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응준]지금 우리에게 통일 대한민국이란 무엇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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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준 소설가
이응준 소설가
박근혜 대통령이 ‘통일 대박론’을 발표했을 적에 나는 상전벽해(桑田碧海) 속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요즘이야 ‘북한 붕괴’가 유행어가 돼 버렸지만 2008년 그 여름과 초겨울 사이 내가 부산의 한 숙박업소에 틀어박혀 대한민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흡수 통일한 뒤의 사회를 그린 장편소설 ‘국가의 사생활’을 쓸 때만 하더라도, 이 나라의 어느 자리에서건 ‘통일 대한민국’은커녕 ‘통일’이라는 소리를 입에만 담아도 뭐가 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더랬다.

나는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대통령의 어젠다에 불만이 없었다. “통일은 매우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엄청난 고통을 기어코 이겨 낸다면 통일 대한민국은 유사 이래 이 민족 최대의 번영을 구가할 것입니다”는, 정치가의 어젠다로서는 너무 길고 번잡하니까 말이다. 또한 긍정 일변도의 강력한 통일 어젠다를 던져야만 주변국들을 포함한 전 세계가 대한민국의 통일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일말의 오판 없이 인식할 게 아닌가. 그렇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이후로는 최악을 향해 가고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의 국론 분열은 통일관에 와서는 파멸 지경이다. 남한과 북한이 영속적으로 양립하거나 진화하듯 통합되는 일은 더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누가 통일에 대해 그 어떤 금강석 같은 ‘당위’를 설파하든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통일 대한민국’ 말고는 그 어떤 통일 방식도 한낱 망상일 뿐이라는 뜻이다. 역사라는 ‘물질’은 인간이 바라는 대로만 굴러가는 게 아닌 데다가 필경 한반도의 통일은 블랙코미디가 가미된 자연재해의 외형을 지닐 것이다. 이는 이념이나 역사관의 문제가 아니다. 재난 대비의 차원인 것이다. 한반도 통일에 대한 ‘눈 가리고 아웅’은 중단돼야 한다. 국민이 통일에 대한 생각 자체를 무의식 안에서 거부하는 심리적 방어기제에 중독돼 있으니 더욱 그렇다. 국가는 전체주의의 육체가 돼서도 안 되지만, 역사 현실의 눈보라 앞에서 제 국민 모두를 스스로의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만드는 죄를 범해서도 안 된다.

내가 ‘통일 대한민국’을 소설적 배경으로 설정했던 까닭은 남한의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모순과 갈등을 낯설게 성찰해 보자는 의도였다. 그러한 우리 내부의 어둠은 우리와는 모든 면에서 1세기나 동떨어지게 돼 버린 북녘 동포들의 상처와 만나 확대 재생산돼 갖가지 ‘증오와 폭력’으로 흑사병처럼 창궐하게 될 것이다. 절망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기에, 통일에 대한 벅찬 희망만큼이나 통일에 대한 ‘비극적 상상력’ 또한 요긴하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통일 이후에 벌어질 끔찍한 사태들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없다. 통일 이후에 대한 면역력을 키우는 ‘과학적 비관의 실용’을 정부가 전혀 제공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적대적 관념론자들이 몽롱한 허세로 뒤섞인 저 ‘통일준비위원회’라는 위험천만한 모임은 ‘통일 한반도’를 두고서 ‘판타지 월드 도면 그리기 놀이’와 다름없는 ‘헛된 사업들’에 골몰하고 있다. ‘통일과 그 이후’ 같은 절체절명의 미래는 ‘대박 합의’에 의해 설계되는 게 아니라, 만 명 중 단 한 사람의 의견이 정말 진정한 지혜라면 구천구백구십구 명의 개소리들 대신에 오직 그것이 선택돼야만 하는 것이다. 통일준비위원회가 준비하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통일의 절망 쪽에서도 희망 쪽에서도 사용되지 못한 채 혼돈 속에서 사그라지고 말 것이다. 통일은 대박(희망)이니 쪽박(절망)이니 하는 관념이 아니라, 희망보다 난해하고 절망보다 절망적인 ‘혼돈’이라는 ‘현상(現象)’이어서, ‘통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사생활’을 단 한 사람의 국민이라도 더 미리 성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어떤 거대한 환란도 인내의 시스템 안에서 사랑으로 승화시켜 승리할 수 있다.

독일의 인구에, 프랑스의 군사력에, 영국만큼의 영토와 경제력을 가진 통일 대한민국이 공짜로 얻어질 리 만무하다. 빛과 어둠을 함께 지불해야만 불안한 미래를 참된 오늘로 살아갈 수 있음은 개인이나 국가나 마찬가지다. ‘통일’ 앞에서 우리 각자가 ‘실증적인’ 용기를 발휘하지 못할 때 우리의 국가 역시 우리 모두를 따라 망해 갈 것이다. 조만간 세계사는 채 마무리 짓지 못한 자신의 20세기를 이 한반도 안에서 마저 혹독하게 실험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응준 소설가
#통일#통일 대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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