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응준]지금 우리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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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준 소설가
이응준 소설가
간혹 이런 질문을 받곤 한다. “작가의 상상력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때 보통 내가 대답 대신 쓴웃음만 짓고 마는 것은,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이란 게 도리어 우리 모두의 괴로운 질문이 되고 마는 까닭이다.

고된 원고를 넘긴 뒤 작업실 앞 작은 술집에 혼자 앉아 한두 잔 마시는 생맥주는 작가의 천국이다. 지난밤 내가 그런 열락(悅樂)을 누리고 있은 지 삼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왼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노인 한 분과 뺀질뺀질하게 생긴 중년 사내 둘이 내 옆자리에서 마주 앉았다. 금치산자 분위기가 풍기는 노인은 한눈에도 알코올의존자였고, 흰자위를 희번덕대며 해실거리는 두 중년 사내는 작업실 부근 원룸을 부랑아처럼 들락거리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노인과 두 중년 사내는 서로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이 하는 모양과 대화를 그대로 보고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요는 중년 사내 둘이 마치 약에 취한 듯 몽롱한 노인을 깐족깐족 조롱해가면서 음식을 시켜 게걸스럽게 먹고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다가는 이윽고 노인에게서 지갑을 건네받듯 빼앗아 거기서 꺼낸 돈으로 계산을 하는 거였다. 그것은 명백한 금품 갈취였다. 나와 두 중년 사내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을 때 아까부터 금이 가고 있던 나의 천국은 지옥 불에 사그라져버렸다. 나는 인간에 대한 환멸에 막막한 살의를 느꼈다. 설혹 그들이 출세한 부자들이었다고 하더라도 역시 서로 사기를 치고 착취하고 학대하였을 것이므로 이것은 자본주의 계급에 관한 일화가 아니다. 성선설과 성악설 같은 거창한 테마는 더더욱 아니다. 깊은 밤 그렇게 영혼이 거덜 나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사이버 공간과 현실에는 공히 그토록 정의로운 사람들,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데 어째서 이 사회는 한 치도 나아지지 않고 점점 더 곪아가고 있는 것일까? 내 눈과 귀가 잘못된 것일까? 나는 차라리 그랬으면 싶었다.

내가 존경하는 어느 시인 형은 나와 단둘이 술을 마시다가 내가 세상에 대한 어떤 희망을 말하면, “또, 또, 사람한테 기대를 건다. 응?” 이런 식으로 나를 나무란다. 그것은 사람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라, 스스로의 사랑의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지 말라는 걱정일 게다. 인간은 인간을 잡아먹는 동물보다도 못한 속물이다. 우리 모두는 예수를 배반하는 베드로와 같은 자들이다. 감히 누가 장애노인을 등쳐먹는 저 버러지들의 모습이 그 어떤 처절한 처지에서라도 자신 안에는 없다고 자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에 대한 회의(懷疑)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고 만 것은 아닐까? 지금 대한민국의 개혁 과제들이 산처럼 쌓여 썩어가고 있는 것은 우리가 선과 악에 대하여 너무 단순하게 생각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도저히 타협이 불가능한 괴물이 돼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정치 논의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이념이라는 전도몽상(顚倒夢想)에 휩싸여 있는 대한민국은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은 이에게는 지옥이다. 대중이 글을 글이 아니라 변기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글로도 소통이 이 지경인데 말이 말같이 오갈 리 만무하다. 역사가이자 사회비평가 크리스토퍼 래시는 지금 진보에게 필요한 것은 한계를 명확하게 직시하는 ‘서민의 철학’이라고 주장한다. 삶의 고통과 한계에 승복하고 끊임없이 성찰하는 서민적 영웅들이야말로 미래를 이끌어 나갈 주역이라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과신을 버려야 체제가 역할을 다하는 법이다.

작가의 상상력이 뭐냐고? 이제 나는 우리 모두의 괴로운, 그러나 소중한 질문이 돼야만 하는 이 대답을 밝히고자 한다. 작가의 상상력, 곧 문학의 상상력이란 인간의 악행에 대한 상상력, 즉 인간의 어둠에 대한 상상력이다. 이는 절망으로 이어진 비관이 아니라 희망을 선택하기 위한 과학과 이성의 예술적 판단인 것. 인간을 사랑해서 천국을 건설할 것처럼 떠들어대는 자들을 믿지 마라. 인간은 악마의 배다른 동생이며 천국은 가장 사악한 사기다. 진보를 향한 모든 노력은 인간에 대한 환멸을 보석처럼 품고 있어야 한다. 우리 안의 그 어둠이 우리의 양심과 겸손을 비추는 맑은 거울이 될 때 비로소 우리가 만든 이 사회와 국가가 이념이라는 위선의 덫에 걸려 죽어가지 않고 인간의 선함을 역사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이나마 증명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응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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