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세종문화회관의 널찍한 계단이나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스페인 광장 계단을 떠올려 보라. 계단의 주인은 바쁘게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계단참에 앉아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연인들, 가위바위보 놀이를 하는 아이들, 계단의 높이가 선사하는 도시 풍경이나 간이 야외 공연을 감상하며 다리를 쉬는 과객들이 계단의 주인공들이다.
곽희수 이뎀도시건축 대표(47·사진)는 이런 광장 같은 야외 계단을 상업 건축에 시도했다. 충북 청주시 성화동에 최근 완공한 ‘F.S.ONE’은 제2종 근린생활시설, 쉽게 말해 상가건물이지만 건물 전면을 차지하는 대형 계단으로 기억되는 건축이다. 건물 이름도 ‘floor(층)’와 ‘stair(계단)’가 하나라는 뜻으로 지었다.
“마당이 있는 임대 건물을 짓고 싶었어요. 마당은 1층이나 옥상에 둘 수밖에 없어 중간층에 사는 세입자들은 이용할 수가 없죠. 그래서 모든 층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가운데 마당 같은 계단을 둔 겁니다. 이곳에선 약혼식을 올릴 수도, 벼룩시장이나 설치미술 전시가 열릴 수도 있습니다. 계단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저도 궁금하네요.”
야외 계단은 실내 디자인도 지배한다. 지상 5층 건물의 2∼4층에 계단이 있는데, 내부도 1∼3층이 하나로 묶여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깥 계단의 기울기에 조응해 천장이 사선으로 쭉 올라가는 구조다. 천장엔 외피에 쓰인 노출 콘크리트가 서까래처럼 골을 만들며 힘 있게 뻗어 있어 역동적인 분위기를 낸다.
건축주는 공공건물의 계단처럼 건물 앞을 지나는 모든 이에게 열린 계단을 두고 싶었지만 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결국 안으로만 열린 공간이 됐다. 그래서 현재 입주해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 갤러리 방문객들만 계단을 이용할 수 있다.
F.S.ONE이 기존 상가건물과 다른 점은 계단만이 아니다. 임대 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대한의 공간을 뽑아내도록 설계된 무표정한 빌딩들과 달리 총면적(967.3m²)이 법이 허용하는 면적의 3분의 1 규모이고, 표정도 강하다. 노출 콘크리트 외관은 육중하고 모가 났으며 돌출적이다. 웬만한 무기로는 꿈적도 않는 벙커나 근육질의 로봇 같다. 대로변에서 보이는 건 건물의 정면이 아니라 옆면이어서 옆얼굴이 보이도록 돌아앉은 모양새다.
“상가 건물의 문법을 바꾸고 싶었어요. 예전과 달리 공실률이 높은 지금은 큰 땅에도 예산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작게 짓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는 주변에 ‘묻어가는’ 법이 없는 마초적인 건축 스타일로 기존의 건축 문화에 강한 문제 제기를 해왔다. 럭셔리 펜션인 ‘모켄’(2011년)으로 호텔-리조트-펜션-민박의 서열 관계를 뒤집었다. ‘고소영 빌딩’으로 불리는 서울 청담동의 상가건물 ‘테티스’(2007년)는 건물 앞에 주차를 못하도록 설계해 대문의 기능을 살려냈고, ‘원빈 집’으로 불리는 강원 정선 ‘42번 루트하우스’(2007년)는 도로 쪽에 바짝 붙여 집을 지어 국도변의 표정을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얼마 전 온라인에서 해외 브랜드의 가방을 샀어요. 그런데 막상 매보니 제 체형과 맞지 않더군요. 그동안 유학파 건축가들이 우리 도시에 해외 스타일의 건축을 ‘유통’시켜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한국 도시의 역사는 50년 정도밖에 안돼 고유의 스타일이 정착되지 않았습니다. 이곳의 역동성을 담아내는, 우리 몸에 맞는 건축을 고민했던 건축가로 기억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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