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지은]딸 같아서 ‘프리 허그’?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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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사회평론가
정지은 사회평론가
요새 한국 사회지도층(?) 분들은 옛날 생각 하게 하는 재주가 있으신 모양이다. 전 지검장님은 바바리맨 목격담, 전 국회의장님은 성희롱과 성추행, 이에 뒤질세라 출판사 상무님까지 성추행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계시니 말이다.

줄줄이 생각나는 기억들을 다 말할 수는 없으니 하나만 떠올려 보려고 한다. 내 사례가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덧붙이고 싶다. 20대 중반에 취직한 회사였다. 출근 둘째 날, 퇴근해도 되나 망설이고 있는데 사장 다음으로 높은 분이 저녁을 사주겠다고 했다. 중요한 분을 만나러 가는데 소개를 시켜 주겠다면서. 맥주를 곁들인 저녁 시간 동안 “잘 모셔야 한다, 앞으로 계속 뵐 분이다”를 몇 번 들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중요한 분이 햇병아리 신입사원과 저녁 먹을 시간은 어떻게 있으신 건지 궁금했지만 치켜세우는 상사 앞에서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흥이 깨지지 않도록 타이밍 맞춰 맥주잔을 채워 드리는 동안 식사 자리가 끝났다. 황급히 돌아서는데 상사가 손을 잡아끌었다. 술도 안 먹었으니 노래방까지는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제 막 회사에 들어온 막내였다. 셋뿐이었으니 떠넘기고 갈 동료도 없었고, 8시쯤이었으니 늦은 시간이라는 핑계도 불가능했다. 노래방에 도착하자마자 높으신 분은 구성지게 트로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상사는 다시 한 번 내 손을 잡아끌었다. “거기서 뭐해, 와서 박자 좀 맞춰야지….” “네?” 높으시고 중요한 분은 아주 자연스럽게 내 허리에 한 손을 얹고 다른 한 손으로 어깨를 감싸며 마이크를 내게 내밀었다. “어이구, 이렇게 뻣뻣해서야… 노래하다 보면 풀릴 거야.” 많이 해보신 듯 자세가 아주 능숙했다. 나는 그 자세 그대로 얼음처럼 굳었지만 그분은 이런 자세 역시 익숙한 듯했다. 내가 노래를 부르지 않자 그 자세 그대로 마이크를 살짝 꺾어 자신과 나 사이에 놓고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입을 열 때마다 술과 담배 냄새가 섞인 구취가 날아왔고, 리듬에 맞춰 몸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이 정지한 느낌이었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곡이 끝나자 아쉬워하는 손길이 느슨해졌고,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나는 그 자리에서 가방을 챙겨 방을 빠져나왔다. 순식간에 내린 결정이었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 회사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지금도 그 선택에 후회는 없다.

이런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후 상황은 대동소이하다. 이 상황에 분노한 내가 검찰에 고소했다면? “억지로 블루스를 추게 한 점은 인정되나 상대방의 저항이 없었다”고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할 가능성이 높다. 그게 현실이다. 실제로 쌤앤파커스 출판사 사건이 이렇게 처리됐다. 문제의 상무가 복직할 수 있도록 법이 도와준 셈이다. 반면 피해자는 여전히 무직 상태다.

모든 성 관련 범죄는 “아무리 오래된 일이어도, 아주 경미한 사건이어도 결코 잊지 않고 있다는 점, 당시 합리적인 대처를 해볼 수 없었다”는 점은 물론이고, 대응 방식 역시 피해자의 행실을 문제 삼거나 별것 아닌 사안에 민감하게 군다고 비난한다는 점에서 판박이다. 이 출판사는 “서로를 아끼는 의미로 구성원들이 서로 프리 허그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였다”는 공식 입장을 표명했다. 그럼 내가 겪은 노래방에서의 일도 ‘프리 허그’인가?

소설가 정세랑의 표현대로 이번 사건은 “우리 모두의 악몽을 햇빛 속으로 끌어냈다”. 출판 팟캐스트 ‘뫼비우스의 띠지’에서도 ‘아프니까 고발한다’ 편을 긴급 편성해 성폭력 실태를 공유할 예정이다. 한 사람의 용기가 불러온 변화다. “그것이 죄라는 걸 법이 인정하게 만드는 판례를 만드는 것”이라는 피해자의 최종 목표가 꼭 이뤄지길 응원한다. 당신 덕에 나 역시 묻어뒀던 10년 전 악몽을 햇빛에 내놓을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지겨우니 이제 그만하자”고 외면하는 대신 잊지 않고 지켜보겠다.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줄어들 수 있도록.

정지은 사회평론가
#성희롱#성추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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