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하태원]러시아는 없다

하태원 정치부 차장 입력 2014-11-04 03:00수정 2014-11-0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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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원 정치부 차장
이 정도인 줄 몰랐다.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것’이라는 수준의 말이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지난달 30일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러-한 소사이어티 주최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러시아 포럼은 수교 24주년을 맞은 양국 관계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1999년 시작해 13회를 맞은 친선포럼 자리였지만 처음부터 ‘화기애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수로 서해에 있던 어뢰가 터져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보고서가 있으니 5·24제재 조치는 당연히 해제해야 한다.”(아스몰로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한국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

“김정일이 금강산 사고와 관련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는데 미국 압력 탓에 6년 넘도록 관광이 재개되지 않고 있다. 한국 관광객이 사망한 곳이 금강산뿐이냐.”(수히닌 전 주북한 러시아대사)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한다면서 북한 인권 문제를 그렇게 다루면 어떻게 하나. 남북 간 선전 선동 안 한다고 합의해 놓고 삐라를 날리면 되겠나.”(제빈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한국연구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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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북한이 (핵개발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이바셴초프 전 주한 러시아대사)

‘지한파’라는 사람들의 어이없는 발언에 당황한 한국 참석자들의 얼굴은 잔뜩 굳어졌다.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에 암묵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한국에 불편한 감정을 가질 수야 있지만 대놓고 북한을 두둔하는 태도는 당혹스러웠다. 이 같은 상황을 방치했다는 점에서 외교 실패라는 지적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4강의 틈바구니라는 지정학적 운명에 순응해 지나치게 저자세 외교로 임한 탓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박근혜 대통령이 들으면 화를 낼 일이지만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동북아평화협력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등 3대 대외정책 기조를 설명할라 치면 “정권 바뀌면 어차피 폐기될 정책 아닌가”라는 냉소적 발언도 자주 나온다고 한다. 정도 차가 있지만 미중일에서도 종종 나오는 반응이다.

2010년 송영길 당시 인천시장은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공격을 받은 뒤 스스로 수장(水葬)의 길을 택한 러시아 전함 ‘바랴크’의 깃발을 대여했다. 2012년 또다시 대여 기간을 2년 연장했지만 러시아는 영구임대라고 본다. 러시아 제국의 상징이자 애국심의 화신 격인 바랴크함 기(旗)를 돌려줄 생각은 더더욱 없다고 한다.

송 전 시장의 가슴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수여한 훈장이 남았겠지만 국가와 상의 없이 내린 그의 독단적 결정은 아쉬운 대목이 있다. 이젠 야인이 된 송 전 시장이 책임질 수도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러시아가 속으로 ‘한국 참 쉬운 나라구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3박 4일의 방러 기간 중 느낀 위안거리라면 소장파 전문가들의 전향적인 자세였다. 최소한 북한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반도를 보려 하지 않고, 미소(美蘇) 대결이라는 냉전(冷戰)의 틀 속에서 한국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하는 세대다. 유현석 KF 이사장은 “차세대 지도자급 중 친한파 인사를 양성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올해는 조러수호통상조약 체결 130주년을 맞은 해이다. 하지만 평균적인 한국인들에게 러시아는 여전히 먼 나라다. 현재의 독일을 보면서 ‘나치’를 떠올리지 않는 것처럼 러시아를 보면서 ‘붉은 제국’을 연상하지 말아 달라는 러시아 젊은 학자의 당부가 새로운 양국관계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모스크바에서

하태원 정치부 차장 triplets@donga.com
#한-러시아 포럼#지한파#북한 인권#소장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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