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리포트]정상기업 키울 돈이 좀비기업으로… 경기부양 ‘밑빠진 독’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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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좀먹는 ‘좀비기업’]정책금융이 되레 ‘성장 걸림돌’

#1 15일 경기 광주시 A가구공장. 공장 마당에는 납품을 기다리는 아파트용 붙박이장들이 포장비닐에 먼지가 뿌옇게 쌓인 채 놓여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공장에서는 직원들이 한두 명씩 빠져나왔다. 이 공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건설경기 침체와 함께 극심한 경영난에 시달리며 직원을 절반으로 줄였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도 어려워진 이 회사는 올해 3월 경기도에서 운영자금 2억 원을 지원받았다. 하지만 이 돈으로 밀린 직원들의 월급과 은행 대출이자 등을 갚고 나니 남는 돈이 없었다. 이 회사의 최모 사장은 “정책자금으로 버티고 있지만 회사 사정은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다”며 “정부 돈으로 인공호흡이나 하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2 2012년 4월 전남 영광군의 B기업은 같은 산업단지 내에서 공장을 옮긴다며 군청에 기업이전 입지지원 보조금을 신청했다. 이 기업은 공장을 담보물로 제출했지만 공장은 이미 근저당이 설정돼 담보 가치가 사라진 상태였다. 사장은 평소 친분이 있던 영광군 공무원 C 씨에게 넌지시 보조금 지원을 청탁했고, C 씨는 5억7000만 원가량을 부당하게 지원했다. 2013년 3월 B기업은 시설투자를 한다는 명목으로 또다시 보조금을 신청하면서 역시 근저당 설정으로 담보 가치가 없는 임야를 담보로 제출했다. C 씨는 위와 같은 사실을 숨긴 채 상급자들에게 결재를 받아 추가로 보조금 15억 원을 지급했다.

회생 가능성이 희박한데도 정부 지원으로 수년째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는 기업들이 한국 경제 전반에 큰 부담을 주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경기침체가 이런 좀비기업 증가의 가장 큰 이유지만 그보다는 중소기업에 대한 정부의 각종 지원책과 보증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고, 이에 대한 감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중소기업 지원책만 557개, 지원금은 ‘눈먼 돈’

관계 부처에 따르면 현재 중소기업으로 인정만 받으면 창업기업지원자금, 신성장기반자금, 기술애로 멘토링지원사업 자금 등 40여 개에 이르는 정책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 또 중소기업청을 비롯해 각 정부 부처와 지자체들이 내놓는 중소기업 지원정책만 해도 557개에 이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누적된 적자로 당장 문을 닫아도 이상할 게 없는 좀비기업들이 정부 지원에 잘만 의존하면 생존이 가능한 상황이다. 이런 중소기업들은 기술혁신으로 사업을 키우기보다 ‘눈먼 돈’인 정부 예산 따내기에만 골몰하면서 온갖 혜택을 누리려 한다. B기업의 사례처럼 서류 조작, 담당 공무원에 대한 로비 등 불법, 편법이 판을 치는 이유다.

특히 정부의 연구개발(R&D) 지원자금은 좀비기업의 좋은 ‘먹잇감’이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정부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중소기업을 상대로 2만6012개의 R&D 사업을 지원했는데 지원받은 기업 수는 1만5935개다. 35%가 2회 이상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려 42차례나 R&D 사업 지원을 받은 기업도 있었다.

한 중소기업의 연구담당 직원은 “많은 기업들이 사업과 무관한 거창한 과제를 해보겠다고 제안서를 내지만 막상 과제를 따낸 뒤에는 제안서와 상관없는 기존 사업을 진행한다”며 “그럴듯하게 포장만 하면 심사는 쉽게 통과할 수 있다”라고 털어놨다.

정책금융기관의 중복 지원도 심각하다. 금융연구원에 따르면 2013년 말 현재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기업은행의 기업 대출 잔액 200조 원 가운데 약 36%는 중복 대출이었다. 이런 현상은 창조경제, 기술금융 등 국정과제의 실적을 채우기 위해 정부 부처들이 각종 정책을 남발한 결과이기도 하다. 정대용 숭실대 교수는 “중소기업 지원정책은 유효기간이 1년에 불과한 근시안적 대책이 많다”며 “당장 성과를 내야 한다는 관료들의 강박 때문”이라고 말했다.

○ 정상적인 기업의 고용·투자도 막아

국민 세금에 의존하는 부실기업이 많아지면 정상 기업의 고용·투자 감소, 산업 구조조정 지연 등의 과정을 거쳐 전반적인 경제성장률의 저하로 이어진다. 또 재정 지출 확대나 금리 인하 등 정부 정책의 비효율성도 커진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정부가 아무리 돈을 풀고 금리를 내려도 경기부양 효과가 반감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한계기업들의 퇴출이 지연되면 경제 전반의 역동성도 저하된다. ‘정부 지원→기술 혁신 성공→중견기업 또는 대기업으로 성장’이라는 선순환 대신 ‘정부 지원→적자 보전하며 연명→기업 경쟁력 약화→정부의 추가 지원’이라는 악순환에 빠진다는 뜻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한 산업 내 좀비기업의 자산 비중이 높을수록 정상 기업들의 고용과 투자가 위축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보고서를 냈다. 또 현재 15.6%로 추정되는 부실기업의 자산비중을 5.6%로 낮추면 새로운 일자리 11만 개가 생길 것이라고 추산했다.

전문가들은 실적이 좋은 일부 대기업들을 제외하고 분석할 경우 한국 경제의 부실기업 문제가 훨씬 더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지언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그동안 삼성, 현대 등 우량 대기업의 실적 때문에 부실기업의 문제가 가려져 온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세종=손영일 scud2007@donga.com / 송충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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