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권영민]대학 구조조정과 인문학의 위기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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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위기는 세상 변화에 눈감은 스스로의 책임도 커
美 日 유럽 대학은 자체 구조조정 통해 살아갈 길 모색
높은 배타적 담장도 허물어야 한다

권영민 문학평론가·단국대 석좌교수
권영민 문학평론가·단국대 석좌교수
대학의 구조조정과 정원 감축 문제가 대학가를 긴장시키고 있다. 대부분의 대학이 긴 겨울방학 동안 교수들을 동원하여 묘책을 찾아내기 위해 힘쓰고 있다. 정부에서 ‘대학구조개혁법’까지 추진하고 있으니 이제는 당국이 들이대고 있는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할 방도가 없어 보인다. 그동안 문제가 되어온 기초학문의 위기 또는 인문학의 위기 문제까지 여기에 겹쳐져 있으니 어떤 방식으로 사태를 풀어낼 수 있을지 암담하기만 하다.

돌아보면 인문학의 위기는 우리네 현실의 문제만은 아니다. 실용학문을 중시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 미국의 경우를 보면, 1980년대 이후 대학마다 인문학 분야가 크게 위축되고 있는 현상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인문학의 본고장으로 자부했던 유럽의 경우도 형편은 마찬가지다. 우리보다 긴 대학 교육의 역사를 가진 일본에서도 인문학의 위기를 지적하는 여러 논의들이 등장한 지가 이미 오래다. 나라마다 그 정도는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대학 자체의 구조조정을 통해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다.

한국의 경우는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던 대학 교육의 확대 정책이 복잡하게 문제를 키웠다고 할 수 있다. 대학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돈을 별로 들이지 않고 인문학 분야의 학과를 증설하고 학생 수를 늘렸다. 그리고 이런 추세를 그대로 따라 대학원 과정도 더 커졌다. 기초학문으로서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학자들도 학문 후속 세대의 양성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대학원의 정원을 늘리는 데에 힘을 보탰고 각종 연구 사업도 대학원생의 연구 활동을 지원하는 데에 상당한 연구비를 지출했다.

그 결과로 현장의 수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박사학위를 양산하게 되었다. 인문학 분야는 제대로 된 국책 연구기관도 없고 기업의 부설 연구소도 없다. 대학 이외에는 이들 고급 인력이 자기 분야의 전문적인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자리가 거의 없다. 형편이 이러니 실력 있는 젊은 박사들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시간강사 자리만이라도 붙잡고 있으려고 연연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동안 정부에서는 기초학문으로서의 인문학 육성을 위해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어 온 것이 사실이다. ‘BK사업’이니 ‘HK사업’이니 하는 국책 연구 사업 가운데에는 상당 부분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내세워졌던 것들이 많다. 그런데도 지난 십수 년 동안 인문학이 발전하기는커녕 점점 깊은 위기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느낌이다. 세상 변화를 탓하고 국가 교육 정책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에 여전히 열을 올리는 인문학자들이 있지만, 이것은 급변하는 세상을 탓할 일도 아니고 정치를 욕할 일도 아니다. 세상의 변화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채 자기 울타리에 갇혀 있던 인문학이 자초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인문학 자체 내에서 찾아야만 한다. 인문학 분야 안에서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장기적인 구조조정 계획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더 이상 인문학의 영역은 확대될 수 없으며, 현상의 유지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인문학은 양적 확대로 그 학문적 위상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문학은 그 학문적 수준을 높이고 그 깊이를 더하는 질적 성장을 통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 주요 대학마다 매년 수십 명씩 선발해 온 대학원생을 대폭 축소하고 분야마다 높게 쌓아둔 담장을 헐어내야 한다. 자기 전공 분야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담장을 높게 쌓아둘 것이 아니라 타 학문과의 융합과 연계를 통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 교육 당국도 기초학문의 지속적인 발전을 고려하면서 대학의 구조조정 방향을 정해야 하고 대학이 스스로 그 방향을 결정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모두가 고통을 분담하지 않고 어떻게 함께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권영민 문학평론가·단국대 석좌교수
#인문학#대학 구조조정#대학구조개혁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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