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열심히 살면 몸에 안 좋아[이승재의 무비홀릭]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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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괴물’의 한 장면. 봉준호 감독은 왜 괴물 영화의 제목을 ‘괴물’이라 허접하게 붙였을까? 쇼박스 제공
영화 ‘괴물’의 한 장면. 봉준호 감독은 왜 괴물 영화의 제목을 ‘괴물’이라 허접하게 붙였을까? 쇼박스 제공
시대에 따라 단어가 갖는 가치도 달라져요. ‘근면’ ‘자조’ ‘훈육’ ‘노력’ ‘최선’ ‘승리’ 같은 단어는 요즘엔 꼰대들이나 쓰는 말이죠. ‘더불어’ ‘함께하는’ ‘나눔’ ‘연대’ ‘열린’ ‘가치’ ‘공유’ ‘치유’ ‘화해’ 같은 단어들이 멋져 보여요. ‘협동’ 같은 단어도 왠지 쌍팔년도 느낌이 팍팍 풍기지요. “나를 사랑해요” “나 스스로를 위로해요”가 훨씬 있어 보여요.

제가 최근 들은 최고로 감동적인 말은 트로트 천재 정동원의 “할아버지.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예요. 부모 이혼 후 자신을 키워준 할아버지에게 한 말이었는데, 요즘에는 ‘키워준다’는 개념이나 인식 자체가 사라져가는 시대이니까요. 내가 낳아달라고 사정한 것도 아닌데, 어쩌다 낳았으니 자식을 책임지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말이지요. 마찬가지 이유로 “학교 다녀왔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같은 말들도 신세대 사이에선 멸종위기예요. 부모 입장에선 “옴(다녀왔습니다)” “감(다녀오겠습니다)” 같은 말이나 자녀에게 들으면 감지덕지지요.

얼마 전 막을 내린 TV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김희애가 아들에게 “준영아”라고 이름을 부르는 대신 말끝마다 “아들, 아들” 하는 대목도 요즘 엄마들의 서러운 초상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아요. 이 시대 엄마들 입장에선 이놈의 아들들에게 소외당할까 봐 얼마나 두렵기에 아들, 아들 하고 신줏단지 모시듯 귀하게 부르면서도 내심으론 ‘너는 내 아들이고, 나는 네 엄마야’라는 상하 혹은 소유 관계를 확인하려 들겠어요? 아들 하고 부르는 건 알고 보면 참 이상해요. 반려견에게도 우리는 “자두야” “해피야” 하고 이름을 부르지 “개, 개” 하고 일반명사를 쓰진 않잖아요? 그래서 아들 소리 듣고 자라난 요즘 남자들의 문제점을 꼬집는 다음과 같은 명대사도 ‘가장 보통의 연애’란 한국 영화엔 나와요.

“요즘 남자들이 딱 아들, 아들 소리 듣던 끝물이잖아? 이전 세대들은 집안의 기둥이다 뭐다 해서 책임감이나 참을성이라도 길렀지. 얘네는 그냥 귀하게만 자랐거든. 그러니까 결혼할 때도 집과 혼수는 딱 반반씩 해야 한다고 하면서, 맞벌이라도 집안일은 여자가 해야 한다고 하는 놈들도 나오는 거고.”

바로 이런 맥락에서 봉준호 감독이 ‘괴물’이라는 일반명사를 영화 제목으로 쓴 행위가 얼마나 탁월한 선택이었는지를 새삼 확인하게 되어요. 보통 괴수 영화는 ‘고질라’ ‘클로버필드’ ‘쥬라기공원’ 같은 고유명사를 제목으로 내세워 관객들을 낚으려 하잖아요? 봉준호가 괴물이란 허접한 일반명사를 제목으로 삼은 것은 우리 관객에게 괴물에 관한 고정관념을 미리 심어주기 위한 영리한 장치였지요. 괴물 영화의 제목이 괴물이라니! 그래요. 봉준호는 우리가 수없이 보아온 괴물 영화들의 장르 문법을 떠올리면서 이 영화를 대해 주길 바랐던 거죠. 왜냐하면 첫 등장부터 휴일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전신을 다 까버리는 전대미문의 괴물을 통해 봉준호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집고 뒤통수를 사정없이 때려버릴 참이었으니까요. 맞아요. 봉준호의 괴물은 가장 보통의 괴물인 체하는 가장 특별한 괴물이었어요. 한강의 기적, 고도성장이라는 찬란한 역사의 뒤안길에 잉태된 우리 마음속 괴물을 의미하는 메타포이니까요.

어쩌면,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속에서 괴물은 특히나 잘 자라나는 것 같아요. 요즘 일본이 우리에게 하는 짓을 보면 그들을 미워하고 그들의 물건을 사지 않는 운동이 일어나는 건 당연하게까지 보이지만, ‘모여라 동물의 숲’(동물의 숲)처럼 서정적이고 치유적인 게임까지 일본 것이라고 무조건 배척하는 일은 다시 생각해 봤으면 해요. 청소년들이 몰입하는 게임은 주로 싸우거나 죽이거나 땅을 차지하거나 경쟁하는 내용이에요. 하지만 동물의 숲은 남과 다투거나 남을 앞서도록 부추기지 않아요. ‘더불어’가 있고, ‘연대’가 있고, ‘치유’가 있어요. 시간 제약 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무인도를 가꾸고 남이 가꾼 곳을 방문하며 살아가는 내용이지요. 귀여운 동물 캐릭터들과 소통하면서 섬과 집을 꾸미고, 낚시를 하거나 식물을 키워요. 코로나19로 집 밖에 나가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요즘 얼마나 많은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게임이라고요. 동물의 숲에서 마주치는 속정 많은 동물 캐릭터들은 어떤 영화보다도 감동적이고 문학적인 말과 편지글로 힘과 위로를 선물해줘요. 이렇게요.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두 가지 모두 최선을 다해야 해.” “이 섬에서 있었던 즐거운 추억을 가방에 꽉꽉 담아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딜 거야.” “감사하는 마음을 절대로 잊고 살아선 안 돼. 안 좋은 사건조차도 나를 성장시켜 주는 기회가 될 수 있거든. 참고 견디는 것도 인생이야.” “가끔 게으르게 사는 건 어때? 삐딱하게 구는 건 좋지 않지만, 너무 성실한 것도 좋지 않대. 나 원 참. 세상 살기 참 힘들지 않니? 너는 늘 활기차게 지내긴 하지만 너무 열심히만 살면 몸에 안 좋아.”

어때요. 신세대가 듣고 싶은 말과 들어야 할 말이 황금비율로 버무려져 있지요? 코로나19는 남을 미워할 시간은커녕 나 자신을 사랑할 시간도 얼마 남아 있지 않음을 일깨워주고 있어요. “행복해지는 건 간단해. 내가 가진 걸 사랑하면 돼”라는 영화 명대사처럼 남에게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세계 속에 밭을 일구고 가꾸는 일이 진짜 행복 아닐까요? ‘개통령’ 강형욱도 영화보다 영화적인 이런 말을 남겼답니다.

“개에게서 행복을 찾지 말라. 스스로 꿈을 꾸고 행복해져야 한다. 반려견과는 그 꿈과 행복을 나누는 사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
#영화 괴물#부부의 세계#동물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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