 공물을 바치는 공국(公國)에 불과했다. 17세기 말∼18세기 초 표트르 대제가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이미 서유럽보다 200∼300년이 늦었다. 19세기에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과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도 지배층이 모국어 대신 프랑스어를 썼다.

이를 한 방에 날려준 사람이 레닌과 스탈린이다. 최초의 공산혁명을 주도했고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의 상당 부분이 영토로 편입됐고 국가는 개개인의 후견인 노릇을 했다. 표트르 대제에 이어 두 번째로 ‘위대한 러시아’의 자부심이 각인된 시기였다.

소련이 무너지고 친서방 노선을 편 ‘알코올 중독자’ 보리스 옐친이 권좌에 있던 1990년대는 악몽이었다. 국가 부도로 빈곤과 범죄가 만연했고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은 추락했으며 체첸 등 소수민족 테러도 기승을 부렸다. 이 와중에 떼돈을 번 신흥 재벌 ‘올리가르히’는 향락을 즐겼다. 이때의 악몽으로 러시아에는 ‘서방’ ‘민주주의’ 등을 가난, 혼란, 부패의 동의어로 인식하는 이가 적지 않다. 보리스 넴초프 전 부총리 등 푸틴의 정적은 대부분 옐친계여서 국민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들은 집권하자마자 올리가르히를 숙청하고 체첸과 마피아를 제압한 푸틴을 질서와 규율의 상징으로 인식한다. 그 과정에서 푸틴 정권이 자행한 각종 인권 침해를 모를 리 없지만 ‘러시아의 자존심을 살린 공이 과보다 더 크다’고 여긴다는 의미다.

푸틴 역시 ‘혼돈에 빠진 러시아를 구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전략적으로 내세운다. 특히 스탈린 미화 같은 ‘역사 세탁’에 열심이다. 그는 2년 전 스탈린 탄생 140주년을 맞아 곳곳에 동상을 세우고 추모 행사를 열었다. “스탈린을 악마화하려는 시도는 러시아를 공격하려는 서방의 음모”라고도 주장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스탈린의 철권통치가 불가피했듯 서방의 인권 탄압 비판이 거세지는 지금 자신의 반대파 척결 또한 자연스러운 수순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7월 개헌을 통해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집권할 기반을 마련한 그가 언제까지 권좌를 지킬까. 올해 68세인 그는 2018년 기준 러시아 남성의 평균 수명(66.4세)을 이미 넘어섰다. 그의 궁극적 목표가 레닌, 스탈린처럼 죽을 때까지 권좌를 지키고 사후 밀랍인형으로 안장되는 지도자로 남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변변한 야권 지도자 한 명 없는 현실을 감안할 때 본인 건강만 유지하면 종신 집권 자체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분명한 점은 영원한 권력은 없으며 종신 집권에 성공해도 그에 대한 평가가 찬양 일색은 아닐 것이란 사실이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종신 황제#소련#독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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