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명자가 발명품의 이용 방법까지 규정하지는 않는다. 발명자의 의도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이용되는 발명품이 많기 때문이다. 전화를 발명한 알렉산더 벨은 전화를 음성을 전달하는 장치로만 보았다. 통신수단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토머스 에디슨은 영사기와 축음기를 결합한 키네토스코프를 발명해 놓고 영화는 교과서를 대신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포스트잇은 접착메모지라는 용도를 찾지 못해 오랫동안 방치됐고, 에니악(ENIAC)은 탄도 계산 외에 다른 용도가 계속 추가되면서 ‘최초의 컴퓨터’라는 명예를 안게 됐다. 발명자는 발명품의 이용 방법 가운데 하나를 ‘발명’할 뿐 대부분의 이용 방법은 열정적인 이용자가 ‘발견’하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첨단 기술의 새로운 이용 방법을 발견하는 탁월한 혜안을 가졌다. 아이폰은 아이팟(디지털 오디오플레이어)을 기반으로 휴대전화, 카메라, 위치정보, 무선인터넷 기술을 결합한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애플이 독창적으로 개발한 기술은 없다. 아이팟의 원천기술은 우리나라의 MP3에 있고, 다른 기술은 미국 국방부나 다국적기업들이 이미 개발해 놓은 것이다. 잡스는 이들 기술을 아이폰에 융합시켜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용도를 창조했다. 터치스크린 기술도 애플이 개발한 것이 아니다. 손가락으로 누르는 방식을 미는 방식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은 지난달 30일 국회의원회관에서 ‘국가연구개발사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정책연구원의 송치웅 장용석 홍성범 박사팀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K-ARPA’ 모델을 제시했다.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의 연구개발시스템을 한국에 적용하자는 것이다. 이른바 ‘스푸트니크 쇼크’로 탄생한 DARPA는 인터넷,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스텔스 등 획기적인 기술을 완성했다.
한국은 연구개발 성공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사업화율은 말하기 민망할 정도다. 창조적인 도전에 실패하면 낙오자로 찍히기 때문에 창업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니 결론이 뻔한 ‘안전빵’ 연구에 매달린다. 일단 만들고 보자는 공급 위주로 기술을 개발해 놓고 수요가 없으니 이제 와서 기술사업화에 열을 올리는 것은 아닌지….
K-ARPA는 기술개발의 위험과 성과가 매우 높은 분야에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대상으로 기초연구와 개발수요 간의 간극을 메워주는 연구개발시스템을 말한다. K-ARPA가 성공하려면 최고의 인재로 조직을 구성하고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한다. 군대로 치면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보잉, 코카콜라, 미쉐린 같은 다국적기업도 연구개발에서 이런 특수부대를 가동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왜 이런 특수부대가 없을까?
비빔밥은 누구나 비빌 줄 안다. 필요한 것은 원하는 맛을 내는 데 기여하는 재료를 골라내고 그 혼합비율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잡스는 이 능력이 탁월하고 또 집요했다. 흔히 잡스를 융합형 인재라고들 한다. 왜 잡스의 리더십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걸까? 지금 필요한 것은 융합이라기보다는 리더십이다. 잡스는 애플의 직원들에게 “해군이 아니라 해적이 돼라”고 주문했다. 해적은 개발된 기술의 새로운 용도를 찾을 뿐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지 않는다. 추구하는 기술에 대해 신앙에 가까울 정도의 신념을 갖고 장애물을 돌파하는 의지로 똘똘 뭉쳐 있다. 특수부대가 성과를 내려면 최고의사결정자의 비전과 리더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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