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의전서열 2위. 대외적으로 입법부의 수장으로 국회를 대표하는 최고기관. 대내적으로는 의사정리권, 질서유지권 및 사무감독권 보유. 단 초당적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라는 취지에서 당적 보유는 금지. 헌법과 법률에 명시된 대한민국 국회의장의 지위와 권능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5개월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는 대혼란 속에 지도력의 공백이 어느 때보다 크게 느껴지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특히 세월호 특별법이 통과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5월 이후 단 한 건의 법안도 처리하지 못한 입법부 수장의 모습은 애처롭다 못해 참담해 보인다.
장고(長考)를 거듭하던 끝에 정의화 국회의장은 16일 정기국회 의사일정을 직권으로 결정했다. “어려운 대내외적 상황 속에서 산적한 민생 현안을 눈앞에 두고 국회를 계속 공전시키는 것은 국민의 뜻을 외면하는 것으로 보아 국회 정기회 의사일정을 최종 결심했다”는 것이 이날 오후 2시 반 정 의장의 메시지였다. 정기국회 개회 16일 만에 내린 느림보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하지만 발언이 나온 시점이 4시간 반 전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국회를 맹폭한 뒤라 뒷맛은 씁쓸했다. 박 대통령은 “(국회가) 국민에 대한 의무를 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 의무를 반납하고 세비도 돌려줘야 한다”고 추상같이 호령했다. 딱 ‘앗 뜨거라’며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움직인 꼴이다. 6월 의장 취임 직후 정 의장이 자랑삼아 공개했던 대통령과의 ‘핫라인’이 가동이나 됐는지 궁금하다.
그나마 정 의장 스타일상 의사일정은 진행하되 여야 합의로 본회의에 상정된 91개 민생법안은 직권상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단독 처리 시 청와대가 진짜 원하는 정부조직법과 경제현안 관련 30여 개 법안이 봉쇄될 수 있다는 걱정을 한단다.
하지만 상당수 새누리당 의원들은 “정 의장이 야당의 평판에 대단히 민감하다”며 “자기 이미지에 손상을 입을 일은 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정 의장에게 사심(私心)이 있다”는 수군거림도 들린다.
국회의장이라는 자리가 여야를 잘 다독여 화합하는 것이 주요한 임무라고 해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관례를 볼 때 사실상 의정생활을 마무리하는 자리인 데다 실질적인 권한은 거의 없는 ‘명예직’인 국회의장에게 대통령도 못하는 일을 해내라고 다그치는 것이 억울할 수도 있다. 의사일정 진행의 실권을 가진 여야 원내대표들이 의장의 말을 무서워하지 않으니 통제할 능력이 없다는 한숨도 나온다.
비장의 무기 격인 직권상정권한도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유명무실해진 상황이다. 오죽했으면 정 의장 스스로 “의장이 식물국회의장으로 가고 있다”고 한탄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의장에게 한 가닥 기대를 걸어 보는 것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커져버린 의회권력을 통솔해 나가야 할 사람은 결국 입법부 수장인 국회의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헌국회 이후 탄생한 22명의 의장 중에는 ‘현실적 한계’를 극복한 명(名)의장도 더러 있었다.
국회를 화합, 소통, 민의의 전당으로 만들겠다고 한 약속에 대한 실천에 나서야 한다. 110여 일간의 시행착오에서 배우면 된다. 원칙을 깨고 국회 앞마당을 농성장으로 허용했던 판단착오는 없어야 한다. 벌써부터 국회 구석구석에 정 의장에게 찬성표를 던졌던 의원들이 후회의 뜻으로 잘라낸 손가락이 즐비하다는 섬뜩한 농담이 나돈다고 한다. 이래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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