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종훈]방임은 학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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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훈 정책사회부장
이종훈 정책사회부장
한참 공기놀이에 빠져 있고 ‘○○○스타카드’를 들고 친구들과 깔깔거려야 할 5학년생은 온데간데없다. 11세의 16kg 소녀. 어떻게 가능한 몸무게인지 보지를 못해 알 수도 없다.

많은 이들이 아동학대 부모에 대한 처벌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방임을 자율이나 사랑과 비슷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부모와 교육자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고 본다.

나에겐 서울 서초구의 초등학교에 다니는 4학년 딸과 1학년 아들이 있다. 아내가 최근 평소대로 아침에 학교 정문 앞에서 둘째와 포옹을 하고 들여보냈더니 여자 교감선생님이 불러 이렇게 말을 했단다. “아직도 아이 등하굣길에 오는 게 좋아 보이지 않는다. 혼자 등교하는 다른 아이들이 보면 댁의 아이를 ‘마마보이’로 놀리거나 왕따를 시킬 수 있다. 특히 교문 앞에서 아이와 포옹을 하거나 볼뽀뽀 같은 건 하지 마라. 원하면 집에서 하고 아이는 혼자 보내라.”

기자의 파리특파원 시절부터 아이들을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데려다줬던 아내는 어처구니가 없어 “1학년 아이를 혼자 등하교시키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단다. 1학년생이 부모 또는 부모가 지정한 보호자 없이 등하교를 하는 건 프랑스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최근 서초구의 한 아파트에서 초등학교 5학년 여학생이 1층 주차장에 떨어져 숨졌다. B 양의 집에서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이 담긴 자필 유서가 발견됐다. B 양의 부모는 이혼한 상태였고 B 양의 엄마는 일을 하고 있었다. 친구들에 따르면 B 양은 학원 등을 혼자 다니고 집에서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근처에 사는 이모가 종종 챙겨줬지만 엄마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B 양의 친구들은 “부모가 헤어진 게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먹고살기 위해서였지만 자식을 방치한 대가는 너무 컸다.

아동학대는 △신체학대 △정서학대 △성학대 △방임 △(2가지 이상의 학대가 동시에 이뤄지는) 중복학대 등 5가지로 분류된다.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에 따르면 2014년에 1만27건의 아동학대 건수가 집계됐는데 중복학대(4814건)를 빼면 단일 학대로는 방임(1870건)이 가장 많다. 단일 학대로는 10년 동안 1위다.

방임은 다시 물리적 방임, 교육적 방임, 의료적 방임, 유기로 나뉜다. 물리적 방임은 기본적 의식주를 제공하지 않거나, 불결한 환경 또는 위험한 상태에 아동을 방치하는 행위, 아동을 집에 두고 가출한 경우 등을 말한다. 교육적 방임은 이유 없이 아동을 학교에 보내지 않거나 무단결석을 방치하는 것. 의료적 방임은 아동에게 필요한 의료적 처지 및 개입을 하지 않는 행위다. 아동을 버리거나 병원에 입원시키고 사라지는 유기는 당연히 큰 학대다.

부끄럽지만 나는 A 양 사건 기사를 다루는 부서장이 되기 전까지 방임이 학대의 한 종류인지조차 몰랐다. 그런데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걸 아는 교육자라면 학부모에게 버젓이 “1학년생을 혼자 등교시켜라”라거나 “학교 앞에서 아이에게 애정 표현을 하지 마라”라고 말할 수 있겠나.

그래서 부모와 교육자 모두에게 학대 예방을 위한 체계적 교육이 필요하다. 학대의 가장 큰 주범은 친부모로 약 80%를 차지한다. 부모 외에 어린이를 가장 많이 돌보는 사람은 교사다. 바꿔 말하면 부모와 교사가 ‘방임이 학대’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아동학대를 근절할 수 없다는 얘기다. 부모와 교육자의 의식과 생각을 바꾸는 것이니 제도 개선이 필요하고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가장 근본적인 길이다.

이종훈 정책사회부장 taylor5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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