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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100년전 이혼소송 90% 여성이 냈다

입력 2013-03-18 03:00업데이트 2013-03-1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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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숙 박사 논문서 드러나
‘양원묵은 결국 이혼’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매일신보 1921년 7월 29일자 기사. 어린 나이에 생식기가 없는 남편과 결혼해 학대 받은 양원묵이라는 여성이 2심에서 이혼 허락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담았다. 매일신보 캡처
“본인은 나이 지금 청춘에 지리한 고생을 견디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금 시대에 징역하는 서방을 바라고 살 수 업사오니 법정에서 명백히 심리하야 다른 곳으로 개가케 하야주삼을 바라나이다.”

1912년 11월 19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이 기사는 당시 경성(서울) 중부에 살던 여성 김성녀가 남편이 복역 중임을 이유로 재혼을 하기 위해 이혼 소송을 청구했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한 소현숙 박사(사진)는 16일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에서 열린 한국여성사학회 월례발표회에서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식민지시기 여성이혼청구권의 도입과 역사적 행위자로서의 조선 여성’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1908년부터 재판이혼이 허용되면서 이혼소송이 급증했고 원고의 90% 이상이 여성이었다. 1918년 사법부 법무과에서 발행한 ‘조선휘보’에 따르면 1908∼1916년 전국 이혼소송 건수는 총 1260건으로, 1908년 1건에 불과했던 것이 1916년 335건으로 급증했다. 유교적 규범이 지배한 조선 후기에 남성은 아내가 칠거지악을 범했다는 이유로 아내를 버릴 수 있었지만 여성이 먼저 이혼을 제기하는 것은 범죄로 취급돼 처벌받았다.

1922년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을 개정해 조선에 여성의 이혼청구권을 도입했다. 재판이혼에 대해 일본 민법을 의용(依用·다른 나라의 법령을 그대로 적용)하기로 결정한 것. 하지만 이혼에 관습법을 적용했던 1910년대부터 이미 여성이 이혼소송을 청구하는 사례가 잇따랐다. 소 박사는 “조선에 여성이혼청구권이 도입된 것은 재판제도를 통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여성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이를 일본 민법의 틀 안으로 수렴하려 했던 일제의 정책적 노력이 개입된 상호작용의 결과”라고 말했다.

이혼 사유의 절반은 남편의 학대와 모욕이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 152호(1928년)에 따르면 1908∼1921년 진행된 이혼 소송 2650건(기각된 경우 포함) 가운데 이혼 원인의 44.8%(1188건)가 학대와 모욕이었다. 악의적 유기가 17.8%(471건), 파렴치죄(살인 강간 방화 등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범죄)가 13.7%(363건)로 뒤를 이었다. 교접불능(1.5%), 처의 간통(1.4%) 사유도 있었다.

남편의 성불구를 이유로 한 이혼소송도 속출했다. 구한말 환관(내시)이 폐관되어 일반인이 되면서 거세 사실을 숨기고 결혼한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는 성불구자에게 속아 결혼한 여성에게 동정적이었다. 하지만 일본 민법에서 이를 이혼 사유로 인정하지 않아 이혼청구가 기각되곤 했다.

1921년 7월 29일자 매일신보에는 어린 나이에 생식기가 없는 남편과 결혼했던 여성 양원묵이 이혼을 청구했다가 1심에서 패소한 사례가 실렸다. 이에 불복한 양원묵은 남편의 학대를 이유로 다시 공소했고 2심에서 이혼 허락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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