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공백이 뚜렷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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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이 뚜렷하다’
문인수(1945∼ )

해 넘긴 달력을 떼자 파스 뗀 흔적 같다.
네모반듯하니, 방금 대패질한
송판냄새처럼 깨끗하다.
새까만 날짜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나가,
땅거미처럼 먹물처럼 번진 것인지
사방 벽이 거짓말 같이 더럽다.
그러니 아쉽다. 하루가, 한 주일이, 한 달이
헐어놓기만 하면 금세
쌀 떨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 해가 갔다.
공백만 뚜렷하다.
이 하얗게 바닥난 데가 결국,
무슨 문이거나 뚜껑일까.
여길 열고 나가? 쾅, 닫고 드러눕는 거?

올해도 역시 한국투자증권,
새 달력을 걸어 쓰윽 덮어버리는 것이다.
     
      

박수근의 ‘시장 사람들’
박수근의 ‘시장 사람들’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가 버겁다. 예전에 흔히 볼 수 있던 것들을 이젠 찾아보기 힘들다. 1년 365일, 날마다 한 장 한 장 뜯어내는 일력(日曆) 달력도 그렇다. 습자지처럼 얇은 종이에 그날그날 양력과 음력, 요일, 절기 등이 인쇄된 일력은 메모장으로 (때론 화장실에서) 유용하게 활용된 달력이었고 연말연시 선물로도 대접받았다. 해가 갈수록 시간의 흐름에 무심해지는 엄마의 방에 걸어놓기 위해 남의 사무실에 걸려있던 추억의 달력을 얻어왔다. 지극히 평범한 달력이 새삼 귀한 의미와 특별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스마트폰 만능시대라지만 큼지막한 숫자가 적힌 달력 한 장을 떼어내며 하루의 가치를 돌아보는 순간도 의미가 있을 터다.

지난주 싱가포르 출장을 가보니 음력 설을 쇠는 나라답게 어디서나 새해 축하 메시지를 접할 수 있었다. 차이나타운에는 말의 해를 상징하는 큼직한 등이 줄줄이 걸리고 호텔들은 붉은 등을 내걸었다. 한국인에게 설 연휴는 민족의 대명절이자 느슨해진 신년의 각오를 또 한번 다잡는 기회다. 마트의 ‘1+1 행사’처럼 신정과 설을 통해 새해를 두 번 맞는 셈이니까. 문인수 시인의 ‘공백이 뚜렷하다’는 홑겹만 달랑 남은 달력을 뗀 뒤 드러난 하얀 공백에서 무상한 삶을 읽어낸다. 시는 가난한 집안의 쌀통처럼 일단 헐어놓으면 하루, 한 주일, 한 달이 야금야금 줄어가는 허전함을 새 달력과 함께 희망으로 채워야 한다고 일러준다.

올해 명절도 고향 가는 길은 번잡할 것이다. 긴 여정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시와 더불어 탄생 100주년을 맞은 박수근(1914∼1965)의 그림을 골랐다. 우리가 떨쳐버리려 그토록 애썼던 궁핍한 시대의 초상 속에 ‘가난했지만 정이 넘쳐 있던 고향’의 원형이 숨쉰다. 세월이 오래 흘러도 한국인이면 공감할 만한 따스한 풍경, 기억의 곳간을 돌아보게 한다.

얼마 전 전북 진안군 마이산의 탑사를 소개하는 TV프로그램을 보았다. 자연석을 쌓아올린 거대한 돌탑들이 모여 장관을 이룬 곳이었다. 접착제를 쓴 것도 아니고 엉성하게 쌓은 듯한 돌탑들은 세찬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단다. 그 이유를 묻자 스님이 답했다. “돌탑을 쌓을 때 안 흔들리면 무너진다. 조금씩 흔들려야 쓰러지지 않는다.” 바람 따라 흔들리는 것, 그게 돌탑을 지탱한 비결이었다. 하루하루 금세 흘러가도 돌아보면 한 해는 장거리 여행이다. 팍팍한 순간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말 것. 흔들려야 무너지지 않는 것이 돌탑만은 아닐 테니.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바로잡습니다]

◇25일자 26면 ‘시로 여는 주말’에서 ‘전남 진안군’을 ‘전북 진안군’으로 바로잡습니다.
#공백이 뚜렷하다#문인수#일력 달력#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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