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진짜 富者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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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도 나눕니다”… 마음 따뜻한 기부

구두닦이는 농아 전용출 씨의 인생 그 자체였다. 그는 구두를 닦아 번 돈으로 제3세계의 청각장애 아동에게 희망을 나눠 주고 있다. 21일 전 씨가 서울 중구 신당동 구둣방에서 닦은 구두를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구두닦이는 농아 전용출 씨의 인생 그 자체였다. 그는 구두를 닦아 번 돈으로 제3세계의 청각장애 아동에게 희망을 나눠 주고 있다. 21일 전 씨가 서울 중구 신당동 구둣방에서 닦은 구두를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눈에 띈 건 새까만 맨손이었다. 구두닦이 전용출 씨(54)는 광을 낸 구두를 손님에게 건넸다. “얼마예요?” 그는 손님의 입 모양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화이트보드에 매직펜으로 이렇게 적었다. 3000원. 전 씨는 20년 넘게 서울 중구 신당동 약수역 사거리의 구둣방을 지켜 왔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농아다.

전 씨는 기자에게 통장을 보여 줬다. 매달 4만5000원이 과테말라의 청각장애 어린이 마리엘라(11·여)에게 송금되고 있었다. 구두 15켤레를 닦아야 손에 쥐는 돈. 그는 ‘비자금 통장’이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입술 앞에 세웠다. 전세 보증금 1억 원이 전 재산인 그가 1만3000km나 떨어진 곳에 사는 장애 어린이에게 돈을 부치는 이유가 궁금했다.

사연은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 씨는 다섯 살 때 홍역을 심하게 앓은 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병원 치료도, 안수기도도 소용없었다. 열 살 때 병으로 앓아 누운 어머니를 대신해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그렇게 구두통을 잡았다. 어떤 손님은 전 씨가 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구두통을 걷어찼다. 그럴 때마다 가슴속으로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른다.

전 씨는 2012년 12월 우연히 TV에서 제3세계 빈곤 아동들의 실태를 목격했다. ‘열 살배기 구두닦이’였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졌다. 국제어린이양육기구인 컴패션에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는 아이들을 돕고 싶다”고 요청해 마리엘라를 알게 됐다. “넉넉하지도 않은 형편에 누굴 돕느냐”는 핀잔을 들을까 봐 아내에게는 비밀로 했다.

기부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전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해 답답함을 안고 살았다. “대학생 아들에게 소리를 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던 게 한(恨)이었죠.” 김애식 노량진농인교회 목사(51·여)가 가슴을 치는 전 씨의 수화를 통역해 줬다. 하지만 기부를 시작한 뒤 그런 답답함이 말끔히 사라졌다고 했다. 전 씨는 “기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런 건 모른다’는 듯 한참 손을 내젓다가 화이트보드에 이렇게 적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

전 씨처럼 주머니 사정은 넉넉지 않아도 마음만은 누구보다 부자(富者)인 사람들의 ‘나눔 인생’을 들여다봤다.  

“난방도 못하면서 기부를?” 이웃들이 걱정해주지만… ▼

나를 살린 ‘나눔’, 이제 돌려줄 차례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기부는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박희영 씨(왼쪽 사진)와 박성수 씨. 박희영 씨는 베란다 창문에 돗자리를 붙이는 등 난방비와 다른 비용을 절약해 지난해 12월 107만 원을 기부했다. 장애인 트라이애슬론 선수인 박성수 씨는 몇 달 전 사고로 잃은 치아 4개를 치료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매달 2만 원씩 내는 기부는 멈추지 않는다. 인천=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전영한 기자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기부는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박희영 씨(왼쪽 사진)와 박성수 씨. 박희영 씨는 베란다 창문에 돗자리를 붙이는 등 난방비와 다른 비용을 절약해 지난해 12월 107만 원을 기부했다. 장애인 트라이애슬론 선수인 박성수 씨는 몇 달 전 사고로 잃은 치아 4개를 치료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매달 2만 원씩 내는 기부는 멈추지 않는다. 인천=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전영한 기자
달력을 봤다. 내일이면 2013년 12월 5일. 박희영 씨(80)가 애타게 기다려 온 ‘그날’이었다. 그동안 고이 모았던 돈을 꺼냈다. 100원, 500원짜리 동전과 1000원짜리 지폐까지 다 합쳐 모두 107만1300원. 기초생활수급자인 그에겐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다. 그 돈을 챙겨 인천 연수구의 집 근처 선학동주민센터로 갔다.

“돈을 좀 기부하려는데….”

주민센터 직원들은 기부하는 주인공이 박 씨라는 것과 그가 내놓은 금액에 두 번 놀랐다. 수입이라고는 매달 받는 기초생활수급비 37만여 원과 노령연금 9만6800원이 전부인데 어떻게 기부를 할 수 있었을까.

박 씨는 2년여 전 기억을 떠올렸다.

“폐암입니다.”

2011년 11월 인천의 한 대학병원. 박 씨는 의사의 말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한 달 전 이곳에서 위암수술을 받았는데, 또 암이 생겼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해 12월 5일 그는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기를 수차례. 그해 말 암을 이기고 집으로 돌아온 날, 제2의 인생이 시작됐다고 느꼈다.

박 씨는 2002년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30년 전 인천 용현시장에서 큰 식당을 했던 시절은 그저 추억으로 남았다. 사업에 실패한 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두 아들과 딸은 소식이 끊겼고 아내와도 이혼한 뒤 혼자 떠돌았다. 2009년 가을 지금 살고 있는 임대아파트를 얻었다. ‘남들이 힘들게 벌어 낸 세금으로 나만 편하게 지내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에 늘 마음이 무거웠다. 아파트에 입주한 날 그는 결심했다. ‘생활비를 조금이라도 아껴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돌려주자.’ 그렇게 조금씩 돈을 모으던 어느 날,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1년 10월 첫 번째 암 판정을 받았다.

두 번의 암 수술을 받으며 박 씨는 약해진 체력보다 수술비가 더 걱정이었다. 정부 지원금으로 수술비를 해결하자 또 다른 걸림돌이 나타났다. 수술을 위한 보호자 동의 서명을 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 그는 고민 끝에 임대아파트 이웃들에게 연락했다.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한 할머니가 흔쾌히 병원으로 달려와 줬다. 남의 도움으로 얻은 삶, 남을 위해 써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였다. 박 씨의 기부는 그렇게 시작됐다.

“남들은 내가 안 먹고 안 입고 돈을 모으는 줄 아는데 쌀밥에 고기도 사먹어요. 굶지 않아도 계획적으로 절약하면 충분히 가능하죠.”

박 씨는 집에서 난방을 하지 않는다. 창문에 포장용 에어캡(뽁뽁이)과 돗자리를 겹겹이 붙여 추위를 막았다. 더 추울 땐 전기장판만 가끔 켠다. 전기를 아끼려고 밤에는 전등 대신 작은 스탠드 하나로 생활한다. 이 때문에 이웃들에게서 “당신보다 어려운 사람이 어디 있느냐. 차라리 그 돈으로 먹고 싶은 거나 실컷 사 먹어라”라는 말도 듣는다. 하지만 그는 행복하다. 기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날, 수술 부위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싹 가셨다. 박 씨의 돈은 주민센터의 소개로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전달됐다. 그는 다시 돈을 모으고 있다. 올해 12월 5일에도 기부를 하고 싶어서다.

“내 돈으로 나보다 어려운 이들이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분이 좋아져요. TV에서 가끔 혼자 잘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안타까워요. 조금만 나누면 더 행복해질 텐데….”
아들 때문에 시작한 나눔이 삶의 축복으로

정영태 씨(49)는 2008년 가을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사랑하는 막내아들 찬영이(14)가 그때 소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형편이 어려워져 사업을 정리하고 경기 남양주시에서 작은 편의점을 열었을 무렵이었다. 빚이 많은데 편의점 매출은 오를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찬영이의 발병은 가족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딸 다은이(20)와 큰 아들 주영이(18)의 말수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아내(47)와 어머니(79)의 한숨도 깊어만 갔다.

정 씨는 홀로 편의점을 지키며 멍하니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불어 가는 찬영이의 병원비는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정부 지원금과 백혈병재단 등의 도움으로 일부를 충당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막막했다. 그는 불안을 잊으려 책을 읽었다. 그때 읽은 책이 한비야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였다. 저자가 제3세계의 아동들을 돕는 이야기에 그의 마음이 움직였다.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아들의 또래라는 것만으로도 끌렸다. 매달 2만 원(현재 3만 원)이면 이 아이들이 공부도 하고 간식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작은 도움으로 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겠네.’ 정 씨는 2008년 11월 국제구호단체 월드비전의 문을 두드렸다.

솔직히 이기적인 마음도 없진 않았다. ‘내가 나눔을 실천하면 찬영이에게도 한줄기 빛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그렇게 방글라데시에 사는 한 아이의 후원자가 됐다. 그때부터 정 씨의 마음가짐이 변했다. 버는 돈의 무게가 달라졌다. 내가 번 돈이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는 생각에 사명감까지 생겼다. 기부를 늘렸고 지금은 3명의 어린이를 후원하고 있다.

정 씨의 바람과 달리 찬영이의 상태는 계속 나빠졌다. 연이은 재발로 4차례 수술을 받았다. 후원을 줄여야 할까 고민했던 순간도 있었다. 계속되는 매출 부진과 늘어 가는 병원비로 인해 한 푼이 아쉬웠기 때문. 지난해 후원 사실을 처음 털어놓자 아내는 “다은이와 주영이 용돈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데 무슨 남의 아이들을 돕느냐”며 서운해했다.

그러나 정 씨는 후회하지 않는다. 힘들 때마다 매월 9만 원의 기부는 버팀목이 돼 줬다. 내가 버텨야 다른 사람들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작은 나눔은 더 큰 나눔으로 이어졌다. 정 씨는 지난해 초 지역 봉사단체에 가입했다. 편의점이 자리를 잡고 형편이 좋아져 제대로 나눔을 실천하고 싶어서다. 한 달에 한 번씩 소외 이웃에 온기를 전하면서 살아갈 힘을 충전한다.

“예전에는 내 가족만 알고 살다가 이제 남을 더 이해하고 배려하게 됐어요. 일에 대한 확신이 생기고 돈을 버는 목적도 뚜렷해졌죠. 기부를 통해 오히려 내가 축복을 받은 셈입니다.”
내가 돌려주는 나눔, 다른 이에게 ‘희망’이 되다

장애인 트라이애슬론(철인3종 경기) 선수 박성수 씨(21)의 삶은 시작부터 힘겨웠다. 태아 때 뇌종양이 발견됐다. 종양이 신경과 혈관을 짓눌러 시야가 좁아지고 무릎관절과 발목도 움직이기 힘들었다. 병원에서는 열 살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고 했다. 자라면서 그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고 결국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시각장애 1급, 뇌병변 장애 5급 판정을 받았다.

그는 수영에서 희망을 찾았다. 2009년 장애인 수영 국가대표로 뽑혔다. 하지만 국제장애인수영연맹에서 그의 뇌병변과 시각장애 등급을 동시에 인정하지 않아 장애인올림픽인 패럴림픽에 출전할 수 없었다. 그는 좌절하는 대신 새로운 목표에 도전하기로 했다. 트라이애슬론으로 진로를 바꿨다.

박 씨가 희망을 버리지 않은 것은 바로 ‘나눔’ 덕분. 매달 기초생활수급비와 장애연금을 합친 120여만 원으로 어머니(53), 여동생(18)과 생활하는 어려운 형편이지만 곳곳에서 다가온 ‘나눔의 손길’이 그를 응원했다. 수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던 그에게 한국심장재단은 수술비를 지원했다. 수영을 할 땐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훈련비와 생활비를 도와줬다. 이렇게 받은 나눔을 돌려주고 싶어 박 씨도 기부에 동참했다.

그와 동생이 매달 받는 용돈은 4만 원. 남매는 2012년부터 절반인 2만 원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을 통해 해외 빈곤 아동을 돕는 데 보태고 있다. 그 나름의 사연이 있다. 그는 유독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시력이 나빠 ‘째려본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잦은 경련으로 응급실과 양호실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래서 어려운 아이들만 보면 가슴이 아프다. “군것질 몇 번 참으면 얼마든지 나눌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의 입술 사이로 이가 빠진 잇몸이 보였다. 몇 달 전 사이클 연습을 하다 사고를 내 이 4개를 뽑았지만 치료비가 비싸 아직 이를 심지 못했다. 그래도 박 씨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 기쁘다. 그런 아들이 그저 고맙기만 한 어머니도 20년째 한국심장재단에 매달 3000원씩 기부하고 있다.

박 씨의 꿈은 빈곤 아동과 일대일 결연을 맺는 것. 결연은 매달 3만 원을 기부해야 가능하다. 그는 “여유가 생기면 더 많이 기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의 도움으로 어려운 아이들이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갖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도 ‘나눔으로 행복이 가득한 세상’을 꿈꾸고 있다.  

▼ 마지막 재산까지… “더 많이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

유산 기부를 통해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준 황금자 할머니(왼쪽)와 박용순 할머니는 마지막 재산까지 나누고 떠나는 이들이 늘어나길 바랐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 광명=전영한 기자
유산 기부를 통해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준 황금자 할머니(왼쪽)와 박용순 할머니는 마지막 재산까지 나누고 떠나는 이들이 늘어나길 바랐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 광명=전영한 기자
서울 강서구 부민병원 908호. 병실에 누워 있는 황금자 할머니(90)는 일제강점기 당시 위안부로 끌려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왔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2003년부터 그의 곁을 지켜 온 김정환 강서구청 복지팀장(49)은 “할머니가 이렇게 편안해지신 이유가 있다. 손에 꽉 움켜쥐고 있던 걸 내려놓으면서 한결 후련해 하셨다”고 전했다. ‘기부의 힘’이었다.

1924년 함경도에서 태어난 황 할머니는 13세 때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유리공장으로 끌려갔다. 이어 간도 지방에서 위안부 생활로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광복 후에는 고국에 돌아와 식모살이와 폐품 수집 등으로 어렵게 살아오다 1994년 강서구 등촌동 임대아파트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가슴에 맺힌 한이 많아 주위 사람을 잘 믿지 못했다. 동네에서 ‘말썽꾼’, ‘욕심쟁이 할머니’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황 할머니는 김 팀장을 만나면서 마음을 열었다. 2003년 등촌3동 동사무소에서 근무하던 김 팀장은 할머니의 한 맺힌 사연에 귀를 기울였다. 평생 의지할 곳 없던 할머니는 김 팀장을 친아들처럼 대했다. 어느 날 김 팀장은 할머니에게 “그동안 모은 돈을 소중한 곳에 쓰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머니는 “좋다”며 기부를 시작했다.

황 할머니는 2006년 4000만 원, 2008년과 2010년에는 각각 3000만 원씩 총 1억 원을 재단법인 강서구 장학회에 내놓았다. 평생 어렵게 모은 돈이다. 2011년 7월 노환으로 건강이 급속히 악화됐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할머니는 마지막 기부를 약속했다. 남은 예금과 임대아파트의 임차 보증금 등 약 3000만 원을 내놓겠다는 거였다. 할머니는 그렇게 ‘어려운 이웃을 위한 마지막 선물’을 준비했다.

황 할머니의 기부 소식이 알려진 뒤 강서구청으로 연배가 비슷한 할머니 두 분이 유산 기부를 신청했다. 이들은 자신이 죽으면 전 재산을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써 달라고 부탁했다. 그중 한 분은 유언대로 사후에 재산 2000만 원을 학생 10여 명에게 장학금으로 나눠 줬다.
유산 기부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자신이 죽은 뒤 재산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유산 기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기에 기부의 결정체라고 한다. 최근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5.9%가 유산 기부를 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한국의 유산 기부 비중은 0.5%도 안 될 정도로 걸음마 단계다. 이런 상황에서 넉넉지 않은 살림을 꾸려 가면서도 기부를 실천하는 이들은 더 빛난다.

2013년 7월 19일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써 달라”며 평생 모은 전세 보증금 2800만 원을 보내겠다는 거였다. 전화의 주인공은 박용순 할머니(68). 그는 “TV에서 아프리카 아이들이 바짝 마른 채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내 어린 시절이 기억났다”고 말했다.

박 할머니는 아프리카에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다. 특별히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아프리카 아이들만 생각하면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것은 자신의 고단했던 지난 삶에 대한 눈물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6·25전쟁 중 아버지를 여의고 13세 때부터 식모살이 등을 하며 힘겹게 살아왔다. 결혼 생활도 평탄치 않았다. 한 차례 이혼의 아픔을 겪고 재혼을 했지만 남편과의 불화로 더 큰 상처를 받았다. 2012년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는 남편의 전처가 낳은 자녀들과 유산을 놓고 갈등을 겪기도 했다.

박 할머니는 기부를 통해 아픈 상처를 치유했다. 음식물 쓰레기 수거 등 고된 일을 하며 모아온 ‘피 같은 돈’을 내놓기로 했다. 기초생활수급비 등 약 43만 원의 수입이 한 달 생활비의 전부였지만 경기 광명시청을 찾아가 기부 의사를 전했다. 시청 측은 아프리카 아동을 돕고 싶다는 할머니의 뜻에 따라 관련 단체를 연결해 줬다.

유니세프는 박 할머니가 생활이 어려운데도 전 재산을 기부하겠다는 것을 만류했다. 그 대신 유산 기부를 제안했다. 할머니는 유니세프 측과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지난해 9월 25일 변호사와 증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전세보증금 2800만 원을 사후 유니세프에 주겠다는 증여계약서를 체결했다. 할머니는 유산 기부 외에도 4차례에 걸쳐 640만 원을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써 달라며 보내 왔다.

20일 오전 경기 광명시의 박 할머니 집을 찾았다. 6평 남짓한 방에는 TV조차 놓여 있지 않았다. 그 대신 집 안 곳곳에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포스터와 사진이 붙어 있었다. 아이들의 사진 위에는 할머니가 직접 쓴 “아들 울지 마” “잘 먹고 건강해야 해”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할머니는 “기부를 한 뒤 마음이 편하다. 예전에는 집에 오면 천장만 보고 있었는데 요즘은 아이들 사진을 보면 힘이 난다”고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약속

어려운 이웃을 돕는 어르신들의 선행은 조용히 계속되고 있다.

고인자 할머니(79)는 기초생활수급자다. 수급비와 노령연금을 받고 폐지 등을 주우며 생계를 이어 왔다. 그런 그가 평생 모은 600만 원을 기아대책에 기부했다.

그는 평소 어려운 형편에도 꾸준히 어려운 이웃을 도와 왔다. 늘 “나의 재산을 좋은 데에 쓰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7년 전 다발성 관절염으로 일을 못 하게 되자 요양센터에 들어온 뒤 전 재산을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고 할머니는 “기부를 하면 신바람이 난다. 나쁜 사람들한테 주지 말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 좋겠다”며 “더 많이 기부하고 싶은데 많이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노점상으로 번 전 재산을 최근 충북대에 장학금으로 기탁한 신언임 할머니(83)는 “좋은 일에 쓴다는 마음으로 일을 하니 힘들어도 신이 났다”며 기부 자체가 삶의 원동력이 됐다고 했다. 그는 기부 문화가 더 많이 확산돼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를 보면 재산이 많은 사람들이 움켜쥐고 있다가 쓰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많아요. 어려운 곳에 조금씩 뿌리고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기부를 결심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 그 돈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겠어요.”

조건희·주애진·권오혁 기자 / 청주=장기우 기자
#기부#전용출#나눔인생#정영태#박용순#황금자#유산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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